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자문관님, 잠시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넬슨이 그리 요청했지만 템플러는 움직이지 않았다.
템플러가 생도에게 급습당해 땅을 뒹굴었는데, 어찌 쉽게 상황을 용납하고 넘어갈 수 있겠는가.
템플러가 명예를 운운하며 도리어 넬슨에게 따지고 들려고 하자 레이가 다시 끼어들었다.
"적당히 안 넘어가면 어쩌겠다는 겁니까? 오해가 있었다고 해도 하이템플러께서 신성 결계를 전개해 생도를 위협했는데..."
레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성 결계의 유지 시간이 다 되어가며 눈이 녹아내리듯 신성 결계로부터 빛 알갱이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 사안도 문제 삼으면 얼마든지 문제 삼을 수 있습니다만, 이건 또 교단의 권위로 찍어누르고 덮어 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물고 늘어지면 피차 곤란한 건 마찬가지니 적당히 해라.
레이의 발언에 템플러가 발끈하자 넬슨이 제대로 후속조치를 하겠다며 재차 템플러를 달랬다.
템플러는 열불이 났지만,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안소니우스라는 레이의 주장이 원론적으로 옳았던데다 넬슨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결국 한발 물러섰다.
한편, 레이는 요하나의 훌쩍임이 멎어가자 한 마디 툭 던졌다.
"야, 다 울었냐?"
콱!
요하나가 신경질적으로 레이의 등을 후려쳤다.
물론 오버드라이브의 반동 탓에 손목이 비틀려 있었으므로, 레이의 등을 후려친 요하나는 도리어 자기가 비명을 꽥 질렀다.
"아으악!"
"야야, 가만히 있어, 가만히. 그만 좀 울고. 사춘기가 또 왔어? 왜 자꾸 쉽게 울어?"
레이가 낄낄거리며 그리 말하자 요하나가 뚱한 표정을 했다.
레이가 걱정되어 앞뒤 안 가리고 일을 저질러 결계를 뚫어냈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와 보니 레이는 세상 멀쩡하게 요하나를 맞아주었다.
요하나는 처음엔 안도했고, 지금 와선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괜히 자기 혼자 난리를 친 것 같아 뒤늦게 낯이 부끄러워졌다.
레이가 씩씩거리는 요하나의 등을 한 번 두들겨주곤 땅에 앉혔다.
"걱정해줘서 고맙고, 잠깐만 앉아있어. 무리해서 일어서지 말고."
요하나에게 그리 당부한 레이가 템플러를 결계 밖으로 내보낸 넬슨에게 다가갔다.
레이를 보고 넬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처가 늦은 건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하지만 301번 생도의 중징계는 불가피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주시하고 계시는 아이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 내가 말 안 해도 위에서 압박 들어오겠지만... 잘못도 하이템플러가 먼저 했잖아?"
넬슨이 말없이 레이를 바라봤다.
요하나의 징계 건은 넬슨이 깊게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레이의 말이 진실이라면 넬슨의 윗선에서 알아서 징계 위원회에 압박을 가할 것이다.
넬슨이 피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지스에 머물 겁니까? 이곳은 규율이 필요한 곳입니다. 너무 흩트려 놓는 것은 곤란합니다. 당신의 존재가 생도들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오래 안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레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는 요하나와 데런이 걱정되어서 이지스에 발을 들였다.
요하나와 데런이 이곳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그리고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손을 뻗을 수 있도록 생도 신분으로 입학했다.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기에... 뭐 그런 이유도 있었다.
헌데 지금 시점에서, 레이의 존재는 도리어 요하나를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게 레이는 참 좆 같아서 콧잔등을 매만졌다.
넬슨은 그런 레이를 보며 할 말을 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당신을 평범한 생도처럼 대하라 하셨습니다. 당신의 방종을 허락하라는 황명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이곳은 놀이터가 아닙니다. 이지스를 존중해주십시오."
