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요하나는 레이의 품에 안겨 한참을 더 울었다.
레이는 요하나가 그만 울음을 그치고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들어주길 바랐으나 레이의 어깨 위엔 계속해서 요하나의 눈물이 떨어졌다.
레이는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
요하나가, 레이를 향해 얼마나 많은 애정을 품고 있으며 또한 심적으로 기대고 있는지...
레이는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해준다는 건 분명 행복한 일이었지만, 때때로는 사람을 괴롭게 만들었다.
요하나는 계속 훌쩍이며 레이에게 몸이 괜찮은 거 맞냐고 몇 번이나 다시 물었다.
레이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자신의 변명이 병신 같지 않았는지 되돌아봐야 했다.
그래, 병신 같은 변명이었다.
허나 요하나는 그 변명을 믿어야만 했다.
요하나에게 레이의 변명은 결코 거짓이 아니어야 했다.
제국의 황제와 프리슬란 가문의 당주가 레이를 지원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만약 레이가 지닌 신체적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레이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요하나는 레이의 변명을 믿었고, 또한 레이를 함부로 추궁하지 못했다.
"흡..."
긴 시간이 흘러 간신히 요하나의 울음이 잦아들었을 때.
레이는 오늘 일을 남들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요하나에게 부탁해야 했다.
이미 치료를 받는 중이었고, 남들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레이의 말에 요하나는 시뻘겋게 물든 눈으로 레이를 마주 봤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그래, 괜찮다니까."
레이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요하나가 레이의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가며 깊게 잠긴 목소리로 경고했다.
"앞으로... 무리하지 마."
"그래."
"한 번만 더 무리하면 가만 안 둘 거야. 다른 사람한테도 말할 거야."
"알겠어. 걱정하지 마."
레이는 검기를 발현하거나 잡기술을 사용하는 정도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며, 그러니 이지스에서의 생활은 걱정하지 말라고 재차 못 박았다.
요하나는 레이의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들으며 침묵한 채 레이의 손을 꽉 붙잡았다.
*
지하 광장에서 환영을 체험한 후 며칠이 지났다.
점심 시간이 되어 식당에 들른 레이는 굳은 얼굴로 식사를 깨작였다.
"..."
가만히 앉아있으면 한숨이 새어나왔다.
레이는 지금까지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미뤄왔다.
레이는 이별을 두려워했고, 또한 가까운 이들이 느낄 슬픔을 두려워했다.
남은 시간이 줄어들수록 그 두려움은 도리어 커져만 가서, 더욱 입을 열기가 힘들어졌다.
"..."
요하나가 보였던 눈물이 레이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억지로 외면하고 있던 문제가 이제 더는 눈을 돌릴 수 없을 만큼 비대해져서 레이를 괴롭게 했다.
가슴이 답답해진 레이가 물잔을 손에 쥐며 말했다.
"물."
"..."
아론이 레이의 물잔에 냉수를 쪼르륵 따랐다.
레이는 아론이 따라준 냉수를 단숨에 들이켰지만 가슴을 가득 채운 답답함은 쉽사리 가시지가 않았다.
물론 레이 옆에서 시다바리를 하고 있는 아론도 가슴이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덜컥!
대충 끼니를 때운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점식 식사 후엔 2급 생도들과 3급 생도들의 대련 일정이 잡혀 있었다.
무장의 제한이 없는 실전에 가까운 대련인지라 3급 생도들은 대부분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로얄가드가 지근거리에서 대련을 참관해 유혈 사태를 방비할 예정이었지만,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론은 레이를 따라 기숙사로 향하며 호흡을 골랐다.
2급 생도와 3급 생도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생도들 대다수는 엑스퍼트 급이란 테두리 안에 있는 존재였다.
다만 2급 생도들은 이지스에서 3년 넘게 개처럼 구르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검술의 완성도에서도 차이가 벌어졌지만, 수많은 경험을 통해 학습되는 순간적인 임기응변 능력 같은 건 2급 생도가 3급 생도를 압도했다.
