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레이는 지옥 위에 서서 검을 들었다.
레이는 먼 과거에 이 지옥 위를 걸었을 그의 그림자를 밟고.
본래 닿지 못했을 초월의 편린을 손에 쥐고서.
남은 삶을 전부 희생하고 얻어낸 이형의 힘으로...
어둠을 가르는 검을 빚어냈다.
레이가 검을 휘둘렀다.
풍경 위로 새겨지는 검의 궤적에 따라 대지가 쪼개지고 하늘이 밀려났다.
레이는 자신의 손으로 초월을 행하면서도 얼굴 위로 웃음을 덧씌우지 못했다.
레이는 하르시아가 아니었기에...
그의 껍데기를 잠깐 뒤집어썼다 해도 그가 맞이했던 결말에 닿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검의 궤적 하나하나가 기적이라 칭송될만한 상흔을 풍경 위로 새겼지만.
그럼에도 끝을 모를 어둠이 파도처럼 밀려와 공간을 잠식했다.
레이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고, 그러다 어느샌가 신체가 잘게잘게 부수어져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대지와 하늘을 가르는 거대한 힘이 결국 주인을 자멸로 이끈다.
하르시아는 이 힘을 마지막 순간까지 통제해냈지만, 레이는 그럴 수 없었다.
힘이 다하기도 전에 자기 힘에 잡아먹혀 가며, 레이는 그럼에도 검을 휘둘렀다.
먼 과거에 그는, 이 전장 위에 홀로 서 있었다.
먼 과거에 그는, 모두가 등을 돌렸을 때 홀로 그들을 위해 이 전장 위에 섰다.
분명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질시하고 배신하고 짓이기려 한 모든 존재들을 위해 검을 들었다.
하르시아, 당신도 결국 후회했을까?
홀로 검을 들고, 홀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며, 당신 또한 후회했을까?
레이는 영원히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되뇌며, 앞을 가리고 있던 거대한 어둠을 베었다.
거대한 어둠이 반으로 갈라짐과 동시에 검을 횡으로 휘둘렀던 레이의 팔이 산산이 조각나서 무너져 내렸다.
끊어져 나간 팔의 혈관에서 마나가 물처럼 흘러나와 땅을 적셨다.
혼자 남아버린 레이의 오른팔도 얼마 가지 못해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모로스가 지면 위로 나뒹굴고, 공간에 새겨지던 검의 궤적이 사라지자, 끈적한 어둠이 풍경을 뒤덮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계속 걸었다.
주변을 잠식한 마나가 레이의 의지에 감응해 빛의 칼날이 되어 어둠을 꿰뚫었다.
레이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나가려다 픽 쓰러졌다.
발목이 바스러졌다.
허리가 끊어지고, 온몸이 내부에서부터 차례차례 붕괴되어갔다.
아직 한참 더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하르시아가 닿았던 결말에 닿기 위해선, 아직 한참 더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레이는 실패했다.
그의 결말에 닿지 못한 채 전장 위에 스러졌다.
레이가 이제는 유일하게 움직이는 고개를 기울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끔찍한 악의가 하늘을 뒤덮고 레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레이는 마지막이 될 호흡을 천천히 내쉬며, 이미 무너져서 형체를 잃은 손아귀를 하늘을 향해 움켜쥐었다.
의지는 칼날이 되고, 칼날은 기적이 되어 어두운 하늘을 갈라냈다.
그게 레이의 최후였다.
"..."
흐린 눈을 한 번 깜박였을 때.
어느새 풍경이 다시 변해 있었다.
레이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이 공간에 발을 들였을 때처럼 하늘에선 검은 비가 주륵주륵 내리고 있었다.
레이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검게 물든 대지 위로 여인이 늘어뜨린 금발만이 홀로 아름답게 빛났다.
"너의 최후는 이보다 더욱 끔찍하고 외로울 것이다."
여인은 그리 악담했다.
"여전히 그 결심에 변함은 없느냐?"
"후회합니다. 후회하지만..."
레이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검은 비를 맞으며 레이는 담담하게 답했다.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간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자신이 없습니다."
아... 물론 그 씹어먹을 동생 녀석이 태어나는 것은 돌이키고 싶은 일이긴 했다.