"..."
"더는 이지스의 권위에 도전하지 마십시오. 계속 이리 행동하려면, 황명을 새롭게 받아오시오."
넬슨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자였다.
그는 이지스를 졸업한 뒤 제국 정보국과 연계한 작전에서 의미 있는 공적을 다수 세웠으며, 신체에 축적된 부하가 위험 수위에 이르자 은퇴한 후 이지스의 교관이 되었다.
넬슨의 인생은 이지스와 강하게 이어져 있었고, 때문에 자꾸만 이지스의 물을 흐리려 드는 레이를 계속 용납해줄 수는 없었다.
허나 레이는 코웃음을 쳤다.
"시건방진 소리를 하는군."
레이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넬슨은 레이가 던진 물건을 붙잡아 살펴보았다.
실물로는 처음 보았으나, 넬슨은 어렵지 않게 물건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제국 수호 훈장이었다.
가만히 눈가를 찌푸리고 서 있는 넬슨에게 레이가 짜증을 냈다.
"내가 애새끼들이랑 아웅다웅하는 게 즐거워서 이러고 있는 줄 아나?"
레이는 짜증이 잘 제어되지 않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나같이... 아니, 그런 것보다.
그냥 자신에게 닥친 상황 자체가 좆 같아서, 그게 그냥 화가 났다.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일 많은데 건방 좀 떨지 마. 권위? 내게 권위를 운운하나? 권위를 내세워 나를 무릎 꿇릴 수 있는 분은 이 땅 위에 오직 황제 폐하뿐이시니, 계속 까불고 싶으면 황명을 받아 와."
실로, 옳은 말이었다.
여전니 가만히 서 있는 넬슨에게 레이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뭐해, 다시 던져."
넬슨은 레이가 시키는 대로 정확히 따랐다.
넬슨이 훈장을 던지자 레이가 훈장을 붙잡아서 품에 넣었다.
넬슨은 레이를 향해 짧게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국 수호 훈장 위엔 레이의 공적이 아주 짧게 요약되어 있었다.
훈장에 글자를 새길 공간이 충분치 않아 어떤 전투에 참전했는가 정도만 적혀있었지만, 그것만 알아도 레이가 세운 공적의 거대함을 충분히 유추 가능했다.
넬슨의 앞에 서 있는 자는 황제 다음가는 불가침한 권위의 소유자였으며, 또한 제국의 수호자였다. 그는 무례할 자격이 있는 자였다.
넬슨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레이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레이는 여전히 짜증이 어린 기색으로 넬슨을 지나치려다,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시발 목욕탕 좀 쓰자. 좁은 욕탕에 애들 밀어 넣는 악습이 대체 어디 도움이 되는데?"
"예, 음..."
레이가 언급한 악습은 넬슨 때부터 이미 존재했던 오래된 악습이었다.
3급 생도들은 대형목욕탕 이용 불가. 확실히 그다지 쓸모 없는 악습이긴 했다.
워낙 오래되어서 당장 없앤다고 나서면 2급 생도들이 거품을 물겠지만... 뭐 어쩔 수 있겠는가.
"조치해놓도록 하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교관님. 그럼 저는 요하나를 병동에 데려다 주고 바로 귀환하겠습니다."
레이는 굳이 넬슨에게 입 함부로 놀리지 말라는 사족을 덧붙이지 않았다.
넬슨이 그런 사족을 덧붙여야 될 인물도 아니었고, 설령 쑥덕거리고 다닌다 해도 이젠 크게 상관있다 싶었다.
"요하나, 일어나봐."
레이가 요하나를 등에 업었다.
*
벌점, 몇 달간의 근신과 외출 금지, 강제적인 추가 단련 등.
요하나는 템플러를 무릎으로 찍어버린 사건으로 인해 징계를 대량으로 받았다.
허나 경징계만 우르르 섞어 받은 것이라 자문관을 공격한 것치고는 굉장히 가벼운 벌로 끝나게 되었다.