얼핏 부차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이러한 요소가 얼마나 대단한 차이를 만들 수 있는지, 이번에 3급 생도들은 경험해볼 수 있을 터였다.
3급 생도들이 무장을 마치고 기숙사 앞에 집합하자 넬슨이 실내 대련장으로 3급 생도들을 이끌었다.
3급 생도들이 대련장에 도착했을 때 2급 생도들은 이미 대련장 안에서 대련을 준비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대련이 진행되기 전, 레이가 넬슨에게 말했다.
"교관님, 몸 회복이 덜 되어서, 열외를 요청드립니다."
"...치료사에게 휴식의 필요성을 전달받은 바, 특별히 허가하겠다."
이미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부분이었다.
레이가 대련에서 열외 되어 바깥으로 빠지자 지켜보던 2급 생도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 빨갱이 새끼가 벌써부터 빠져가지고 열외를 요청해?
2급 생도들이 그런 생각을 품고 레이를 노려보자 도리어 3급 생도들이 기겁하며 양쪽 눈치를 봤다.
선배님들, 저 새끼 건드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좆 돼요!
3급 생도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 2급 생도들은 도리어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저 빨갱이 새끼들이 지금 누구 눈치를 보는 건가 싶어 2급 생도들은 기가 찼다.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품 안의 브로치를 매만졌다.
신성력이 번져 나오는 브로치 덕분에 피로가 풀리며 마음이 좀 편하게 가라앉았다.
혼자 휴가를 즐기고 있는 레이를 향해 2급 생도들은 계속해서 경고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이내 그럴 정신도 없게 되었다.
*
요하나는 레이보다 항상 뒤처져 있었다.
첫만남 때부터 레이는 이미 어른스러웠고, 담대했으며, 또한 또래와 도저히 비교 불가할 만큼 뛰어났다.
요하나는 자신이 늙어 죽는 그 순간까지도 레이만큼은 정정한 몸뚱이를 가지고 낄낄거리며 손을 맞잡아줄 것이라 믿었다.
그건 요하나에게 있어 너무나 당연한 믿음이었다.
"..."
요하나가 대련장 위에서 검을 뽑았다.
검을 들고, 과거를 돌아보고 있자니 잊고 있었던 그날의 대화가 문뜩 떠올랐다.
'요하나.'
그게 언제였더라.
카렌한테는 예쁜 목걸이를 사주고, 나한테는 비싼 검을 선물로 사줘서... 내가 엄청나게 삐쳐서는 투정을 부렸던 때였나.
'요하나, 너는 더 열심히 해서, 더 빠르게 강해져야 해.'
레이는 그날 그렇게 말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날 빠르게 뛰어넘어야 해.'
빠르게 강해져야 한다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당부하며, 레이는 조금 무섭게 느껴지던 말을 덧붙였었다.
'난 너희의 곁을 평생 지켜줄 수 없으니까.'
가볍게 생각했던 말이었다.
부모 노릇 평생 해줄 수 없으니 열심히 하라는 잔소리쯤으로 알아들었었다.
허나 만약... 만약 그때부터 이미 레이가...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요하나는 검을 억세게 쥔 채 가빠지는 호흡을 억눌렀다.
"괜찮아..."
괜찮다.
설령 레이가 몸이 아파서 평생 검을 쥐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리 된다면, 내가 강해져서 당신을 지킬 것이다.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 또한 내가 대신 지켜주겠다.
당신이 날 돌아봐 주지 않는다 해도 괜찮았다.
그냥, 그냥 당신이 오랫동안 아프지 않고 건강히 지낼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었다.
당신을 대신할 만큼 강해져야 한다면 그리할 테니...
당신이 무사하길 바랐다.
"...레이."
요하나는 레이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본 적 없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고, 상상해보려 해도 구역질만 일었다.
눈가에 어린 물기를 닦아낸 요하나가, 검을 다시 붙잡고는 맞은 편에 선 2급 생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
2급 생도 베르덴.
베르덴의 생도 번호는 201번이었다.
