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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49화 (249/446)

249화

레이는 아니꼬운 감정을 엘프에게 그대로 드러냈다.

귀쟁이라는 멸칭을 반복해서 운운했으니 목소리가 높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엘프로부터 느껴지는 감정의 동요는 도리어 잦아들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겠다. 네가 황제가 말한 인간이 맞는가?"

엘프의 목소리엔 이제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화가 났거나, 짜증이 났거나, 하다못해 차갑다는 느낌마저 목소리에선 느껴지지 않았다. 흡사 기계음을 듣는 듯했다.

레이가 허공을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엘프가 은신을 풀었다.

레이에게 처음 내비쳐준 감정이 인간을 위한 배려라도 되었다는 듯, 엘프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색채 없는 그림을 닮아 있었다.

레이가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자 엘프가 가슴까지 오는 긴 나뭇가지를 땅에 박아넣었다.

화아악!

바람이 불어닥침과 동시에 풍경이 변화한다.

나뭇가지를 중심으로 녹빛이 일렁거리더니 레이는 어느새 숲 한가운데 발을 들이고 있었다.

엘프가 펼쳐낸 고유한 결계에 레이는 꽤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뿌드득!

지면을 타고 나뭇가지가 뻗어나오더니 서로를 옭아매며 의자를 만들었다.

엘프는 그 의자 위에 홀로 앉아 다리를 꼬아서 맞물렸다.

"무엇을 원하지?"

"너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인데."

레이가 그리 답하며 질문을 좀 더 명확히 하라는 의도를 전달했다. 허나 엘프는 답하지 않았다.

레이는 기 싸움을 해봤자 큰 의미가 없으리란 걸 깨닫고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그쪽이 뭐 하는 엘프인지 소개를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수호자."

수호자 급 하이엘프.

그들은 세계수의 영역 안에서는 한시적으로나마 로드 급에 이르는 무력을 발현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레이는 저 말을 신뢰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황실이 접선해서 보내준 엘프인 만큼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레시나의 저주를 해주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는지 답해줘."

레이의 목소리에는 짜증과 힐난 등의 잡다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엘프들은 레시나에 관한 문제를 인간 가문에 짬 때려놓고 방치하지 않았던가.

레이는 그리 생각했지만, 스스로를 수호자라 칭한 엘프는 도리어 레시나를 지키고자 했던 자들을 비난했다.

"레시나는 온전하게 고행을 겪어야만 했다."

영혼과 육신이 보호받지 못하고 썩어 문드러지는 것.

좌절하고 괴로워하며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후회하는 것.

그 또한 하나의 의식이자 정화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였다.

"세상의 정화를 위해선 레시나의 고행이 필요했다. 허나 인간에게 방해받았고, 그 결과 대지는 정화되지 못했다."

"..."

레이는 뒷골이 당기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선 목소리를 높여 짜증을 토해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저 생명체인지 인형인지도 잘 분별이 안 가는 엘프에게 감정을 토로해봤자 득 될 게 전혀 없어 보였다.

레이가 한숨을 크게 토해내곤 다시 물었다.

"대지가 정화되지 못한 게 고행을 방해한 인간들 탓이라고? 아니... 그러면 레시나가 흙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네 말대로 '온전하게' 고행을 이행했다면 마경을 정화하는 게 가능했나?"

"..."

엘프는 답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레이는 그리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레시나의 고행이 일종의 의식이었고, 또한 그 의식이 고스란히 이행됐다고 해도 마경에 관한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을 터다.

기껏해야 세계수의 부담이 조금 줄어드는 정도이지 않았을까.

상식적으로 고작 엘프 하나 희생해서 마경을 정화할 수 있었다면 세상은 진즉 깔끔해졌을 것이다.

고개를 저은 레이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마경의 침식을 강화시키는 '핵'이 존재하리란 정보를 접했어."

"..."

"내가 묻고 싶은 건 크게 세 가지야. 마경의 침식을 강화시키는 '핵'이 정말로 존재하나? '핵'을 탐색해서 제거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만약 '핵'을 제거하는 데 성공해서 마경의 침식을 약화시킨다면, 레시나의 저주를 해결할 수 있나?"

레이가 이 사안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울트와 레시나를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마경의 확장이 계속된다면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 큰 위협이 된다.

대지가 한 번 마경화된다면 전투의 승패와 관계 없이 그곳은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이 된다.

그렇다고 정화가 쉽게 가능한가 묻는다면, 단순 물리력으론 불가능했다.

알리모에서 루나가 메테오를 떨어뜨렸음에도 불구하고 금지된 숲은 정화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가능하기만 하다면, 레이는 자신이 죽기 전에 마경의 확장에 관한 문제를 확실히 해결해놓고 싶었다.

