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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36화 (236/446)

236화

세리아는 바보가 아니다.

적어도 레이는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미궁 속에서 10년 가까이 갇혀서 구른지라 세리아의 사고방식과 감수성이 좀 많이 독특하긴 했다.

그래도 세리아는 정말 중요한 자리에선 멀쩡하게 행동하는 편이었고, 중간중간 좀 버퍼링이 걸리긴 해도 이제는 정상적인 화법으로 대화도 가능했다.

물론 편한 상대를 대할 때의 세리아는 자기 편한 대로 어순을 뒤죽박죽 섞고는 했는데, 레이는 거기까지는 다 괜찮았다.

허나 세리아의 유별난 조카 사랑과 그에 따른 애정 표현은 견디기가 많이 힘들었다.

좀 자주 보기라도 했으면 애정 표현의 수위가 낮아졌을 것 같은데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얼굴 보기가 힘들자 만날 때마다 세리아는 조카 자랑을 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

전날 발생한 참사 때문에 레이는 아직도 기가 죽어 있었다.

레이를 바라보는 생도들의 표정이 참 오묘했다.

한편, 이지스의 교관 넬슨은 3급 생도들의 첫 번째 외출을 앞두고 생도들은 전부 집합시켰다.

외출 나가서 사고 치지 마라.

그 경고를 지겨울 만큼 반복한 넬슨이 마침내 생도들을 해산시켰다.

3급 생도들은 전부 들뜬 얼굴로 외출 준비를 했다.

당장 황도로 나가봐야 대단한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지스 부지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갑갑함을 해소할 수 있었다.

레이는 방에서 정복을 잘 차려입은 후 브로치를 가슴 부근에 달았다.

이지스 생도들은 외출할 때도 무조건 정복을 착의해야 한다.

외출 나가서 옷을 갈아입고 신분을 숨겼다가 들키면 단순 경고로 일이 끝나지는 않았다.

"그럼 이따 보자."

"어, 그래."

아론이 방을 나가고 잠시 뒤에 레이가 기숙사 밖으로 나왔다.

레이는 기숙사를 나가자마자 기숙사 정문 가까이에 서 있던 세리아와 마주칠 수 있었다.

"..."

레이가 자기 얼굴을 쓸어내렸다.

뭐라 형용키 힘든 갑갑함이 가슴을 가득 메웠다.

유치원생 소풍 배웅 나온 엄마도 아니고 세리아가 대체 왜 여기 서 있단 말인가.

한편 레이를 발견한 세리아가 레이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

"...손 잡고 가자고요?"

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가 결국 참다참다 세리아에게 반발했다.

"아니...! 고모...!! 저도, 저도 이제 나이가 열아홉 살이에요...!! 열아홉!!"

전생의 기억까지 고려하면 정신연령은 레이가 세리아보다도 앞섰다.

어쨌든 레이는 이곳 나이만 따져도 곧 스물을 앞두고 있었다.

"스물이 코앞인데, 네? 막...! 너무 애처럼 고모가 다루면 저도...! 낯이 좀, 부끄럽고 그렇다고요...!"

레이의 진심을 담은 항변에 세리아가 입을 살짝 벌렸다.

세리아는 앞으로 내민 자기 손과 레이를 번갈아보더니 실망한 기색을 내보였다.

"사춘기 왔어, 조카한테..."

"아니 고모, 제 사춘기는 한참 전에 지났어요!"

"레이는 반항기야..."

세리아도 들어는 보았다.

반항기가 온 아이는 보호자의 손길을 거부하기도 한다고 말이다.

그래도 우리 조카는 다를 줄 알았는데, 레이에게도 결국 반항기가 오고 말았다.

세리아가 침울해졌으나 레이도 이번 만큼은 자기 주장을 꺾지 않았다.

"고모 손 잡고 다니진 않을 거예요. 남들 앞에서 저 붙들고 막 흔들면서 자랑하는 것도 하지 마세요!"

"...조카는 고모가 부끄러워?"

"..."

세리아가 가불기를 걸어오자 레이는 자기 이마를 탁 쳤다.

허나 레이는 세리아의 가불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정확하게 못 박았다.

"손 잡고 돌아다니는 건 부끄러워요."

"...그럼 안 잡을게. 손은."

"예예, 다른 곳도 남들 앞에서는 잡지 마시고요."

세리아가 다시 시무룩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조카 자랑을 자제하겠다고 약속한 세리아가 레이와 함께 이지스를 나섰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레이는 세리아와 나들이를 나가게 됐다.

*

황도 인근에서 간단히 즐길 오락거리는 많았지만.

레이나 세리아나 그런 것에 무감각한 편인지라 식당을 먼저 찾아갔다.

벽 일부가 거대한 유리로 된 레스토랑을 찾은 레이와 세리아가 자리에 착석했다.