주말이 되어, 레이는 징계 탓에 외출이 금지된 요하나를 두고 밖으로 나갔다.
툴툴거리는 요하나에게 레이는 선물을 사오겠다고 약속했다.
정문을 나선 레이가 황도의 중심부로 향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 뒤를 데런, 쥬세핀, 그리고 아론이 따라갔다.
이지스에서 생활하며 어째 한 무리처럼 엮이게 된 그들이었다.
"아... 식사부터 할래?"
레이의 제의에 다들 동의했다.
황도에 존재하는 레스토랑을 찾은 네 명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주문했다.
얼마 안 가 음식이 나와 다들 식사를 시작했는데, 레이가 고기를 씹다 말고 주문을 하나 더 추가했다.
아론은 별 생각 없이 식사를 하다가 레이의 주문을 받은 점원이 술병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 사레가 들려 콜록였다.
"커읍... 야, 그거 술이야?"
"어, 술이지."
레이가 술병을 들어 보였다.
레이의 전생에서는 브랜디라 분류되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술이었는데, 레이가 술병을 열자 아론이 기겁하며 레이를 말렸다.
"야야, 우리 술 마시면 안 되잖아...!"
3급 생도들은 외부에서 음주가 아예 금지였다.
이건 악습이라 하기도 뭐한 것이 이지스 교칙에 외출 나갔을 때 음주 금지가 떡하니 적시되어 있었다.
2급 생도쯤 되면 음주에 관해 적당히 풀어주긴 했는데, 3급 생도는 외출 나가서 술 마시다 걸리면 얄짤 없었다.
허나 레이는 아론과 쥬세핀이 경악하거나 말거나 술잔을 들어 올렸다.
"니들은 마시면 안 되지. 나는 되고."
레이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허공에 얼음을 생성해 술잔에 떨어뜨렸다.
주변을 울리는 맑은 소리에 아론은 잠깐 얼이 빠졌다.
"야, 너, 그거 마법..."
"아티펙트 사용한 거야, 아티펙트."
졸졸졸,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른 레이가 단번에 술을 들이켰다.
아론이 쥬세핀에게 너도 얘 좀 말려보라고 눈짓했으나, 쥬세핀은 흘깃흘깃 레이를 훔쳐보다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지금 이 식사는 레이가 사는 거였다.
괜히 레이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 앞으로 식사를 얻어먹지 못하게 되면 품위유지비를 부모에게 보내야 하는 쥬세핀은 외출 나와서 쫄쫄 굶어야 했다.
결국 현실과 타협한 쥬세핀은 조용히 식사를 이어가기로 했다.
이러다보니 아론만 발을 동동 굴려대게 되었는데, 그때 가게 문이 열리며 푸른 견장을 찬 이지스 생도들이 들어왔다.
2급 생도 세바스와 하비는 3급 생도들을 발견하고는 일단 반갑게 다가갔다.
"어, 여기서 식사하고...?"
술 냄새가 났다.
코를 킁킁거리던 하비가 결국 탁자 위에 있는 술병을 발견했다.
"...술? 지금 술 처마시는 거야? 이 빨갱이 새끼들 정신 나갔...!!"
"아이 시발."
시원하게 욕설을 지껄인 레이가 세바스와 하비에게 손짓했다.
"야, 술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그냥 와서 앉아."
그 정신 나간 소리에 곧장 고함이 터져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레이는 작정하고 기세를 끌어올려 남들 입을 막았다.
흡사 공간을 찍어누르는 듯한 기세가 레이를 중심으로 내려앉았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레이가 의자를 발로 밀어주며 연거푸 손짓했다.
"자자, 선배님들도 와서 앉아요."
"..."
"..."
로얄가드를 상기시켰던 레이의 기세에 세바스와 하비가 무심코 의자에 앉았다.
