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40화 (240/446)

240화

지하 광장에서 소란이 일었던 후.

레이는 결국 들것에 실려서 앓는 소리를 내며 지하 광장을 떠났다.

낑낑거리며 엄살을 떠는 레이를 보며 광장에 남아 있던 다른 이들은 벌레 씹은 표정을 했다.

마스터에 한없이 근접한 인물이 여기서 대체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넬슨이 황명이 있었다는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교관들과 기사, 마법사들은 레이를 향한 검 끝을 결코 거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 배치된 인물들은 다들 입이 무거운 신임받는 실력자였지만 동요가 쉽사리 잦아들진 않았다.

자신들이 소문도 들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실력자가 제국에 더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겐 상당한 충격이었다.

한편 광장을 나와 바깥에서 대기하던 생도들 또한 저 멀리 실려가는 레이의 모습을 보며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본래라면 3급 생도들은 지금쯤 시뮬레이션 안에서 겪었던 전투를 복기해보고 있었을 것이다.

생도들은 시뮬레이션 안에서 마물들과 전투를 치르는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아군의 전력이 훨씬 우세했던데다 대인전조차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도들은 갑작스럽게 펼쳐진 전장 위에서 우왕좌왕하며 실수를 거듭했다.

전장의 난도 자체가 낮았기에 어찌저찌 마물 몇 마리도 직접 처치하고 승리도 쟁취했지만.

간접적이게나마 처음 겪어본 전장의 혼란과 열기에서 생도들은 느낄 게 많았다.

본래라면 그 순간의 판단과 감정들을 곱씹어보며 스스로를 되돌아보았을 텐데, 레이 덕분에 죄다 없던 일처럼 되어 버렸다.

"..."

생도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초월의 경지를 코앞에서 엿보았다.

그건 시뮬레이션 속에서 겪었던 전장보다도 훨씬 강렬한 경험이었다.

이제는 레이가 스페라의 혼약자니 뭐니 하는 소문조차 위장된 정보가 아닐까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대체 왜... 여기서 지랄이야?"

누군가의 뇌까림에 생도들 대다수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로드 급에 가까운 인간이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이지스에 와서 사건 사고를 우수수 치고 있단 말인가.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푹푹 이어지는 와중에 아론이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괴로워했다.

아론은 레이와 같은 방에서 단둘이 지내고 있었다. 눈치가 존나 보인다는 의미였다.

남들이 기숙사에서 노가리 좀 까며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아론만은 뭐 하는 놈인지도 모를 레이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숨 죽이고 지내야 했다.

다들 고통스러워하는 아론에게 측은한 눈길을 보냈다.

물론, 레이가 정말로 대단한 인물이라면 지금 이 시점이 인맥을 쌓아두기 아주 좋은 기회라는 걸 아론을 비롯한 생도들은 모르지 않았다.

허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아도 레이가 보여준 기세에 마음이 위압되어 있어 별로 기쁘지가 않았다.

그렇게 다들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스리고 있을 때.

교관이 다가와 기숙사에서 대기하란 명령을 전달하고 생도들을 해산시켰다.

생도들은 아직 어지럼증이 남아있는 와중에도 억지로 균형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데런도 일어나서 기숙사로 향하려는데 요하나가 슬금슬금 다른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는 모습을 발견했다.

데런이 슬쩍 요하나에게 접근해서 물었다.

"어디 가요, 누님?"

"어... 레이 말이야, 얼마나 다쳤나 한 번 보고 오게."

요하나가 계면쩍어하며 답했다.

데런은 레이를 너무나 신뢰했기에 레이가 앓아누운 것이 엄살이라 여기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근데 누님, 들키면 혼날 걸요?"

기숙사에서 대기하란 명령이 떨어진 직후 아닌가.

병문안이랍시고 함부로 움직였다가 들키면 교관에게 제대로 깨질 것이다.

"괜찮겠어요?"

