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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50화 (250/446)

250화

그다지 얻은 게 없었던 샌드웜 이야기를 끝내고.

욕탕 구석까지 물러난 레이는 다른 생도들은 알아서 대화하게 내버려두고 자신은 머리까지 물속에 담갔다.

보글보글, 물속에서 숨을 내쉬며 레이가 미간을 매만졌다.

'돌로란체에는 나중에 한 번 들려보기로 하고...'

레이는 당장 세계수를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설령 이지스에서 한 학기를 다 못 채우고 나온다고 해도 레이는 필립스 백작령으로 귀환해야했다.

가족도 보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곧 전쟁이 발발한다.

루비하 왕국의 고위층이 악마숭배자 세력과 밀접하게 결탁해 있음이 직간접적으로 밝혀졌다.

가만히 방치하면 더 위험해질 게 뻔했기에 제국은 위험 요소를 확실히 제거할 계획이었다.

이미 전쟁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큰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한 내년 봄이 찾아올 때쯤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전쟁의 승패는 볼 것도 없었다.

아무리 루비하 왕국의 고위층들이 발악한다 해도 제국에 의해 삽시간에 쓸려나갈 터다.

제국에 협조할 왕국의 인사들도 다수 포섭되어 있었기에 결과는 명확했다.

문제는 필립스 백작령이 루비하 왕국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었다.

'왕국의 주력 레인저들이 제국 쪽에 붙는다면 필립스 백작령도 생각보다 안전할 수 있긴 한데...'

그래도 국가 간의 전쟁이니만큼 작은 변수 따위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었고, 방심하고 있다가는 누가 던졌는지도 모를 돌멩이에 머리가 깨질 수 있었다.

필립스 백작령이 방어하기에 좋은 위치도 아니었기에, 전쟁이 발발하면 필립스 백작령에선 잠시 대피하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영지 비우고 대피하려면 아무리 준비를 잘 갖춰도 많이 혼란스러울 테고...'

혼란이 커지면 자잘한 사고도 터지기 쉬웠다.

그렇기에 레이는 만약을 대비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필립스 백작령에 가서 직접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영지를 몇 개월 비우게 되면 필립스 백작님이나 영지민들 손해가 꽤 심각하겠지만 이건 황실이 책임지고 메워준다고 했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 전쟁이 끝나고 루비하 왕국의 악마 숭배자 세력이 완전히 정리가 되었을 때.

그때쯤 레이는 돌로란체에 찾아가볼 생각이었다.

"푸후..."

물속에서 나와 숨을 내뱉은 레이가 벽에 등을 기댔다.

차라리 이렇게 해야할 일과 계획이 딱딱 잡히니 도리어 마음이 좀 가벼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쯤 2급 생도 한 명이 목욕탕에 추가로 들어왔다. 요새 다른 동기들과 갈등이 잦은 테온이었다.

테온은 데런과 아론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3급 생도들이 욕탕에 왜 들어가 있어?"

"야야, 테온. 교관님들이 앞으로는 교칙대로 욕탕 이용하라고 하셨잖아. 좆 같긴 한데 어쩌겠냐. 요즘 교관님들이 부조리 척결한다고 이상한..."

세바스는 나름대로 테온을 달랜다고 그리 말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좋지 않았다.

"너는 벌써 빨갱이들한테 먹혔냐? 하, 얼마나 우습게 보였길래?"

자존심을 쫙쫙 긁어내는 테온의 발언에 세바스가 마찬가지로 미간을 구기던 찰나.

레이가 욕탕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테온을 향해 다가갔다.

"아이, 선배님. 입학하고 계속 느꼈는데 왜 그렇게 공격적이세요? 근래에 뭐 안 좋은 일 있었어요?"

"..."

테온은 레이의 아랫도리가 아니라 레이의 상체를 뒤덮은 상처를 보고 순간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그 사이 테온에게 가까이 다가선 레이가 테온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며 혀를 찼다.