'마경의 침식을 강화하는 핵의 정체와 위치만 특정된다면, 굳이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황제와 에른스트를 설득해 제국의 힘을 빌릴 수 있을 텐데...'

레이가 기대를 담아 엘프를 보았다.

허나 엘프는 레이가 원하는 답변을 해주지 않았다.

"인간, 네가 원하는 건 발설하는 게 금지된 정보이다."

"아, 뭐 앞뒤 꽉 막힌 노인네 상대하는 기분이군."

레이가 신경질적으로 툴툴댔다.

"그리 입을 다물 거면 나한테는 왜 찾아왔는데?"

"인간, 원한다면 네가 직접 어머니를 뵙고 답을 청하면 된다."

"...나보고 세계수를 직접 만나라고?"

"그전에 시험을 치르도록 하겠다."

엘프가 다짜고짜 그리 말했다.

직후, 막대한 중력이 레이를 찍어 내렸다.

"...!"

쿵!!

무릎을 땅에 박아넣은 레이가 이를 악물었다.

주변의 중력이 강화되어 피가 머리까지 제대로 돌지 않는 탓에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기절할 게 뻔했다.

'...힘으로 찍어누른 게 아니라 그냥 중력 자체가 강해졌어.'

엘프가 결계 내의 환경을 멋대로 변화시켰다.

이런 공격을 파훼하기 위해선 힘으로 결계를 찢어내거나 결계의 구조를 분석해 역으로 공략해야 했다.

"쯧."

혀를 찬 레이가 해독 권능을 사용했다.

마법 결계와도 신성 결계와도 근본 원리와 구조부터 다른, 오직 세계수의 수호자에게만 공유되는 특수한 종류의 결계가 레이의 권능에 의해 해석되기 시작했다.

레이의 예상보다 결계의 구조가 많이 단순해서, 권능을 사용하고 얼마 안 가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쿵!

레이는 중력을 이겨내고 일어나 성큼성큼 걸었다.

이윽고 엘프의 코앞에 다다른 레이가 검을 뽑아 휘둘렀다.

파득!

엘프의 의자를 구성하던 나무줄기 하나가 쪼개졌다.

결계를 이루던 중심구조가 파괴되며 첫 번째 결계가 깨져나갔다.

곧장 풍경이 뒤바뀌며 두 번째 결계가 전개되려 했지만 레이는 더는 엘프와 놀아줄 생각이 없었다.

"장난 좀 적당히 해."

레이가 코어와 서클을 회전시키며 공간을 괴리시키는 마나를 발산했다.

연이어서 레이가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엘프의 목을 베어내자 남아있던 결계가 산산이 조각났다.

드드득!

약간의 소음과 함께 결계가 사라졌다.

엘프는 레이와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무사히 서 있었다.

엘프는 허공에 흩날리는 결계의 파편을 붙잡아보더니 다시 레이를 마주 봤다.

"인간, 네게 엘-람의 잔향이 느껴진다."

"..."

"정식으로 널 세상의 중심에 초대하겠다."

"아이고, 고마우셔라."

레이가 삐딱하게 선 채 답하자 엘프가 지면에 꽂혀 있는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녹빛이 아른거리는 나뭇가지는 벌써 지면에 뿌리를 내리려 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가지가 널 세상의 중심으로 이끌 것이다."

"..."

레이가 신경질적으로 세계수의 가지를 뽑아들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강력한 기세를 품고 있는 기사가 엘프와 레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야기는 끝나셨습니까?"

로얄가드, 다카우스였다.

엘프는 말없이 은신을 전개한 후 몸을 돌렸다.

다카우스가 엘프를 뒤따라가기 전 레이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레이가 적당히 손을 흔들어주자, 다카우스를 비롯해 주변을 조용히 점하고 있던 인기척 몇 개가 바로 사라졌다.

레이가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빙글빙글 돌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이지스의 대형 목욕탕에는 샤워용 장치가 벽에 설치되어 있었다.

레이는 물을 콸콸 뿜어주는 사워용 장치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뜨거운 물을 맞았다.

그래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아 결국 머리를 벽에 쿵 박아보았다.

꽤 강하게 머리를 부딪친 탓에 그 충격으로 벽에 걸려있던 비누가 떨어져 바닥에서 미끄러졌다.

레이가 쭉 미끄러져 가는 비누를 바라보다 마침 옆에서 씻고 있던 세바스에게 부탁했다.

"선배님, 비누 좀 주워주실래요?"

"..."

잠깐 침묵한 세바스가 되물었다.

"응? 지, 지금 뭐라고?"

"비누 좀 주워달라고요."

