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제국 최고의 엘리트 교육 기관 이지스.
이지스 생도 대다수는 기사학부에 속해있었다.
다른 계열의 생도 또한 존재하긴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교단이나 마탑에서 위탁 교육을 받고는 했다.
기사학부 생도들은 이지스 입학 초기엔 가벼운 체력 단련 위주의 훈련을 받았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안전이 보장되기 힘든 위험한 교육을 다수 이수해야 했다.
그렇기에 실수를 줄여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군기는 당연히 필요했다.
그런 측면에서 3급 생도들이 첫 외출로 마음이 들떴을 때 한 번 다잡아주는 것은 결코 과한 조치가 아니었다.
물론 겉치장 좀 했다는 걸 명분 삼아 기합을 주는 건 꼴이 우스웠지만, 어쨌든 교관들도 2급 생도들이 3급 생도들의 기합을 잡는 것은 적당히 용인해주었다.
교관들이 3급 생도들의 생활에 일일이 간섭하는 것도 모양이 우스웠으니 말이다.
"대가리 박아."
정문에서 대기하던 2급 생도들은 첫 외출을 끝내고 복귀하는 3급 생도들의 복장이 조금이라도 불량하면 곧장 대가리를 박으라고 시켰다.
3급 생도들은 앓는 소리를 내며 땅에 머리를 박았고, 그 숫자는 계속 늘어났다.
그러던 중 요하나가 이지스로 귀환했다.
이번 기수 수석인 요하나는 신분을 떠나 동기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했다.
허나 요하나에게서 짙은 향수 냄새가 나자 2급 생도들이 곧장 인상을 찌푸렸다.
"향수를 뿌려?! 제정신이야, 지금?"
2급 생도들은 이제부터 요하나에게 머리를 박게 시킨 후 향수 따위의 물품을 압수할 예정이었다.
허나, 미처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레이가 정문에 나타났다.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레이는 발광하는 브로치를 가슴에 달고 아주 주위의 시선을 죄다 끌어모으고 있었다.
홀린듯 집중된 이목 속에서, 2급 생도 중 한 명이 샤우팅을 내질렀다.
"야 이 새끼야!!!!!"
*
레이가 이지스로 귀환하는 딱 그 시점에 하늘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주변이 어두워지니 레이가 가슴에 찬 브로치가 아주 번쩍번쩍하게 빛났다.
가뜩이나 크기가 큰 브로치가 제멋대로 발광하니 그 모습이 성스럽기보단 우스꽝스러웠다.
레이가 브로치를 안주머니에 넣을까 고민하며 정문을 통과하는 순간, 욕설이 쏟아졌다.
"야 이 새끼야!!!!!"
2급 생도가 성큼성큼 다가오며 연거푸 외쳤다.
"이 빨갱이 새끼가 벌써부터 미쳐가지고, 너 가슴에 그거 뭐야?!"
"오..."
데런이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레이가 어떻게 대처할지 아주 흥미진진했다.
주변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2급 생도가 이를 갈았다.
가만보니 레이의 팔목에는 팔찌도 하나 채워져 있었다.
제대로 열이 뻗친 2급 생도가 미간을 와락 구기며 일단 브로치에 대해 먼저 따졌다.
"가슴에 그 개새끼 좆 같이 생긴 브로치는 뭐야? 어디서 났어?"
레이가 눈치를 보다 빠르게 답했다.
"아... 이 브로치는 제가 이지스에 오기 전, 어머니께서 제가 다치지 않기를 기원하며 제게 선물해주신 브로치입니다."
"..."
2급 생도가 당황해서 입을 어물거리다 레이가 지닌 브로치를 다시 살폈다.
레이의 브로치는 크기가 커서 좀 촌스러운 느낌이 강했는데, 나이가 있는 어르신들이 딱 좋아할 만한 느낌의 물건이었다.
물론 레이의 브로치는 카렌이 선물해준 물건이었고, 카렌은 축성 작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커다란 브로치를 구한 것이었지만, 2급 생도들이 거기까지 알 수는 없었다.
레이가 대놓고 가불기를 시전하자 잠깐 침묵이 일었다.
급격히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던 2급 생도들이 괜히 헛기침을 했다.
데런과 요하나는 거침없이 엄마를 팔아먹는 레이를 보며 안 좋은 의미로 감탄했다.
데런과 요하나가 혀를 내두르는 사이, 입을 다물었던 2급 생도가 뒤늦게 목소리를 높이며 분위기를 다시 잡으려 했다.
"그... 그래도 말이야...! 정복 외에 장신구 착용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죄송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레이가 깍듯한 태도로 사과하자 2급 생도는 이쯤에서 끝낼까 잠깐 고민했다.
허나 그때 다른 2급 생도가 욕설을 내뱉었다.
"시발, 야 좀 비켜봐."
행동과 성격이 과격하고 불 같다고 평가받는 2급 생도, 베르덴이 동기를 옆으로 밀어내며 앞으로 나섰다.