허나 내가 주지 못한 진정한 미소를, 그 아이가 그녀에게 선물할 수 있었기에.
레이는 더는 그 아이를 원망치 못하고, 다만 작게 뇌까렸다.
"자신이... 없어요."
우는듯 웃는 얼굴로 한 번 낄낄 웃어본 레이가 이내 표정을 지웠다.
"남은 시간 동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단지, 단지 그뿐입니다."
후회를 곱씹기에는 이미 늦어버렸기에, 레이는 그리 결심했다.
여인이 조용히 레이를 바라보다 손을 휘저었다.
특- 트득-!
풍경이 갈라져 나간다.
환영이 쩍쩍 무너지며, 그 틈새로 푸른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여인은 무너지는 환영 속에서 여전히 가면을 덮어씌운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꼴도 보기 싫구나. 다신 찾아오지 말거라."
"...저도 이런 경험을 몇 번씩이나 반복하고 싶지는 않군요."
기묘한 부유감이 레이의 의식을 들뜨게 했다.
물감이 뒤섞이듯 이리저리 번져가는 시야 속에서.
레이는 허공에서 홀로 빚어진 푸른 보석이 자기 몸에 깃드는 광경을 보았다.
레이는 지금 그것이 무엇인지 묻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보다 시야가 암전되는 것이 빨랐다.
이내 환영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모든 허상이 사라진 공허 속에서 여인만이 홀로 다음 발을 내디뎠다.
"네가 누구보다 미련하고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길 바랄게."
여인은 레이가 있었던 자리를 밟고 지나가며 차갑게 웃었다.
"네 죽음으로 그녀가..."
내가 닿지 못한 곳에 닿을 수 있도록.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부디."
여인이 공허 속을 걸었다.
얼마 안 가 환영이 재구성되며 하늘 위에선 다시 검은 비가 쏟아져내렸다.
검은 핏물이 강이 되어 흐르고 끔찍한 악취가 진동하는 그날의 풍경 속에서.
여인은 옥좌에 홀로 앉아 처음처럼 팔을 괴었다.
하르시아, 비록 당신이 원치 않던 일그러진 형태라 해도.
나는 당신의 비원을 완성시킬 것이다.
나는, 마법사니까.
*
레이의 양옆에 매개체 없이 검강이 구현되고.
섬광을 내뿜는 두 자루의 검강은 서로 공명하며 공간을 일그러뜨린다.
"...!"
넬슨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넬슨의 이해를 벗어나 있었다.
넬슨만이 아니라, 이곳에 서 있는 모두의 이해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주변을 뒤덮은 냉기... 이것은 코어의 힘인가?
매개체 없이 발현된 검강... 저것이 검강이 맞기는 한가?
저 기이하고 강렬한 섬광을 내뿜는 빛 덩어리가 검강이 맞다면, 대체 어떤 경지에 닿아 있어야 저런 권능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하지?
이곳에 있는 교관, 기사, 마법사들은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들을 직접 겪어보았기에, 더더욱 눈앞의 광경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계의 중심에 서 있는 저 존재는...
로드 급,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근접해 있었다.
정말 보수적으로 가정해도 그 정도였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 자리에 서 있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허나 가만히 지켜볼 수 만은 없었다.
넬슨은 해야 할 일은 해야 했고, 지금 당장 우선해야 할 것은 생도들을 대피시키는 일이었다.
"모두 일어나라!"
넬슨은 시뮬레이션 장치의 후유증 탓에 균형을 잡지 못하는 생도들을 잡아 일으켰다.
대다수의 생도들은 경이와 공포에 가득 질린 눈으로 레이를 바라보다 넬슨이 재차 고함치자 한발 늦게 몸을 일으켰다.
그 찰나 굉음이 울렸다.
쿠웅-!
시뮬레이션 장치에 공급된 마나가 일부 역류하며 촉매와 마법진을 더욱 과열시켰다.
넬슨을 비롯한 교관들이 소지하고 있던 아티펙트를 전부 전개한 채 생도들을 가운데에 두고 진형을 갖췄다.
마법사들은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고 황급히 결계에서 물러섰다.
넬슨이 생도들의 뒷목을 잡고 입구 쪽으로 밀었다.
