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38화 (238/446)

238화

"얼마 남지 않았구나."

"..."

레이는 동요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여인은 그런 레이를 바라보다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이곳은 하르시아의 후계자에게만 허락되는 공간이었고, 레이는 분명 그의 진전을 상당 부분 계승했다.

허나 레이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는 근원과 근간은 여인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저건 결코 자연 발생한 개체가 아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개체 또한 아니었다.

저건, 굳이 설명하자면 '사도'와 유사한 개념의 존재였다.

여인의 눈동자가 잔잔하게 빛났다.

"그것이... 감히."

옅은 빛 무리가 검게 물든 대지를 타고 흘렀다.

여인은 참으로 담담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하르시아의 유산을 네게 쥐여주었구나."

쿠웅!!

레이의 시야를 메우고 있던 풍경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통째로 물결치는 공간 속에서 레이는 곤란함을 느꼈다.

처음부터 결계에 저항했으면 모르되, 이미 정신이 통째로 결계에 잠식된 이상 레이는 결계 속 존재인 여인에게 저항할 수단이 없었다.

레이가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한 채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이내 시야를 메우고 있던 풍경이 본래의 형태를 되찾았다.

레이가 시선을 다시 앞으로 향했을 때 여인은 여전히 담담하게 옥좌 위에 앉아 있었다.

"그것이 어지간히 급했나 보구나."

아주 중대한 위협에 직면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특수한 기적을 내린 개체에게 하르시아의 유산까지 쥐여주었을 터였다.

허나, 그런 점을 감안해도.

"너는 기이하다. 아주 기이한 존재야."

여인은 레이라는 존재가 태어나기까지 초월적인 존재들도 예상 못 한 어떤 변수가 작용했으리라 확신했다.

그런 가정이 아니라면, 저토록 자율적인 판단이 가능한 사도와 유사한 무언가가 존재하는 건 불가능했다.

"네게는..."

여인은 자신이 세상에 남겨 놓은 유산들로부터 전해 받은 정보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았다.

레이가 걸어간 행적을 되돌아보며 여인이 단언했다.

"네게는 목줄이 없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레이는 여인의 말에 담긴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으리란 이야기엔 공감했다.

레이에겐 충분히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

제대로 된 정보 하나 없이 홀로 이 세상에 떨어진 레이에게는, 수백 수천 수만 개의 선택지가 난해하게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결국 레이는 자신의 삶을 모조리 깎아내는 것을 감수하고 지금 이 자리에 섰다.

그렇기에 여인은,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레이에게 다른 누군가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얼마... 남지 않았구나, 너도."

"..."

레이는 여인의 무표정한 얼굴로부터 아주 미약한 감정을 읽었지만, 그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고민하던 레이가 이번엔 여인의 말에 답해보았다.

"예,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고 있구나."

"죽음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그럴 리가."

여인은 아주 차디찬 음색으로 레이를 조소했다.

"네 눈동자엔 후회가 그토록 가득한데."

"..."

레이는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 않았다.

레이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여인은 도리어 레이의 거북함을 기꺼워했고, 또한 파내서 헤집었다.

"대답해 보아라. 죽음이 두렵느냐?"

"..."

"죽음이 두려워, 운명을 비관하면서도 기적을 꿈꾸었느냐?"

"..."

"기적을 꿈꾸며 작디 작은 희망을 품고, 다가오지 않을 미래를 남몰래 그려 보다, 꿈에서 깨어나 홀로 후회를 곱씹었느냐?"

"..."

레이의 미간이 거칠게 구겨졌다.

누구에게도 호소하지 못하고... 마음 속 깊이 묻어놓았던 날것의 바람과 감정들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것은 결코 유쾌할 수 없었다.

그래, 레이는 기적을 꿈꾸었고 또한 희망했다.

세상 냉정한 척을 하면서도 때때로는 잠자리를 뒤척이며 기적처럼 찾아온 따뜻한 미래를 그려보고는 했다.

여인은 그 비참하고도 은밀한 레이의 바람을 까발리며, 또한 부정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갈망이다."

여인은 단언했다. 단언할 수 있었다.

"너는 이 세상의 얼룩이다. 순수를 해치는 불순물이다."

"..."

"사안이 위급해 마지못해 사용했지만, 종국엔 제거해야만 하는 병균과 같은 존재다. 그것에게 너는 그런 존재다."

"..."

"네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종국에 너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쓰임새가 다하면 무너지도록, 처음부터 그리 설계되어 있었을 것이다. 정녕 그것을 깨닫지 못했느냐?"

"..."

"희망을 버려라. 그것은 네게 결코 기적을 내려주지 않을 테니. 너는 결국 좌절하고 절규할 것이다."

"...그래서."

레이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인의 그 끔찍한 힐난에도 불구하고, 레이의 목소리엔 분노도 격정도 적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

레이도 이미 한참 전에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역할을 다하고 폐기되게 만든 인형에 가깝다는 걸, 그런 인형에게 기적 따위 할당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레이는 개의치 않으려 했다.

어린 날의 맹세를 지킬 수 있다면, 내 사람들의 미래를 지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

여인은 한동안 조용히 레이를 바라보다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검은 물이 가득 고여있는 대지 위를 찰박이며.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레이에게 한발 한발 다가섰다.

"너와 같은 운명을 타고난 존재는 과거에도 무수했다."

"..."

"그들이 맞이한 끔찍한 최후를 너 또한 답습..."

"과거의 일은 궁금하지 않습니다."

레이가 억지로 여인의 말을 끊었다.

"전 제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갈 것이고,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 외의 문제는 부차적일 뿐입니다."

