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레이와 안소니우스는 대화를 좀 더 나누었다.
레이는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안소니우스의 누이에게 해가 되지 않으리라 이야기했다.
설령 교단의 이익에 반하더라도 세상의 안정을 우선하는 것이 성녀에게 도움이 될 것이란 주장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레이는 장담했다.
안소니우스는 일단 레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말뿐인 약조였으며 오늘의 대화로 쌓인 서로의 신뢰는 얄팍하다 수식하기도 부끄러울 수준이었지만.
레이나 안소니우스나 상대방이 함부로 여기저기 입을 놀리면 상황이 좀 껄끄러워졌으므로 당장은 좋게좋게 넘어가는 것을 택했다.
짧았던 대화가 마무리 수준에 들어갈 때쯤.
레이와 안소니우스가 불현듯 입을 다물고 골목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프리슬란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견갑을 착용한 기사가 골목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셰이였다.
셰이는 레이를 발견한 후 잠간 뜸을 들어더니 가벼운 목소리로 레이에게 인사했다.
"레이, 오랜만이구나."
"안녕하세요, 셰이 경. 여긴 어떻게 찾아오셨어요?"
"네게 전해줄 물건이 있었는데... 네가 건물 지붕을 밟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찾아왔어. 근데 저분은...?"
"아, 그러니까..."
레이가 셰이와 안소니우스를 서로에게 소개해주었다.
셰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안소니우스와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고는 레이에게 물었다.
"이지스 안에서 안소니우스 님과 작은 문제가 있었다고..."
"나의 오해로 인해 비롯된 일이었다."
안소니우스가 레이 대신 그리 답했다.
저번 사태는 자신의 오해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고 안소니우스는 분명하게 밝혔다.
답변을 들은 셰이가 레이와 안소니우스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다른 것을 물었다.
"근데 이 골목에는 왜...?"
"정체가 불분명한 기운을 품은 존재가 느껴져 추격했습니다. 여기서 놓쳤고요. 안소니우스 님도 같은 이유로 이곳을 찾았다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대단한 일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니 교관님들께 보고해놓을 생각입니다."
"아... 그래?"
셰이의 표정이 묘하게 떫었다.
레이가 셰이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읽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제가 안소니우스 님과 밀회...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건물 위를 그리 뛰어다니며 난리를 쳤는데 말입니다."
"설마 그럴 리가."
셰이와 레이가 함께 웃었다.
허나 레이는 셰이의 답변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레이가 남부나 교단 측 고위 인사와 접촉하고 있는 모습을 남들이 본다면, '혹시 줄을 갈아타려 간을 보나' 따위의 의심을 한 번쯤 가져볼만 하다고 레이 또한 생각했다.
셰이는 레이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몰랐고, 레이에게 황실의 드래곤 하트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러니 더욱 그런 쪽으로 생각이 튈만했다.
레이는 남부나 교단 측 고위 인사와 접촉하게 되면 행동거지를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단 안소니우스와 헤어졌다.
골목을 나와 대로로 들어선 레이가 셰이에게 물었다.
"전해줄 물건이라는 게 뭐야?"
"프리슬란 후작님의 서한을 전달하러 찾아왔습니다."
"프리슬란 후작님이 나에게?"
"예, 그렇습니다."
셰이는 공손하게 말하면서도 남들의 시선 탓에 한 손으로 툭 서한을 건넸다.
레이는 서한을 받아 품에 넣고는 다른 생도들을 두고 온 장소로 걸으며 다시 물었다.
"용건은 이걸로 끝?"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방금 전 제 언행이 무례하게 느껴지셨다면..."
"아냐아냐,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어. 서한 잘 받았어. 그리고 여유 있으면 아지스 복귀할 때까지 가까운 거리에서 호위 좀 해줘."
"예, 원하신다면."
"아, 황도에서 수상한 놈을 봤다는 이야기도 에른스트 님께 좀 전해 줘."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법은 아니고... 권능에 가까운 기이한 힘을 사용하는 자가 있었어. 그래서 쫓아가다 놓쳤지."
"악마 숭배자입니까?"
"악신의 권능 쪽은 아니긴 했는데... 그래도 신경이 좀 쓰이네. 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수상하긴 했어."
"예, 프리슬란 후작님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어 고마워."
"아닙니다. 그럼 뒤로 물러나겠습니다."