돌아가는 꼴만 보면 언제 폭발 같은 게 발생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허나, 넬슨이 본격적으로 생도들을 이끌고 탈출하려는 순간 과열되었던 마법진이 차례차례 침묵해나가기 시작했다.
"...?"
치이익-
주위의 기계장치 몇 군데에서 연기가 새어나오더니 발광하던 마법진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동시에 레이로부터 뿜어져 나오던 압도적인 기세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허공에서 섬광을 발하던 두 자루의 검강도 빛 알갱이로 분해돼서 조각조각 흩어졌다.
얼마 안 가, 폭풍이 몰아쳤던 지하 광장에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가 깃들었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안심하지 못했다.
모두가 바싹 긴장을 끌어올린 채 침묵하던 찰나.
환영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 레이가 왈칵 구역질을 했다.
"크헉...!"
구역질을 한 레이가 연거푸 피를 한 움큼 쏟아냈다.
환영 속에서 하르시아의 껍데기를 덮어썼던지라 정신과 육체의 괴리가 만들어내는 반동이 너무 강했다.
더군다나, 레이는 아직 인지하지 못했지만 시뮬레이션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코어가 활성화된 탓에 신체도 상당한 충격을 입었다.
레이는 속을 게워낸 후 끙끙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레이는 당연히, 시뮬레이션을 마친 자신을 교관들이 친절하게 환영해줄 것이라 믿었다.
허나 레이를 맞이해준 건 기사들의 검 끝이었다.
"?"
검을 겨누고 있는 기사들을 보며 레이는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레이는 단지 교관들이 시키는 대로 시뮬레이션 장치에 정신이 잠식되었다가 깨어났을 뿐이었다.
헌데 깨어나고 보니 기사들이 기세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검을 겨누고 있으니 도저히 상황 파악이 안 됐다.
눈을 깜박이던 레이가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뭣들 하십니까?"
무슨 명령을 어긴 것도 아니고,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대체 왜 지랄이란 말인가.
레이의 억울함은 타당했다.
허나 기사들도 쉽사리 검을 치울 수가 없었다.
결계 속에서 레이가 드러냈던 그 압도적인 존재감이 기사들의 경각심을 극한까지 자극해 날을 세울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라도 미리 검을 겨누고 있지 않으면, 기사들은 레이에게 항거할 수단이 없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넬슨이 결국 자처해서 앞으로 나섰다.
"레이."
"아, 예, 교관님. 갑자기 왜들 이러십니까?"
"너... 무엇을 한 거냐?"
"하긴 뭘 합니까?"
"...환영 속에서, 대체 무엇을 본 거냐? 무엇을 했지?"
"...?"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레이가 원래 자신이 겪었어야 할 환영을 입에 담았다.
"와일드 호그 무리랑 전투를 벌였습니다만...?"
"..."
"..."
"..."
사방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레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이를 바라보는 생도들의 눈에는 공포와 경이가 가득했다.
생도들 사이에서, 요하나와 함께 유이하게 맨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데런이 레이를 향해 이리저리 손짓했다.
수신호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너 좆 됐다란 뜻인 건 알아먹을 수 있었다.
레이는 그제야 환영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무언가 어긋났음을 깨닫고 어색하게 답변을 수정했다.
"어... 존나 큰 와일드 호그랑 싸웠습니다...?"
"..."
넬슨이 자기 이마를 짚었다.
넬슨은 일단 기사들에게 무기를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다.
기사들은 거북해하면서도 기세를 갈무리하며 뒤로 물러섰다.
넬슨은 다른 교관들에게 생도들을 밖으로 내보내라고 지시한 뒤 두통을 느끼며 표정을 찡그렸다.
어째서 지하 광장의 시뮬레이션 장치에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는 앞으로 조사해봐야 할 것이다.
넬슨은 상부에 보고부터 올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레이에게 물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여쭙니다만... 대체 어디 소속된 분이십니까?"
"지금은 이지스에 속해 있죠?"
"..."
넬슨은 눈앞의 작자가 대체 뭐하는 놈인지 이제는 감도 안 잡혔다.
황명 탓에 더 따지고 들지도 못하는 넬슨을 향해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지금 더럽게 아픈데 포션이라도 한 병 주실래요?"
"...치료사를 부르겠습니다."
넬슨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