"..."

여인의 눈동자가 잔잔하게 일렁였다.

레이는 뒤늦게 여인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여인의 정체가 리실로테가 만들어낸 인공지능인지 아니면 그녀가 남긴 사념 같은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 '환영' 속에서 그녀의 우위는 절대적이었다.

굳이 비위를 거스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레이는 여인이 입에 담는 진실에 가까운 무언가를 알고 싶지 않았다.

이제와서 그런 걸 들어봤자... 가치 없는 번민이 잠자리를 뒤척이게 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레이는 여인의 말을 잘랐고, 목에 힘을 주고 강한 척을 했다.

여인이 조소했다.

"미련하구나."

"..."

"불쾌할 만큼 미련해서, 그를 떠올리게 만들어."

여인이 등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내리던 검은 비가 뚝 정지했다.

등을 돌린 여인이 자신의 옥좌로 걸어가기 시작하자, 허공에서 멈추었던 빗물이 하늘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환영이기에 가능한 경이로운 풍경 속에서.

여인은 슬픔이 가득한 목소리로 레이에게 통보했다.

"그리 자신한다면... 네가 맞이할 최후를 한 번 직접 겪어 보아라."

시간이 되돌아간다.

검은 비가 역류하고, 갈라졌던 대지와 하늘이 봉합된다.

땅을 흐르는 검은 피가 끔찍한 존재들의 사체 속으로 스며들어 그들을 다시 일으킨다.

레이는 지옥 속에 서서 양손을 들어보았다.

양손엔 어느샌가 검이 한 자루씩 쥐어져 있었다.

오른손에 쥐어진 검의 형상이 익숙했다. 모로스였다.

레이는 멍하니 모로스를 바라보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뻥 뚫린 가슴으로부터 핏물이 흘러넘친다.

핏물이 흘러넘쳐 땅을 적시고, 항거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가 가슴의 빈자리를 메웠다.

레이는 끔찍한 후회와 절망이 뒤섞인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하르시아.

그가 섰던 최후의 전장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레이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검을 들어 올리고 검게 물든 대지를 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남은 삶을 전부 쏟아부어도... 나는 당신의 절반도 따라잡지 못하겠지."

레이는 이 환영 속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보았던 상흔들을 떠올렸다.

대지에, 하늘에, 사체에 새겨져 있던 그 무수한 상흔들을 떠올려서 곱씹었다.

거기에 닿지 못하리란 것을 레이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검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레이의 결심이었으며...

또한 레이가 그에게 늦게나마 건넬 수 있는 나름의 추모였다.

*

이지스의 지하 광장에 있는 시뮬레이션 장치는 최소한의 안전성이 보장되어 있었다.

지난 수백 년간 수천 명이 넘는 자들이 환영 속에서 여러 전장을 경험했고, 비록 후유증을 앓는 경우는 있을지라도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우수한 마법사들이 리실로테 사후에도 연구와 실험을 반복해 시뮬레이션 장치를 보강해왔기에 후유증의 빈도와 위중함도 확연히 감소하는 추세였다.

이제는 후유증이 정말 심각해 봐야 하루 이틀 어지럼증을 느끼고 마는 정도였다.

그렇기에 지하 광장에서 대기하던 마법사들은 긴장을 놓은 채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허나, 레이가 시뮬레이션을 시작한 후 5분쯤 지났을 때.

그토록 안전을 자신하던 시뮬레이션 장치에 갑작스레 문제가 발생했다.

삑! 삑!

"무슨 일이야!!"

"과부하? 갑자기 왜 이래?"

"결계에 공급하는 출력 줄이고 셧다운 준비해!!"

마법사들은 저들끼리 소리를 지르면서도 아직까지 상황을 낙관했다.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긴 했지만, 시뮬레이션 장치의 마법 결계에 공급되는 동력을 순차적으로 끊어버리면 안전하게 시뮬레이션을 종료시킬 수 있었다.

물론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마법사들은 생각했다.

허나 마법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뮬레이션 장치는 본래 설정된 값 이상의 마나를 소모하며 급격히 과열되어 갔다.

상황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자 결국 마법사들은 셧다운 조치를 취하려 했다.

허나, 시뮬레이션 장치는 마법사들의 통제를 전혀 듣지 않았다.

주요 동력원을 물리적으로 끊어버려도 시뮬레이션 장치는 보조 동력원의 마나를 끌어와 지속해서 레이의 정신에 간섭하는 결계를 강화해갔다.

마법사들이 당혹 속에서 다급히 몸을 움직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생도들은 겁을 먹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교관들이 일단 생도들을 밖으로 내보내려는 찰나.

결계의 중심에서 또다른 변화가 일었다.

트드득!

잠자듯 고요하게 앉아만 있어야 했던 레이의 기세가 일변했다.

뭐라 형용키 힘든 이질적인 냉기를 느낀 교관들이 반사적으로 무기를 뽑아들었다.

레이는 여전히 눈을 감고 결계의 중앙에 앉아있었지만, 레이를 감싸고 있던 마나의 기류가 크게 출렁였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존재치 않았던 돌발 사태에 마법사도 기사들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바로 판단 못 하고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 찰나.

레이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더니, 레이의 주위에 있던 마나가 모여들어 형상을 이루어가기 시작했다.

으드득-!

"...이런 미친."

넬슨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허공에서 응집된 마나가 서로 얽히고 반발하며 섬광을 발한다.

이윽고, 레이의 양옆에 매개체 없이 구현된 두 자루의 검강이 떠올랐다.

검강이 공명하며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광경을 앞에 두고 넬슨이 이를 악물었다.

만남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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