"쯧, 선배님, 요즘 선배님이 왜 그리 방황을 하시는가,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들어봤는데, 예, 선배님 마음 다 이해합니다, 이해해요. 답답한 것도 많고 섭섭한 것도 많으실 것 같아요."

"..."

"그런데 이런 때일수록 마음을 다잡으셔야죠.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를 열심히 갈고닦으시면 원하는 성취와 명성을 얻을 수 있으실 겁니다. 지금 이렇게 감정 가는 대로 여기저기 시비 걸어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

테온 또한 레이가 위장 교관이라는 소문을 들어봤기에 레이에게 어떻게 대꾸해야할 지 감을 못 잡고 우왕좌왕했다.

그 사이 레이는 테온을 향한 훈계를 전부 마치고는 다시 테온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앞으로 다시 잘해봅시다, 선배님."

흐뭇하게 웃어준 레이가 테온을 욕탕에 밀어넣고는 자기는 욕실 밖으로 빠져나가며 외쳤다.

"선배님, 인내심을 가지라고, 인내심을!"

"..."

테온은 마지막까지 레이에게 뭐라 대꾸해야할지 갈등하다 결국 한 마디도 못하고 입만 뻐금거렸다.

그꼴을 보던 하비가 탄성을 흘리며 세바스를 돌아봤다.

"이야... 저래놓고 나중에 가서 말이야, 저놈이 위장 교관이 아니라 그냥 진짜 생도였다고 밝혀지면 존나 웃길 거 같아?"

"야, 그러면 저 새끼 잡아와서 한 달 동안 이지스 정문에 거꾸로 매달아 놔야지."

*

수호자급 엘프와 접촉한 후 며칠 뒤.

레이는 점심 시간에 교관들이 이용하는 휴게실 한곳에서 넬슨과 단둘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넬슨이 할 말이 있다고 부른 것이었는데, 레이가 접시 위의 고기를 자르며 물었다.

"난 왜 불렀어?"

"준비된 식사가 변변치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 교관님, 그런 이야기는 됐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곧 3급 생도와 2도 생도들의 중간 평가 시험이 있습니다."

"이지스는 상시 평가 시스템 아니었어? 뭐 대련이라도 한 판 더 붙이나?"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뭔데?"

"종류를 구분하자면 극기 훈련에 가깝습니다."

넬슨이 중간 평가 시험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먼저 2급 생도와 3급 생도를 섞어 두 개의 팀을 편성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음식과 식수를 제한받는 환경 속에서, 중간중간 행해지는 습격까지 막아내며 낙오자 없이 수백 킬로미터 이상을 주파해야 합니다. 며칠 동안 숙면은 고사하고 자리에 눕기도 힘들 겁니다. 먼저 목적지에 도달하는 팀이 승리합니다."

"말 그대로 극기 훈련이네."

인내심, 위기 대처 능력, 단합심, 그리고 정신력.

극한의 상황 속에서 생존해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선 위의 능력이 필수적이었다.

중간 평가 시험은 그러한 능력을 검증하고 또한 단련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근데... 넬슨. 훈련 지역이 어딘데 경로가 수백킬로미터나 돼?"

"이지스 내부입니다. 결계를 활용해 같은 지점을 계속 돌게 만들 겁니다. 결계 내부에선 환경을 인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니 날씨 또한 시사각각 변할 겁니다."

"아하, 역시 이지스."

레이는 내심 안심했다.

이지스 내부에서 뺑뺑이 돌리며 시험을 치른다면 중간에 위험한 사고가 발생한다 해도 바로 대처 가능할 터다.

"근데 이야기 들어보니까 보통 결계로는 안 될 거 같은데? 생도들 실력도 좋아서 어설픈 결계로는 긴장만 떨어지지 않겠어?"

"예, 그래서 황도의 중앙시스템에서 결계의 동력을 공급받을 예정입니다. 동력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더욱 강력한 결계를 전개할 수 있을 겁니다."

황도의 중앙시스템엔 잔여 마나가 넘쳐났다.

그쪽의 동력까지 끌어온다면 대규모 고위 결계라 해도 며칠 정도는 아주 안전하게 유지 가능할 터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에게 넬슨이 물었다.