"..."

세바스는 비누와 레이의 아랫도리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굉장히 조신한 움직임으로 무릎부터 굽혀서 비누를 주웠다.

비누를 받은 레이가 몸을 적당히 씻고 탕에 들어갔다.

레이가 들어간 탕 안에는 데런과 아론이 먼저 몸을 담그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레이가 불러서 반강제로 대형 목욕탕에 들어온 것이었다.

얼마 안 가 샤워를 끝낸 세바스와 하비가 레이와 한 칸 떨어져 있는 욕탕에 몸을 담갔는데, 레이가 그 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선배님들... 지금 3급 생도들이 이용하는 시간입니다."

"아니... 그래도 잠깐 같이 쓸 수는 있잖아...?"

"그건 상관 없는데 그걸 허용해주면 3급 생도들 또 눈치 줄 것 아닙니까. 앞으로 시간 지키세요."

"..."

세바스와 하비는 부글부글 끓는 표정으로 앓는 소리를 흘렸다.

레이가 생도로 위장한 교관이다... 뭐, 그런 소문이 하도 자자해서 일단 참고 있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속이 진정되질 않았다.

그때 아론이 탕을 옮겨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둘의 귓가에 속삭였다.

"선배님들, 참으십쇼. 저 새끼... 아니 저분이 검강을 발현하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아론은 레이가 검강을 허공에 발현했다는 내용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이건 말해봤자 믿을 리가 없었다.

세바스와 하비는 아론을 돌아보더니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세바스는 지금 상황이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 예전에 레이가 스페라의 혼약자 노릇을 하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스페라의 혼약자와 이지스의 위장 교관이 양립 가능한 위치인가?

세바스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한편 레이는 엘프에 관한 일로 머리가 꽤 복잡했다.

세계수가 있다는 엘프들의 숲에 도달하려면 사막 지역을 지나가야 했다.

돌로란체.

세계수 근방에 존재하는 사막화된 지역과 그 지역에 존재하는 소도시들을 함께 아우르는 명칭이었다.

'세계수가 가까운 땅의 지력을 다 빨아먹어서 주변이 사막화되었다는 가설이 있던데...'

아마 진실일 터였다.

마경의 침식을 방어하고 있는 세계수로선 주변을 사막화시켜서라도 에너지를 얻어야 했다.

물론 엘프들이 사막 위에서 살아가진 않았다.

'그 귀쟁이들이 사막 위에서 생활했다간 얼마 못 가 양쪽 귀에서 모래가 쏟아지겠지.'

사막을 횡단하다 드넓은 숲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거기서부터가 엘프의 땅이었다.

여행가들은 사막과 맞닿아 있는 울창한 숲을 보며 강한 위화감 혹은 경이를 느꼈다고 책에 기록하고 있었다.

"그... 혹시 돌로란체 가본 사람 있습니까?"

레이는 큰 기대를 안 하고 물었는데 하비가 답했다.

"난 몇 번 가봤지."

"어, 선배님께서요?"

"우리 가문이 운영하는 상단이 돌로란체에 물자를 공급하거든. 나도 세상 경험 삼아 몇 번 다녀왔지."

"오... 혹시 돌로란체에 뭐 벌레 같은 것도 삽니까?"

"벌레? 무슨 벌레?"

"아니 왜..."

레이는 전생에 보았던 판타지 장르의 창작물들을 떠올리며 약간 흥분했다.

"이야기꾼들이 떠드는 이야기나 소설책에서요, 사막만 가면 사람 잡아먹는 갯지렁이 닮은 거대한 벌레가 모래 속에서 막 튀어나오잖아요."

"..."

"맨날 주인공이 여자 대신 잡아먹히고 여자가 비명 지르면서 엉엉 울고 있으니까 주인공이 벌레 배 가르고 나오면서 벌레 체액 더럽다고 몸 탈탈 털어대는데 제가 그런 내용만 수십 번..."

레이는 생각 없이 떠들다 말고 자신이 쓸데없이 흥분했다는 걸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어... 뭐, 이런 벌레가 진짜로는 없죠?"

레이가 농담이었다고 하하 웃었다.

사막 위에서 사람 잡아먹는 거대 벌레는 레이의 전생의 창작물에서 정말 사골 우려먹듯 등장하는 존재였는데, 설마 환생한 세상에서까지 그런 게 또 튀어나올 것이라 레이는 생각하지 않았다.

헌데 하비가 떫은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더니 레이의 바람을 부정했다.

"...샌드웜이라고 사람 잡아먹는 지렁이 닮은 마물은 사막에 있어."

"아이고..."

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세계의 창조주도 상상력이 영 빈곤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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