가격표가 없어서 음식값이 얼마나 청구될지 몰랐지만 둘 모두 주머니 사정이 넉넉했기에 개의치 않았다.

웨이터가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오자 세리아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굉장히 조카 자랑을 하고 싶은 얼굴이었는데 세리아는 잘 참았다.

덕분에 레이는 개쪽을 당하지 않고 주문을 마쳤다.

잠시 뒤 음식이 나오자 레이가 포크로 면을 말아내며 세리아에게 물었다.

"이지스엔 고모 혼자 왔어요?"

"황도까지 같이 왔어. 디오리카랑. 아직 황도에 있어."

"아, 짭조카님요."

찾아가서 인사를 해야되나 고민하던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레이는 식사를 하며 세리아와 그동안의 안부를 물어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세리아는 레이가 제국수호훈장을 받은 일을 모르고 있었기에 레이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적당히 거짓말을 섞어야 했다.

그리 식사가 삼 분의 일쯤 진행되었을 때 레이는 밖을 바라보다 누군가를 발견했다.

쥬세핀이었다.

쥬세핀은 길거리를 걷다가 음식이나 장신구를 파는 가게 앞에 서더니,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구경하다 눈치가 보일 때쯤 걸음을 옮기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쥬세핀이 레이가 식사 중인 가게 앞에 섰다.

쥬세핀은 마찬가지로 눈동자를 굴리며 가게 안을 구경하다 레이와 시선이 딱 맞았다.

"..."

"..."

레이가 별생각 없이 안으로 들어와 보라고 손짓했다.

쥬세핀은 바로 거절하려다, 레이 앞에 세리아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쭈뼛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레이가 의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식사했어?"

"아직이다만..."

"다른 선약 없으면 여기서 식사하고 가."

레이는 어차피 한동안 얼굴 보고 살아야 할 거 미리 어색함 좀 덜어볼 목적으로 그리 권했다.

세리아와 관련된 일에 대한 오해도... 뭐, 오해랄 게 없긴 했지만 어쨌든 오해가 있다면 풀어놓고 싶었다.

헌데 쥬세핀은 레이의 제안을 듣더니 불안해하는 기색으로 가게 안을 살폈다.

레이는 혹시나 해서 덧붙였다.

"식사는 교관님께서 사주신데."

"고모."

"...고모께서 사주실 거야."

"어... 음... 감사합니다..."

세리아가 사준다고 하니 또 자리에 앉은 쥬세핀이 자기 손가락을 매만지며 레이와 세리아의 눈치를 보았다.

어쨌든 합석은 이루어졌고, 곧 쥬세핀의 식사 또한 테이블 위에 놓였다.

쥬세핀은 세리아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식사자리가 어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쥬세핀은 갈등 끝에 레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레이?"

"응?"

"왜 나에게 식사를 같이하자 제안한 건가...?"

"그냥?"

"어... 혹시 다른 목적이..."

"..."

레이가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꾹 눌렀다.

동기끼리 우연히 만난 김에 식사 좀 같이하자고 권한게 무슨 유별난 일이라고 이런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레이는 손가락을 열심히 꼼지락 대는 쥬세핀을 마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뷰세핀, 난 네 이름이 쥬세핀인지 뷰세핀인지도 사실 크게 관심 없어."

"...내 이름은 쥬세핀이다."

"그래, 쥬세핀. 우연히 만남 김에 별 생각 없이 권해봤을 뿐이야.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인데 식사 한 끼 같이 해서 나쁠 거 없잖아?"

"우리 조카 착해."

갑자기 세리아가 끼어들어 한마디 하자 레이는 뒷목이 조금 당겼다.

"...그러니까 쥬세핀, 내 말은, 오해하지 말라고. 다른 목적 같은 거 없으니까."

"그, 그런 건가..."

쥬세핀은 자신이 레이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과장되게 해석했다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괜히 찬물을 들이키는 쥬세핀을 보며 레이는 쥬세핀이 참... 여러 의미로 머리가 깨끗하다고 느꼈다.

좋게 표현해서 순수하고 맑다, 나쁘게 말하면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한 면이 있었다.

레이가 대놓고 물었다.

"왜 이렇게 순진하게 굴어?"

"순진하다는 말을 자주 듣긴 했다."

쥬세핀이 솔직하게 인정하자 레이가 실소를 터뜨렸다.

고개를 몇 번 저은 레이는 분위기가 계속 어색해지는 걸 바라지 않았음으로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긴장이 풀린 쥬세핀은 잠깐잠깐 자기 신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터놓았는데, 대단히 특별한 사연 같은 것은 없었다.

굳이 특이사항을 뽑자면 부모가 사업하다가 재산 날려먹고 빚더미에 앉았다는 것 정도.