"들키면 한 번 혼나고 말지, 뭐. 아니면 어지럼증이 심해서 찾아왔다고 둘러대도 되지 않을까?"

레이의 영향을 받은 요하나의 시원한 답변에 데런이 피식 웃었다.

*

들것에 실린 레이는 그대로 이지스 내부의 병동으로 이송됐다.

개인 회복실을 배정받은 레이가 일단 포션 한 병을 받아 쪽쪽 빨면서 침대에 누워 대기했다.

"아이고, 죽겠다."

레이가 포션병을 내려놓으며 엄살 아닌 엄살을 부렸다.

레이는, 환영 속에서 초월의 경지를 엿보았다.

초월의 경지를 엿보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하르시아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두 손으로 직접 초월을 그려냈다.

그 순간의 감각들은 마치 꿈을 꾸었을 때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레이가 환영 속에서 한 번 무너지고 바스러졌던 두 손아귀를 꽉 말아쥐었다.

소드마스터.

공간을 아우르는 것을 넘어, 스스로가 하나의 세계를 이룬 존재.

인간의 몸으로 초월을 이루었다는 수식이 그 어떤 과장이 아님을 레이는 환영을 겪고 나서 더욱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츠즈즉!

허공에 분산되어 있던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한다.

억지로 힘을 가해서 집약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아우르는 권능 아래 마나가 스스로 구조를 갖추고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허공에서 빚어진 빛의 칼날이, 레이를 마주보고 잠시 반짝이다 증발했다.

"큽...!"

레이는 속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억지로 삼킨 후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방금의 그 기예는, 현재 레이가 닿아 있는 경지로는 아직 도전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아이고오..."

무리해버린 레이가 끙끙 앓았다.

환영 속에서 소드마스터 흉내 좀 냈다고 현실에서 마스터로 각성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소드마스터란 지고의 경지에 오르기가 그리 간단했다면 제국은 진즉 소드마스터를 찍어냈을 것이다.

물론 레이는 환영 속에서 나름의 성취를 얻었다.

일평생을 노력해도 닿지 못했을 벽 너머를 엿보았고, 아주 잠시 발을 들였다.

이 경험이 시사하는 바는 컸다.

허나 레이는 앞으로 두 번 다시 같은 환영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다른 이들이 레이와 같은 환영을 경험했다면, 설령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오른 기사라 해도 반동을 못 이기고 반신불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하르시아의 진전을 잇고 있는 레이였기에 잠깐 앓아눕는 것으로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레이는 골골대며 환영 속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푸른 보석을 떠올렸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건 보석 형태를 한 술식 덩어리였다.

레이는 심장을 두르고 있는 서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서클 위로 여인이 건넸던 술식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는데, 레이는 술식을 확인하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이거 완전 계륵인데..."

술식의 형태와 목적이 워낙 단순하고 직관적이라서 레이 또한 충분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레이에게 있어 이 술식을 사용할 일 자체가 생기면 안 되었다.

레이는 아프텔에게 술식에 대해 다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포션을 한 병 더 입에 물었다.

그리 따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회복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레이가 들어와도 된다고 허락하자, 프리슬란 가문에 속해 있으며 스페라의 호위 기사 역을 맡고 있는 셰이가 회복실 문을 열고 들어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강녕...하셨습니까?"

회복실 안에서 입에 담기에는 좀 무안한 인사였다.

레이가 반가운 기색을 내보이며 셰이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네, 그럭저럭 잘 지냈습니다.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어요?"

"..."

셰이가 잠시 난색을 보였다.

레이가 또 사고를 쳤다는 소식을 에른스트가 듣고 결국 탁자 하나를 통째로 가루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셰이는 일단 상황을 돌려 말했다.

"프리슬란 후작님께서 지하 광장에서 사고가 있었다는 보고를 접하셨습니다."

"아니, 나 진짜 이번에 아무 잘못도 안 했거든요?"

레이가 억울함을 토로했다.

