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레이는 신경을 곤두세운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권능이 공명했다는 사실이 레이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권능은 초현실적인 힘이다. 마법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법의 경우, 레이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면이 많았지만, 그렇다 해도 마법은 몇 가지 변치 않는 규칙과 체계화된 이론하에 힘이 발현됐다.
그런 측면에서 권능은 마법과 궤를 달리했다.
권능은 세상의 이치를 비트는 무언가에 가까웠다.
예컨대, 레이의 해독 권능은 어떠한 발현 과정도 거치지 않고 현상을 일으켰으며 막아낼 방법도 마땅치 없었다.
결국 레이가 발휘하는 권능은... 초월적인 존재가 지닌 막강한 힘의 파편이거나 혹은 복제품에 가까웠다.
악신의 사도들 또한 악신의 축복 아래 권능을 행사했다.
레이는 지금까지 악신을 떠받드는 것들과 여러 번 싸워왔지만, 그 수많은 전투 속에서 서로의 권능이 공명 현상을 일으켰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초월자가 내려준 권능이라 해서 무조건 서로 공명한다는 건 아닐 테고... 그렇다면... 권능을 부여한 주체가 동일하다?'
당장 유추 가능한 것 중 가장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레이는 한 번 상상력을 발휘해 보았다.
'설마 날 이곳으로 환생시킨 놈이 나 같은 피해자를 여럿 양산했나?'
만약 그렇다면 불알친구놈도 초월적인 존재에게 붙들려서 이 세계에 같이 환생했을 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레이가 피식 웃었다.
유쾌한 상상이긴 했지만 근거 없는 망상일 뿐이었다.
또한 레이는 친구놈까지 이 세계에 떨어져서 고생하고 있길 바라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내가 쫓고 있는 놈한테 권능을 부여한 주체가 나를 환생시킨 놈과 동일하다는 가정이 옳다면...'
적아를 굳이 가린다면 우호적일 확률이 높지 않을까, 레이는 그리 생각했다.
물론 레이는 긴장감을 놓지 않은 채 황도의 거리를 빠르게 지나치며 해독 권능을 재차 사용했다.
"음..."
아까처럼 제어가 힘들 만큼 강력한 공명 현상이 발생하진 않았다.
허나 여전히 권능을 공명시키는 존재가 있음이 느껴졌다.
레이는 멀어지려 하는 무언가를 향해서 더욱 속도를 높였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은 레이가 검 손잡이를 움켜쥔 채 빠르게 달려대니 잠깐 식겁했다.
허나 레이가 이지스의 생도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는 좀도둑이라도 잡기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안도하며 길을 비켜주었다.
레이는 계속해서 상대와 거리가 좁혀지지 않자 공간검으로 요격이라도 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그건 미친 짓이고.'
황도 안에서 먼저 검을 뽑아 공격 의사도 드러내지 않은 자를 선제공격한다?
뒷감당도 하기 힘들뿐더러, 레이는 상대가 아직 어떤 의도를 지닌 존재인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검을 뽑으려면 따라잡아 얼굴을 보고 뽑아야 했다.
쿵!
레이는 결국 몸을 날려 건물 지붕을 밟으면서까지 상대를 추적했다.
최선을 다해 움직이니 조금씩 조금씩 거리가 좁혀져서, 후드가 달린 망토로 몸을 가린 누군가의 인영이 레이의 시야에 잠시 스쳤다.
레이는 상대가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는 걸 보며 골목길을 향해 곧장 떨어져 내렸다.
높이 솟은 건물 지붕에서 골목길로 떨어져 내린 레이는 가볍게 낙법을 취하려 했지만...
풍덩!
"?!"
물에, 빠졌다.
레이는 그리 느꼈다.
분명 돌로 된 바닥을 밟았을 터인데, 발밑이 아래로 훅 꺼졌다.
물속은 심해처럼 어두웠다. 혀끝에서 짠맛이 느껴졌다.
레이는 당혹감을 뒤로 미루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계?'
당장 떠오르는 건 마법을 사용한 결계였다.