쥬세핀의 부모는 본가에도 빚을 잔뜩 졌기에 가문에서 쳐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 했는데, 다행히도 쥬세핀이 이지스 입학에 성공하며 여유를 되찾게 되었다.

다만 상환 기간이 넉넉하게 늘어났을 뿐이지 장기적으로는 빚을 다 갚아야 했다.

쥬세핀은 그 때문인지 품위유지비조차 마음 편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물론 레이가 보기엔 쓸 데 없는 걱정이었다.

이지스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생도가 지닌 자잘한 문제는 황실에서 적극적으로 해결해주었다.

"네가 이지스 안에서만 잘하면 빚 문제야 알아서 해결 될 걸?"

"역시 그런가..."

레이의 말 한 마디에 마음이 가벼워진 쥬세핀이 표정을 풀었다.

레이가 금세 기분이 바뀌는 쥬세핀을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리고 약점될만한 이야기는 남 앞에서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

쥬세핀이 덜컥 굳더니 가볍게 입을 놀린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레이는 눈앞의 나사 하나 헛도는 녀석이 과연 이지스를 무사히 졸업하고 자기 자리를 제대로 잡을 수 있을까 참 의문이었다.

*

외출 나온 요하나는 향수를 파는 가게에 들렀다.

데런 또한 요하나와 같이 가게에 들렀는데, 문을 열어 개방시켜 놓았음에도 가게 내에 달짝지근한 냄새가 진동했다.

가게 주인은 요하나와 데런이 입은 이지스 정복을 확인하고 썩 친절히 접객했다.

요하나는 주인에게 추천받은 향수를 다섯 개 정도 나열하더니, 데런에게 말했다.

"한 번 맡아보고 좋은 거 골라봐."

데런은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귀족들이 쓰는 값비싼 다섯 향수는 각각 분명한 특색이 있었는데, 데런은 그중 뭐가 딱 뛰어나다고 단언하기는 힘들었다.

머리를 긁적인 데런이 요하나에게 물었다.

"좋기는 다 좋은 것 같은데... 누님이 원하는 느낌? 누님이 원하는 향수의 느낌 같은 거 없나요? 그런 거 설명해주면 참고 해서 골라볼게요."

요하나가 데런의 말을 듣고 고민을 이어가다 표정을 찡그렸다.

한참 동안 갈등하던 요하나가 쪽팔림을 무릅쓰고 떠듬떠듬 말했다.

"카, 카렌..."

"...네?"

"카렌한테서 나는 냄새랑 비슷한 거..."

"..."

데런이 세상 측은한 표정으로 요하나를 바라봤다.

요하나가 곧장 발끈했다.

"아, 왜!! 왜 그렇게 봐!!"

"아니, 그, 누님..."

데런은 자기가 다 참담해져서 말끝을 흐렸다.

데런의 반응에 요하나가 계속해서 화를 내자, 결국 데런은 예전에 카렌 가까이 다가가면 느껴졌던 체향 같은 것을 억지로 상기해보며 향수를 골랐다.

데런이 향수를 몇 개 골라주자 요하나는 만족하며 향수를 받고는 자기 목덜미 쪽에 몇 번 뿌려보았다.

레이는 간간이 카렌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는 했다.

데런은 설마 요하나가 그때의 기억 때문에 목덜미에다 향수를 뿌려보나 싶어서 콧잔등을 꽉 붙잡았다.

괜히 불쾌해진 요하나가 데런의 다리를 약하게 걷어찼다.

어쨌든 요하나는 품위유지비로 즐겁게 쇼핑을 끝낸 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지스에 복귀했다.

헌데, 이지스 정문으로 들어가는 길에 다른 3급 생도 몇 명이 엎드려뻗쳐 자세로 땅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요하나가 쟤들 왜저러나 싶어서 눈을 깜박이는데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2급 생도들이 다가왔다.

"흡...!"

2급 생도 한 명이 코를 벌름거리더니 눈을 크게 떴다.

"향~수우~? 3급 생도가 벌써부터 향수를 뿌려-?!!"

요하나는 자기도 머리를 박아야겠다는 걸 직감했다.

상기해보니 3급 생도들은 외부 치장을 함부로 못하도록 제한이 걸려있다고 2급 생도들이 말해주긴 했었다.

요하나, 그리고 요하나와 연대 책임으로 묶인 데런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한 후 머리를 박으려하는데 2급 생도들의 눈이 동시에 정문을 향해 돌아갔다.

세리아와 같이 외출했던 레이가 홀로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의 가슴팍에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크기가 큰 브로치가 환히 빛나고 있었다.

2급 생도 한 명이 레이의 브로치를 삿대질하며 고함쳤다.

"야 이 새끼야!!!!!"

"?"

레이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고, 데런은 아주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만남 (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