입학시험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저런 사건사고가 있었지만, 지하 광장에서 벌어졌던 사고 만큼은 레이에겐 정말로 아무 잘못이 없었다.

레이가 자기 잘못한 거 없다고 빽빽 우겨대자 셰이가 눈치를 보다 덧붙였다.

"말씀은 알겠습니다만... 적당히 즐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오...!"

레이는 억울함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허나 레이가 아무리 억울함을 토로한다고 해도, 제삼자 입장에서 레이가 지금까지 벌인 행적을 보면 지랄이 그런 개지랄이 없었다.

이지스는 '개인의 편의'를 허용해줄 수 있는 단체가 아니었다.

셰이가 남의 눈밖에 날 사건 사고를 더 이상 일으키지 않기를 레이에게 돌려서 당부하자 레이가 풀이 죽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그... 생활이 불편하시면 도중에 퇴교하셔도..."

그만 지랄하고 이지스에서 기어나오라는 에른스트의 전언을 셰이가 넌지시 전달하자 레이가 고개를 짧게 저었다.

이지스에서 수업이 나름 재미있고 도움이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지금 떠나면 앞으로 요하나와 데런의 얼굴을 몇 번이나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레이가 한 학기는 채워보겠다고 하자 셰이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회복실 문이 다시 한 번 벌컥 열렸다. 세리아였다.

"..."

세리아가 셰이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주먹을 들어 보였다.

셰이는 예전에 스페라와 요하나가 4위 결정전을 진행했을 때 세리아에게 대차게 얻어맞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프리슬란 후작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잠시 들렀습니다."

오해하지 말라며 자기 의도를 분명히 밝힌 셰이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세리아는 셰이 대신 레이의 옆자리를 차지하고서 레이의 뺨을 붙잡고 이리저리 눌러댔다.

"어으아어...!"

레이가 뺨이 이리저리 뭉개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세리아가 레이의 몸을 위아래로 살펴보며 물었다.

"다쳤어?"

"몸은 괜찮아요오... 환영 결계 비슷한 것 때문에 후유증이 좀 있어서어..."

"다치면 안 돼, 우리 조카."

"니옙..."

"있어? 괴롭히는 사람?"

"제가 괴롭히는 사람은 있어도 절 괴롭히는 사람은 없습니다악..."

셰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레이는 뺨이 찰흙 뭉개져 가며 세리아의 걱정을 해소시켜 주었다.

레이가 쪽팔림 탓에 한참 괴로워하는 사이.

드디어 치료사와 성직자가 도착해 회복실 문을 두드렸다.

레이는 셰이와 세리아에게 인사를 한 후 억지로 회복실 밖으로 내보냈다.

레이가 안정을 취해야 된다는 치료사의 말에 셰이와 세리아 또한 납득하고 회복실에서 물러났다.

레이는 두 사람이 복도 밖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치료사와 성직자를 돌아보았다.

치료사와 성직자 둘 다 황궁 안에서 한 번 만났던 적이 있는 자들이었다.

레이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 유출되어봤자 좋을 게 없었으므로 황제가 특별히 보내준 치료사와 성직자였다.

레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 위로 널브러졌다.

"이곳저곳 안 쑤시는 곳이 없는데... 한 번 살펴봐 주셨으면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치료사가 답했다.

*

요하나가 레이를 찾아 병동에 도착했다.

병동은 특별한 보안이 필요한 건물은 아니었기에 경비를 서는 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요하나는 몸이 아픈 환자를 연기하며 은근슬쩍 병동에 들어와 회복실들을 둘러보았다.

인기척이 없는 방을 빠르게 지나친 요하나는 어렵지 않게 레이가 머무는 회복실을 찾아냈다.

회복실 안쪽에서 익숙한 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확인한 요하나가 발걸음을 조용히 죽이고 회복실로 다가갔다.

문앞에 서서 귀를 기울이니 그제야 안쪽의 말소리가 제대로 들렸다.

만남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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