정신을 장악해서 환영을 보여주거나, 혹은 공간을 왜곡해 풍경을 뒤바꾸는 마법 결계들.
이런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건 그런 쪽의 결계들 뿐이었다.
허나 레이는 자신의 예측을 틀렸음을 깨달았다.
해독 권능을 발현해 아무리 주변을 살펴도 머릿속에 뚜렷한 정보가 각인되지 않았다.
만약 지금 이 현상이 마법으로 인해 발생했다면 해독 권능으로 명확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터였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이곳에 권능이라 부를 만한 무언가가 개입되어 있음을 뜻했다.
'이런 씨.'
레이가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는 찰나.
바닷속에서 거대한 물결이 일었다.
레이가 물결이 발생한 진원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거대한 토끼가 있었다.
"..."
바다 속 거대 토끼.
참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이었지만 레이는 바로 웃지 못했다.
저 거대한 토끼의 모습은 레이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어린 날, 그러니까 현생도 아닌 전생의 어린 날.
레이는 기괴한 C급 공포 영화 비스무리한 것을 우연찮게 접한 경험이 있었다.
그 영화에선 웬 이상한 토끼 괴수가 튀어나왔었는데, 바다 속에서 다가오는 토끼가 딱 기억 속의 그 모습이었다.
쩌억!!
토끼의 이빨 가득한 아가리가 찢어지며 그 속에서 두 번째 입이 튀어나왔다.
레이가 짜증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자, 사방에서 괴상한 생물체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레이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각인된 공포와 연관되어 있었다.
보글보글, 레이가 물속에서 한숨을 쉬자 거품 방울이 흘러나왔다.
형상화된 공포의 기억들이 다가올수록 레이의 마음 또한 그날들의 공포에 잠식되어 갔다.
레이는 자신의 의식이 두려움에 빠져드는 걸 느끼며 손아귀를 꽉 쥐었다.
지금 이 공간이 정확인 어떤 원리와 구조로 뒤덮여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레이는 굳이 꿰뚫어보려 하지 않고 서클과 코어를 동시에 회전시켰다.
하르시아가 남긴 유산은 괴이를 부수는 힘.
설령 초월적인 존재의 권능이 개입했다 해도 급조되어 어설픈 환영 따위는 단숨에 부술 수 있었다.
쩌저적!!
냉기가 번져나간다.
얼어붙은 바닷물과 함께 시야가 쩍쩍 갈라졌다.
레이가 손을 뻗어 갈라진 시야를 찢어내며 앞으로 걸었다.
쩡!!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레이가 골목 위로 발을 내디뎠다.
갑자기 풍경이 변화하자 잠깐 휘청인 레이는 균형을 다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괴이한 환영 속은 성공적으로 벗어났다.
허나 레이의 권능을 공명시켰던 존재가 더는 주변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혀를 차며 몇 번 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본 레이가 실망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갔다고...?'
레이는 마음이 굉장히 찝찝해졌다.
상대가 도망갔다는 것도 찝찝했고, 상대에게 자신의 신원이 일방적으로 특정되었다는 것도 찝찝했다.
레이가 미련을 쉽사리 못 버리고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순식간에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
레이의 시선이 향한 골목의 끝자락에서.
안소니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레이와 안소니우스가 동시에 말했다.
"아니군요."
"아니군."
긴장을 떨쳐낸 레이가 안소니우스에게 물었다.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독특한 힘의 파동을 느꼈다.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찾아왔다."
"저도 그렇습니다. 저도 그런 걸 느끼고 뒤쫓았는데... 놓쳤네요."
"...그렇군."
상대를 의심할만한 상황이었지만 안소니우스는 순순히 납득했다.
안소니우스도 상당한 실력자인지라 레이가 건물 위를 돌아다닐 때부터 기척을 파악하고 있었고, 독특한 힘의 파동은 분명 다른 개체로부터 흘러나왔었다.
제자리에 서 있던 안소니우스가 주변을 한 번 살피고는 레이에게 다가섰다.
"이전에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나누지."
"음... 굳이 더 나눌 이야기가 있을까요?"