셰이가 자연스럽게 레이와 거리를 벌리고는 뒤를 쫓았다.
그후 레이는 함께 외출했던 생도들을 이지스에 데려다 놓고는 다시 거리로 나와 요하나의 선물을 하나 샀다.
밖에서 봐야 할 일을 전부 마친 레이는 기숙사 방으로 돌아와 품에서 에른스트가 보냈다는 서한을 꺼냈다.
"어디 보자..."
트득!
봉투를 뜯은 레이가 편지지에 적혀 있는 첫 번째 문장을 읽어보고는 감탄했다.
솔직히, 레이는 편지의 첫 줄에 '나다 씹새끼야' 정도 되는 문장이 적혀있으리라 예상했다.
허나 레이의 예상과는 반대로 에른스트는 평범한 안부 인사를 편지지에 적어 놓았다.
"과연 제국의 소드마스터..."
인내심이 이 정도는 되어야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모양이었다.
레이는 얼마 전 나 혹시 생도로 위장한 교관 흉내 같은 것 좀 내며 편하게 지내도 되냐는 물음을 에른스트에게 보냈었다.
레이는 그런 내용을 에른스트에게 보내면서도 과연 여기까지 부탁을 들어줄까 긴가민가 했는데, 에른스트는 편지에서 레이에게 교관을 흉내내든 다른 것을 흉내내든 원하는 신분을 뒤집어써도 된다고 허락하고 있었다.
해당 내용을 담고 있는 글자들이 유난히 굵었다.
편지를 쓸 때 손에 힘을 참 많이 준 모양이었다.
그와 별개로, 어쨌든 사고 한 번 더 치거나 다른 교관들에게 항의가 쏟아지면 그때는 그냥 끌고 나오겠다고 에른스트는 경고하고 있었다.
"아유, 내가 뭐 사고를 치고 싶어서 칩니까."
레이가 그런 양심 없는 소리를 하며 편지를 마저 읽어내렸다.
마지막에 가서 꽤나 중요한 소식이 편지에 담겨 있었다.
*
이지스는 상정 가능한 대부분의 전투 상황을 생도들에게 미리 학습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최근 수백 년간 제국과 엘프가 강한 갈등을 겪으며 직접적으로 적대한 경우는 존재치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지스 생도들만큼은 엘프와의 전투에도 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저격 대응 훈련 과목은 그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과목이었다.
훈련 초반에는 남이 활 쏘는 모습이나 구경하며 입 벌리고 박수만 치면 되었으나, 후반에 이르러서는 정글 같은 곳에 홀로 던져져서 사방에서 행해지는 저격을 피하며 역으로 저격수를 찾아내 포획하는 훈련까지 받아야 했다.
여튼 간에 3급 생도들은 오늘 처음 저격 대응 훈련 과목을 이수하게 되었다.
이 과목은 용병 등의 활동을 하다 이지스와 계약을 맺은 엘프나 황실이 직접 초대한 엘프가 직접 참여해 생도들의 훈련을 도왔다.
당연히 그 엘프들 모두가 '샤프슈터'라 칭해질만한 뛰어난 실력자들이었는데, 일반적으로는 귀족이라 해도 정말 만나기 힘든 자들이었다.
때문에 생도들은 들뜬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엘프들을 빤히 바라봤다.
엘프들의 경우 미모가 수려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사실 그쪽 영향도 좀 컸다.
레이 또한 두 발로 걸어다니는 성인 엘프는 오랜 만에 보았기에 엘프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요하나가 괜히 레이의 등을 툭툭 쳤다.
"뭘 그렇게 쳐다봐?"
"엘프 자문관님들 쳐다보는데?"
"자문관님이 기분 나빠 하시잖아. 그만 쳐다봐."
"아니 다른 애들 내버려두고 왜 나한테만 그래? 저기 데런도 열심히 쳐다보고 있네."
"아, 그만 보라고...!"
"시른데? 계속 볼 건데?"
레이는 그리 말하면서도 틱틱거리는 요하나의 요청에 따라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후 간단한 자기소개가 이어졌는데, 엘프 자문관들 사이로 인간 남자 교관 한 명이 활을 들고 끼어있었다.
레이가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인간임을 재차 확인하고는 아론에게 물었다.
"저 교관님은 누구야?"
"...악스퍼 가문에서 나오셨잖아."