베르덴은 묘하게 깝죽대는 것 같은 레이에게 강한 짜증을 느꼈다.
레이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뒷배가 좋다는 건 베르덴도 알고 있다.
허나 이지스 내부에선 출신이나 뒷배 따위를 내세우는 게 용납되지 않는다.
그건 이지스의 근간을 뒤흔드는 짓이었다. 이지스가 귀족과 젠트리, 거기에 평민까지 섞여서 지내게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던가.
레이가 자기 재능과 뒷배를 믿고 안하무인처럼 행동하고 싶었다면 이지스에 들어와서는 안 되었다.
베르덴은 레이의 브로치를 뜯어서 짓밟을 기세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상황이 이리되니 레이도 선택을 내려야 했다.
"음..."
여기서 바로 도망치거나, 아님 대놓고 하극상을 벌이거나.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레이는 카렌이 준 브로치를 남이 건드리게 할 생각도 없었고 더군다나 브로치 아래 달린 게 수호 훈장이었다.
일단 도망치고 나중에 뒷수습을 할까, 레이가 그리 결심하려는 찰나 또 다른 2급 생도 한 명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야, 니들은 왜 또 시답잖은 걸로 빨갱이들 괴롭히고 있어?"
"테온?"
고개를 돌린 베르덴이 동기인 테온을 발견하고 인상을 더더욱 일그러뜨렸다.
"넌 왜 갑자기 참견질이야?"
"참견하면 안 되냐?"
"아니 시발 내가 빨갱이들 좀 교육하겠다는데 뭐가 불만인데?"
"하..."
테온이 실소를 흘리더니 대놓고 빈정댔다.
"지는 뭐 얼마나 번듯하게 규칙 지키고 살았다고 애들 앞에서 잘난 척인지 모르겠네. 응?"
주변에 있던 3급 생도들이 저들끼리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다.
테온은 지금 3급 생도 편을 드는 게 아니라, 그냥 베르덴에게 시비를 걸고 꼽을 주기 위해서 3급 생도들을 두둔하는 척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급격히 험악해졌다.
레이는 이 틈을 타 진짜 그냥 도망가버릴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레이의 겨드랑이 아래를 탁 붙잡았다.
"...!!"
익숙한 손길을 느낀 레이가 경악해서 몸부림을 쳤으나 세리아는 무시하고 레이를 들어 올렸다.
"조카, 고모 기다리고 있었어?"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요...!"
"조카 귀여워."
세리아는 방금까지 시무룩해 있었다.
레이가 고모랑 나란히 걸어서 이지스로 귀환하기 부끄럽다고 혼자 먼저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 탓에 세리아는 시무룩해져서 이지스로 돌아왔는데, 레이가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리아는 사춘기가 온 조카가 부끄럼을 타면서도 고모를 기다려줬다고 매우 기뻐하며 곧장 레이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레이가 공중에서 발버둥쳤지만 곧 제압당했다.
세리아는 레이를 트로피처럼 들어 올린 채 금세 생도들을 지나쳐 시야에서 사라졌다.
"..."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베르덴은 뒷골이 당기는 걸 느꼈다.
3급 생도들 앞에서 체면이 상한 베르덴이 테온과 제대로 한 판 하려고 주먹을 말아쥐는데 넬슨이 개입했다.
"모두 그만해라."
"..."
"..."
2급 생도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넬슨은 생도들은 둘러보더니 굳은 얼굴로 말했다.
"3급 생도들은 내가 마저 교육하겠다. 2급 생도들 모두 수고했다. 그만 들어가라."
넬슨이 이리 말하는데 항거할 수는 없었다.
2급 생도들은 성격을 죽이며 넬슨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끼리끼리 멀어졌다.
테온은 홀로 다른 방향으로 정문을 떠났는데, 테온의 눈빛에 담긴 거친 격정을 읽어낸 넬슨이 속으로 혀를 찼다.
남부 지역 출신들에 관한 문제가 이지스 내부에서도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번에 졸업 예정인 이지스의 1급 생도들 중 남부 출신들이 요직에서 배제되었니 뭐니 하는 문제로 좀 시끄러운 탓에 2급 생도들도 영향을 받는 듯 했다.
넬슨이 당장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넬슨은 한숨을 삼킨 뒤 머리를 박고 있는 3급 생도들을 적당히 훈계하고 풀어주었다.
데런은 내심 수호 훈장을 보지 못해 아쉬워했다.
*
첫 번째 외출 후 레이는 브로치를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럭저럭 성실한 학생을 연기하며 이지스에서 생활해본 결과, 레이는 이지스에서의 배움이 생각보다 훨씬 도움이 된다는 걸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레이는 이 세상의 군사 교리 같은 것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다.
아무래도 레이는 지금까지 전투를 벌일 때 임기응변에 의지해 주먹구구식으로 싸워온 감이 컸다.
그런 측면에서 이지스의 교육은 레이에게 유익한 편이었다.