"중간 평가에 참여하실 겁니까?"

"...웬만하면 빼고 싶은데."

"생도 신분을 유지하시려 한다면 참가하셔야 됩니다."

넬슨은 딱 잘라 그리 말했다.

고의로 극한의 상황에 밀어 넣은 뒤 낙오하려는 사람까지 끌고 가야 하는 시험이었기에 몸이 아프든 실력이 부족하든 얄짤 없이 참가해야 했다.

헌데 여기서 레이만 빠져버리면 시험의 취지가 완전히 무너지는 꼴이었다.

레이를 향한 넬슨의 태도는 깍듯했지만 그래도 안 되는 안 되는 거였다.

레이가 한숨을 뻑뻑 쉬고는 넬슨에게 되물었다.

"안전한 거 맞지?"

"최대한 안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유사한 형태의 훈련을 많이 진행했지만 심각한 사고가 발생한 적은 이지스 역사상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에휴, 또 며칠 고생 좀 하겠네... 음?"

한숨을 쉬던 레이가 인기척을 느끼고 문을 돌아보았다.

직후, 레이는 창문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리아의 모습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 의자를 덜컹거렸다.

눈치를 보던 레이가 떨떠름한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세리아가 냉큼 들어와서 레이 바로 옆에 딱 달라붙어 앉았다.

"조카, 왜 여기서 식사해?"

"교관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요, 하하. 고모는 식사하셨어요?"

세리아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세리아의 눈빛이 꽤나 강렬했기에 레이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혹시나 해서 물었다.

"고모께서도 같이 식사하실래요?"

"나 배불러. 조카 먹는 것만 봐도."

"..."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마주 앉아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넬슨도 은근히 턱에 힘이 들어갔다.

어린 나이에 높은 경지를 이룩한 세리아는 겉모습만 보아선 레이와 나이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런 세리아가 레이를 꼬맹이 다루듯 둥가둥가해주는 모습을 보니 웃음을 참아내기가 꽤나 고역이었다.

레이는 쪽팔림에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 포기하고 고기를 마저 썰었다.

사실, 세리아가 자기 허벅지 위에 레이를 앉히지 않은 것만 해도 많이 참아준 것이었다.

*

"놀랍군."

지하의 암실에서 남자가 짧게 박수쳤다.

"신뢰 못할 정보라고 생각했는데... 정보가 사실이더군."

"...확실히 확인한건가?"

"확실히 확인했다니까. 근데 이 정보, 대체 출처가 어디지?"

"..."

"나한테는 비밀이야? 응? 여기까지 와서?"

"...1황자."

두꺼운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자가 그리 답했다. 남자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지금 1황자 전하는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남자는 말을 하다말고 탄성을 작게 흘렸다.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던 자가 말한 '1황자'가 누구를 칭한건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이 갔다.

몇 년 전에 1황자 신분으로 루비하 왕국에 망명을 시도했다가 죽은 자가 있지 않던가.

한때 황태자 직위를 가졌던 자이니 황도와 관련된 기밀 사항을 여럿 알고 있었을 게 당연했다.

"갑자기 좀 걱정이 되는데."

1황자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전 황제 또한 알고 있었을 터다.

그에 대해 당연히 대비를 했어야 했는데...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1황자가 추살당하고 난 후 제국 정세가 워낙 복잡했던데다 황제도 상심이 컸었던 만큼 뚫려 있을 구멍을 제대로 인지 못하고 넘어갔다 해도 납득할만은 했다.

"좋아. 이걸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언제 움직일 거지?"

"..."

두꺼운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던 자와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며 재차 기싸움을 했다.

그 찰나, 몇 걸음 떨어져 있던 여자가 손가락을 튕기며 다가와서는 세로로 갈라진 눈동자로 남자를 응시했다.

"황도로 진입 후 황도의 중앙시스템에서 동력을 끌어와야 해. 평상시라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이 시간을 단축해야 하는데..."

"..."

"마침 가까운 시일 내에 좋은 기회가 찾아왔어."

수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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