수석으로 이지스에 입학한 베르덴은 현 시점에서 2급 생도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였다.
성격이 좀 과격한 게 흠이었으나, 용인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런 베르덴이 대련에서 요하나와 맞붙은 직후부터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힘, 속도, 기술, 그 모든 면에서 요하나가 베르덴을 압도했다.
자신의 전용검을 손에 쥔 요하나는 오버드라이브를 어레인지한 기술을 사용해 검격을 가속시켰다.
최근에 들어 '액셀'이라 짧게 이름 붙인 기술을 요하나가 사용하기 시작한 순간.
베르덴은 공세 한 번 취하지 못하고 검을 몸 가까이 붙여 버티기에 들어가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2급 생도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어마어마한 천재가 갑자기 튀어나와 상급 생도들을 압도하는 일은 이지스에서 그다지 드문 사건은 아니었다.
드넓은 제국에서 이름을 떨친 천재들이 죄다 모여드는 이지스 아니던가.
물론 요하나는 이제까지 이름을 날렸던 천재와는 또 급이 달랐다.
2급 생도들은 베르덴의 실력을 잘 알았기에 더더욱 요하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현 시점에서 요하나를 상대로 패배를 면할 수 있는 2급 생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졸업하면 로얄가드로 직행하겠네..."
2급 생도 한 명이 착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카드득!!
베르덴이 어떻게든 기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기습적으로 아티펙트를 사용했지만 소용없었다.
요하나는 베르덴의 아티펙트가 제대로 전개되기도 전에 코어를 꿰뚫어 파괴하고는 다시 무자비하게 베르덴을 몰아붙였다.
요하나는 정말 철저하게 베르덴을 뭉개버리고 있었다.
2급 생도들이 인상을 구기며 혀를 찼다.
거, 선배 자존심 좀 챙겨주지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살기가 가득한 요하나의 검을 보며 2급 생도들은 그런 생각을 안 가질 수가 없었다.
까가각!!
베르덴을 완전히 무너뜨린 요하나가 베르덴의 발악에 가까운 일격을 옆으로 긁어 흘러내더니 그대로 베르덴의 목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직후 로얄가드가 개입해 요하나의 검을 도중에 막아냈다.
카각!!
"그만."
"..."
요하나는 실핏줄이 터져 있는 눈으로 로얄가드를 노려봤다.
그 눈동자 안에 담겨 있는 거친 감정에 로얄가드조차 잠시 당황했다.
"..."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손아귀에서 힘을 뺀 요하나가 뒤늦게 물러서며 베르덴에게 인사했다.
베르덴은 시발시발 거리며 무기를 내팽개치더니 대련장 위에서 물러났다.
문제 있는 태도였지만 충분히 이해해줄만 했기에 교관들도 뭐라 하진 않았다.
우습게 본 3급 생도에게 일방적으로 깨졌으니 화를 안 내는 게 이상했다.
일이 그렇게 된 탓에 다른 3급 생도들만 더 고생하게 되었다.
2급 생도들이 무너진 자존심을 다시 세우겠다고 3급 생도들을 대련에서 거칠게 밀어붙였기에 3급 생도들은 이리저리 구르며 검을 받아내야 했다.
요하나의 경우를 제외하곤 2급 생도들이 수월하게 3급 생도들로부터 승리를 거뒀다.
시간이 지나면 결과가 또 뒤집히는 경우가 생기겠지만, 아직까지 3급 생도들은 2급 생도들에 비해 많이 모자랐다.
"후우..."
마찬가지로 2급 생도에게 깨지고 돌아온 아론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레이가 편히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말고 아론에게 불쑥 물었다.
"다음 수업이 뭐지?"
"..."
아론은 일정표는 외우고 다니라고 속으로 욕을 했지만 답변은 친절하게 해주었다.
"아티펙트 운용 실습 첫 수업이 있잖아."
"음... 응?"
아티펙트 운용 실습이라면 세리아가 교관으로 참여한다.
레이는 방금까지와 다른 의미로 심란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배반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