뭐, 잠깐 배운다고 엄청난 발전을 이룰 수 있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레이는 담담하게 익힐 것은 익혀놓으며 요하나와 데런을 지켜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3급 생도들은 점점 더 다양하고 위험한 훈련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3급 생도들은 입학 후 처음으로 이지스 내부에 있는 지하 광장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제부터 너희는 전장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넬슨이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3급 생도들에게 지하 광장에서 무엇을 체험하게 될지 설명했다.
지하 광장엔 일종의 전투 시뮬레이션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정신에 간섭하는 마법 결계를 응용해서 만들어낸 장치다. 이후 다시 설명하겠지만, 결계에 절대 저항하면 안 된다. 어설프게 저항했다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해당 시설의 최초 설계자는 리실로테.
600년 전 영웅의 이름이 나오자 생도들이 다시 들떴다.
넬슨은 생도들의 열기를 가라앉힌 후 계속 성명을 이어갔다.
"앞으로 너희들은 한 달에 한 번 장치에 기록된 과거의 전장을 체험하게 될 거다. 정신적 피로가 상당함으로 후유증을 느낀다면 반드시 나에게 보고해라."
사용자가 느끼는 정신적 피로 외에도 시뮬레이션 장치엔 여러 단점이 있었다.
그중 가장 아쉬운 단점은, 시뮬레이션 장치가 정교한 마법 결계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새로운 전장을 설계해서 추가하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시뮬레이션 장치로 체험할 수 있는 전장은 수백 년 전 전장들이 대다수였다.
"꾸준히 정진해라. 그럼 언젠가는,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전장 또한 이곳에서 체험해볼 수 있을 거다."
설명을 마친 넬슨이 3급 생도들을 데리고 지하 광장으로 입장했다.
지하 광장을 지키고 있던 기사와 마법사가 길을 열어주었다.
지하 광장 내부엔 복잡한 마법진들과 촉매가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넬슨이 생도들에게 물었다.
"가장 먼저 체험을 지원할 생도 있나?"
아론이 망설이지 않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넬슨이 지면에 새겨진 마법진 중앙으로 직접 아론을 안내해주었다.
주의점을 몇 번 더 설명한 넬슨이 아론을 땅에 앉힌 후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마법진이 활성화되며 아론 주위로 빛 무리가 번쩍였다.
"...!"
아론의 초점이 멍하게 흐트러졌다.
다들 긴장 가득한 눈으로 아론을 주시했다.
얼마 못 가, 평온함을 유지하던 아론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더니 식은땀을 줄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10분 정도 흘렀을 때, 마법진이 어둡게 가라앉으며 아론의 두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쿠당탕!
자리에 앉아 있던 아론이 성대하게 뒷구르기를 했다.
아론은 끅끅 숨을 내뱉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했다.
넬슨은 익숙하게 양동이를 아론에게 건네주며 생도들에게 첨언했다.
"두뇌와 육체가 괴리되었다가 연결되는 과정에서 반동이 찾아온다. 조금 쉬면 회복되니 겁 먹지 말도록."
아론은 헛구역질을 몇 번 더 하고는 마법진에서 기어나오다시피 했다.
그러면서도 손을 흔들며 괜찮다고 허세를 부리는데, 생도들은 호기심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며 호흡을 골랐다.
그 후엔 생도 번호 순서대로 체험을 시작했다.
요하나도 체험을 마친 후 억지로 지상까지 올라가 구역질을 하고 되돌아왔다.
다들 뭘 겪었는지는 발설하지 못해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레이는 첫 번째 시뮬레이션에선 대개 다수의 마물과 병사들이 싸웠던 전장을 체험하게 된다고 건너 건너 들어 알고 있었다.
체험을 끝낸 생도들은 다들 기진맥진 해서 쓰러져 있었지만 넬슨을 비롯한 다른 교관들은 타박하지 않았다.
원래 이게 첫 번째 체험이 반동이 강해서 어지럼증이 몇 시간 이상씩 지속되고는 했다.
그러다 마침내 레이의 차례가 되었다.
레이가 마법진 중앙에 서자 마법진이 활성화됐다.
'흠...'
수백 개의 환영 결계가 겹쳐 흐르며 레이의 의식을 흐트러뜨렸다가 재조합하기 시작했다.
저항하려면 저항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레이는 무수한 결계가 자신의 의식을 잠식하길 가만히 기다렸다.
화악!!
마침내 새로운 풍경이 레이의 시야에 펼쳐졌다.
레이는 생도복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검은 비가 내리는 대지 위로 악취가 강처럼 흐르고 있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끔찍한 환경 속에서 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시야가 닿는 곳마다 뭐라 형태를 단정하기 힘든 끔찍한 괴수의 사체가 널려 있었다.
"뭐... 이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는데..."
레이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풍경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옥좌 위에 앉은 여인이 금발을 늘어뜨린 채 턱을 괴고 있었다.
레이가 거짓일 게 분명한 악취를 느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또 미리 입력되어 있는 리실로테의 환영 같은 겁니까?"
"너도."
여인이 입을 열었다.
"얼마 남지 않았구나."
만남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