레이는 둘 앞에 술잔을 놓아주고 술까지 직접 따라주며 주정을 부렸다.
"자... 선배님들은 영광인 줄 아세요. 내가 따라주는 술을 마셔본 사람이 몇 없어, 응? 그러니까 두 손으로 공손히 받으란 말이야."
"..."
"..."
세바스와 하비는 레이의 정신이 단단히 나갔거나, 혹은 단단히 취해 있다는 걸 명확히 깨달았다.
분위기가 싸해졌지만 레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술을 마시며 자기 할 말을 했다.
"내가, 응? 이지스에 응? 악습은 없나, 애들 차별은 안 하나, 생도들은 잘 가르치고 있나, 그런 걸 알아보려고 입학했는데 말이야... 하, 시발..."
레이가 내뱉는 욕설에는 근심과 짜증이 묻어났다.
레이는 자꾸만 자신의 콧잔등을 말아쥐었다.
레이는, 자신이 죽고 난 뒤를 대비하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왔지만 감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부러 눈을 돌리고 있었다.
직시한다 해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요하나가 보여준 모습을 보니... 그냥 가슴이 답답했다.
"어쩔 수 없지..."
미리부터 죽음이 가깝다는 걸 고백한다 해도 가까운 이들의 방황만 길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여전히 레이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여겼다.
"어쩔 수 없어..."
주정을 부리는 레이를 세바스가 떫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자 레이가 술잔을 탁자 위에 쾅 내려놓으며 눈을 번뜩였다.
"뭘 야려, 새끼야. 니들이 대낮부터 이런 곳에서 편하게 노가리나 깔 수 있는 게 전부 내 덕분인데. 이 씹새들은 감사한 줄 모르고..."
반박하자면, 아론과 쥬세핀은 이 자리가 전혀 편하지 않았다.
세바스와 하비는 레이가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마음으로 술을 홀짝였다.
한숨을 푹푹 쉬며 술병을 전부 비운 레이가 계산을 마치고 가게에서 나왔다.
"아... 2차는 어디로 가지?"
"야야, 술 좀 깨...!"
대낮부터 무슨 2차 타령이란 말인가. 아론이 정신 좀 차리라며 레이의 등을 두드렸다.
레이가 계속 이러면 아론도 레이를 두고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는 기껏 오른 취기를 빼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마나를 순환시키며 체내의 불순물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에휴..."
그리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레이가 내쉬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가 일변했다.
"...?"
레이가 고개를 들어 사방을 살폈다.
여전히 아론, 쥬세핀, 데런, 그리고 세바스와 하비가 가까이 있었고 길거리도 평화로웠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나 레이는 멀미를 느꼈다.
해독 권능이 멋대로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해독 권능은 레이의 감각에 닿는 모든 것을 분석하고 과도한 정보를 레이의 머릿속에 억지로 주입하고 있었다.
'뭐지?'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런 적이 없었다.
생물학적 애미애비가 앙앙거리다 뒈진 이후부터는, 레이는 해독 권능을 완벽하게 제어해왔었다.
'근데 갑자기 왜 이래?'
레이는 머리를 어지럽히는 해독 권능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며 현 사태의 원인을 고민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권능을... 무언가가 자극했어?'
좀 더 정확히는, '공명했다'고 표현해야 옳았다.
레이가 지닌 해독 권능.
그와 유사한 무언가를 소유한 존재가 레이에게 접근했고, 그 탓에 서로의 권능이 예기치 못하게 공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렇게 상황을 판단한 레이가 코어와 서클을 동시에 회전시키며 생도들을 보았다.
"야, 너희들. 함부로 떨어지지 말고 같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혹시 문제 생기면 이지스로 귀환하고."
일방적인 통보였다.
일방적인 통보였지만, 생도들은 섬뜩하게 빛나는 레이의 눈동자 탓에 함부로 반문하지 못했다.
레이는 자신의 권능을 자극한 무언가가 있었던 방향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배반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