레이가 방음 결계를 전개하며 마주 다가갔다.
"다 끝난 이야기 아닙니까."
"성녀님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나?"
"저는 계시를 감히 떠들지 않습니다. 신벌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그러겠습니까? 그리고..."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두 분이 혈육이라는 사실이 알려져도 대단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레이는 며칠 사이 이것저것 정보를 뒤져본 결과 그리 결론 내렸다.
물론 교단 내에 외부 사람들은 알지 못할 복잡한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안소니우스가 대놓고 그걸 떠들기는 어려울 터였다.
"..."
안소니우스가 차가운 시선으로 레이를 응시하다 화제를 돌렸다.
"황실과 같이 일하고 있나?"
"뭐... 그렇다고 봐야겠네요."
"어째서."
왜 교단과 협력하지 않느냐.
그런 뉘앙스의 물음에 레이가 바로 답했다.
"지금 제가 남부와 교단에 힘을 실어줘 봤자 갈등만 커질 겁니다. 성녀님도 기뻐하시진 않을 텐데요."
"함부로 성녀님을 입에 올리지 마라."
"아, 오해하지는 마시고요. 그러니까 제 말의 뜻은... 교단을 위하는 일과 성녀님을 위하는 일은 차이가 좀 있다는 겁니다. 교단을 위하는 일과 세상을 위하는 일에도 차이가 있겠지요."
"..."
"현시점에서 남부와 교단에 힘을 실어주면 제국 내부의 갈등만 커질 겁니다."
"..."
"제국 내부의 갈등이 커지면 악마 숭배자 놈들이 좋아서 날뛸 테고... 그리되면 혼란이 찾아와 성녀님의 부담만 가중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납득 가능한 이야기였다.
교단과 엘-람을 위한 인간의 희생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신실한 신자에게는 이런 주장이 먹히지 않겠지만.
안소니우스가 지닌 믿음의 중심에는 신이 아닌 누이가 있었기에 레이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었다.
레이는 그렇게 안소니우스와 공감대 따위를 형성하기 위해 열심히 입을 놀리다... 문득 멀리 떨어진 하늘을 바라봤다.
레이의 시선을 쫓은 안소니우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지?"
"어, 아뇨, 아닙니다. 아무튼... 엘-람께서 우리를 축복해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
바람이 흐르는 하늘 아래서.
허공에 떠 있는 여자의 육신이 투명한 알갱이로 변해 흩어져 나갔다.
은폐장 뒤에서, 이제는 상체 일부와 얼굴만 남은 여자가 빛나는 눈동자로 저 아래 있는 레이를 내려다보았다.
"새로운 종족도 아닌 인간 하나라..."
예상치 못했던 만남과 상황을 되돌아보며 여자가 조소했다.
"그때와는 다르다 이거군."
세상이 가장 어두웠던 시기.
그 당시는 모든 종족의 역량이 열약했지만, 인류는 특히 더욱 그랬다.
기사를 육성할 제대로 된 체계도 없었고 마법과 관계된 학문은 더욱 그랬다.
시스템이 받쳐주지 않았기에 초인 한두 명으로 운명을 뒤엎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였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물들이 스스로를 지킬 역량을 갖출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 동안 검게 물든 손길로부터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선 강력한 힘을 지닌 종족 단위의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초월적인 존재는 세상의 순리를 비틀었다.
그로 인해 탄생한 새로운 종족은 생명을 얻었을 때부터 강력한 권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 종말이 결정되어 있었다.
순수를 해치는 불순물은 쓸모가 다하면 사라지도록, 처음부터 그리 운명지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여자는 이제 홀로 남았다.
"이번에 선택한 희생양이 인간 하나라면, 그래, 싸게 먹혔군."
허나 과연 네놈의 뜻대로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인가.
여자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츠즉-
투명한 알갱이가 흐트러지며 이내 여자는 얼굴밖에 남지 않았다.
여자는 여전히 하늘 위에서 레이를 내려다보며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여자의 눈동자가 세로로 찢어짐과 동시에.
"동정해주마."
여자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초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