마침 남자가 자기 소개를 했다.
"앤드루 악스퍼다. 잘 부탁한다."
악스퍼 가문이란 정보까지 얻었지만 레이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아론에게 다시 물었다.
"활을 쓰시나 보네. 유명하신 분인가?"
"아니, 어..."
아론은 레이가 정말 몰라서 이런 걸 묻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 자신을 놀리는 것인지 헷갈렸지만 일단 레이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악스퍼 가문 몰라? 그, 600년 전 제국의 전쟁 영웅이었던 카시야스 님의 가문이잖아. 제국에서도 활을 가장 잘 다루기로 유명한 가문이라고."
"아, 아, 맞다, 맞다."
레이도 지나가듯 몇 번 들어본 적 있었다.
악스퍼. 카시야스의 피를 이었다고 전해지는 귀족가였다.
허나 카시야스의 직계가 울트 가디임을 고려하면 저쪽은...
"짝퉁이로군."
"?"
아론은 이 새끼가 또 뭔 개소리를 하나 싶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는 앤드루 악스퍼를 가만히 바라봤다.
악스퍼 가문도 카시야스와 가까운 혈육의 피를 잇긴 했을 터다. 아마도 형제의 피를 이었을 터다.
앤드루가 울트와 외적으로 닮았나 하면... 그건 아니었다.
같은 조상을 지녔다고 해도 600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양쪽의 후손이 똑 닮았을 리가 없었다.
어쨌든 악스퍼 가문은 제국에서도 명문가로 뽑히며 엘프 못지않은 궁술 실력과 비기를 갖추고 있다고 회자되는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다.
레이가 가만히 앤드루를 쳐다보고 있으니, 앞으로의 커리큘럼에 대해 설명하던 엘드루가 레이를 돌아보았다.
다른 생도들은 죄다 엘프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겨 반쯤 넋을 놓고 있는데 레이 홀로 지긋이 앤드루를 바라보고 있으니 바로 티가 났다.
호기심이 생긴 앤드루가 레이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가 물었다.
"삼백... 이십구번 생도, 나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어..."
갑작스러운 앤드루의 물음에 레이는 잠깐 말을 더듬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은 많았지만 레이는 전부 속으로만 생각하고 넘겼다.
다짜고짜 교관님에게는 활보다 검이 더 어울린다며 느그 가문 짝퉁이라고 시비를 걸 수는 없잖은가.
"엑스퍼 가문의 궁술에 대해서 평소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리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가 정석적으로 앤드루를 치켜세워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앤드루는 눈썹을 슬쩍 올리며 흡족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후 커리큘럼 안내가 끝나자, 샤프슈터 엘프들의 전투 시범이 시작됐다.
생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엘프들은 몸을 은폐한 채 기척도 거의 없이 빠르게 움직이며 활을 쏘았다.
그것만해도 위협적이었는데, 엘프들이 쏘아낸 화살은 굉음과 함께 단단한 합금 표적을 푹푹 파고들며 찌그러뜨렸다.
화살이 표적을 박살낼 때마다 그걸 지켜보는 생도들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미리 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샤프슈터들을 만나면 우왕좌왕하다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음을 생도들은 확실히 깨달았다.
이지스 수업에서 엘프들이 샤프슈터의 모든 기술을 생도들에게 공개하진 않을 터다.
철저히 기밀로 취급되는 기술도 다수 가지고 있을 터다.
그렇다해도 미리 경험을 쌓아놓는다면 추후 실전에 투입되었을 때 생도들은 훨씬 유연하게 전장 상황에 대처 가능할 터였다.
엘프들이 시범을 마침과 동시에 첫번째 저격 대응 훈련 수업이 끝났다.
다음 수업까지 여유가 있었기에 레이는 이지스의 광장 부근을 산책 삼아 걸었다.
슬슬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레이는 외출금지인 요하나에게 사복이나 이것저것 사다 줘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황제가 말한 인간인가?"
"아, 그쪽이 날 찾아오겠다고 한 귀쟁이인 모양이군."
"..."
허공에서 들리던 숨소리에 떫은 감정이 깃들자 레이가 조소했다.
"왜? 우리 높으신 귀쟁이님께 내가 좋은 말이라도 해줄 줄 알았나? 너희가 짬 때리고 방치한 동족 때문에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초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