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주변을 쓱 둘러본 세리아가 레이를 자랑하듯이 앞으로 쭉 내밀었다.
회관에 모여있던 자들은 돌발적인 세리아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얼을 탔다.
기대했던 반응이 돌아오기는커녕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자, 세리아는 잠시 고민하다 한마디 했다.
"박수."
"..."
다들 서로 눈치를 보다가 영문도 모른 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짝짝짝짝-! 우렁찬 박수 소리가 중앙 회관을 가득 뒤덮었다.
세리아에게 잡혀 축 늘어져 있던 레이는 더더욱 죽고 싶어 졌다. 하다못해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박수는 한참 더 이어졌다.
세리아는 박수 소리를 들으며 만족한 얼굴을 하더니 넬슨을 돌아보았다.
세리아가 자기보다 조금 더 큰 키를 가진 레이를 번쩍 들어다가 넬슨을 향해 들이댔다.
"내 조카야."
"...예?"
넬슨이 바보처럼 되묻자 세리아가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내, 조카야."
"...그렇군요."
"우리 조카 귀여워."
"..."
침묵하는 넬슨을 향해 세리아가 재차 강조했다.
"우리 조카 귀여워."
"예... 참... 귀여운 조카를 두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조카가 정말 귀엽습니다..."
넬슨이 마지 못해 세리아에게 호응해주자 세리아가 흐뭇해하며 레이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결국 레이가 수치를 견디지 못하고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박수 소리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
중앙회관에서, 세리아가 아무 생각 없이 레이를 자랑한 것은 아니었다.
세리아는 레이가 정확한 신분을 숨기고 입학했다는 것을 전해 들었기에 본래는 조카 자랑을 좀 자제할 생각이었다.
헌데, 레이는 이지스를 잠깐 경험한 후 자기 신분을 일부 밝혀야겠다고 에른스트 쪽으로 연락을 넣었다.
에른스트는 매우 황당해하면서도 레이의 부탁을 수락했는데, 이에 관한 정보가 세리아의 귀에도 들어갔다.
레이가 스스로를 에른스트가 점찍은 스페라의 예비 혼약자라 밝힌다면 세리아도 굳이 조카 자랑을 자제할 필요가 없었다. 적어도 세리아의 생각에는 그랬다.
그렇기에 지금과 같은 참사가 터진 건 전적으로 레이의 잘못이었다.
레이가 육체 단련 따위로 힘들다고 에른스트에게 징징거리지 않았으면 남들 앞에서 세리아에게 붙들려 박수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레이가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며 축 늘어졌다.
자괴감에 휩싸인 레이가 무력하게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박수 소리가 멎을 때쯤 세리아가 레이를 자기 쪽으로 돌려 잡았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불안감이 레이를 급습했다.
돌려잡아? 돌려 잡아서 뭐 하려고?
지금까지 레이의 경험상, 세리아가 레이를 돌려 잡아서 하는 일은 기껏해야 한두 개였다.
방금까지 축 처져 있던 레이가 심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세리아를 마주 봤다.
"고, 고모...?"
레이가 자기 겨드랑이를 붙들고 있는 세리아의 팔을 더듬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허나 세리아는 개의치 않고 레이를 자기 품으로 끌어들였다.
레이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애원이 터져 나왔다.
"고모, 잠깐, 잠깐만요...! 고모...!! 고모오!!!"
레이가 팔다리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저항했지만 곧장 제압당했다.
세리아는 레이를 제압한 후 본격적으로 조카를 향한 애정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과시하기 시작했다.
쪽쪽쪽쪽, 조카를 향한 애정이 가득 담긴 뽀뽀세례가 쏟아지자 레이가 경기를 하며 버둥댔다.
"...!!"
모두가 경악한 채 그 장면을 바라봤고, 반항하던 레이는 결국 반쯤 혼절한 채 얼굴을 내주었다.
쪽쪽쪽, 그동안 못 본 만큼 충분히 뽀뽀 세례를 쏟아부은 세리아는 홀로 만족하고선 단상을 내려왔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생도들 사이로 다가간 세리아가 레이를 제자리에 가져다 두더니 다시 단상 위로 올라가서 뿌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
중앙 회관에 있는 모두가 힐끔힐끔 레이를 돌아보았다.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레이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상황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은 일단 레이가 세리아가 아끼는 조카라는 것은 알아챘지만, 정말 너무나도 부럽지가 않았다.
한편 세리아는 단상 위에서 자기소개를 마저 했다.
자기소개가 끝나자 생도들이 재차 박수를 쳤다.
자기소개를 끝낸 세리아가 단상 뒤편으로 물러나며 레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포자기한 레이는 공허한 눈빛으로 손을 마주 흔들어주었다.
넬슨은 일련의 사태에 강한 혼란을 느끼면서도 자기 할 일을 계속했다.
아직 소개해야 할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다음은... 이번 학기부터 고문(顧問)직을 맡아주신 자문관님들을 소개하겠다."
이지스의 고문직과 교관직은 어디에 적을 두고 있느냐에 따라 구분됐다.
교관들의 경우엔 일시적으로나마 소속이 이지스로 옮겨지는데, 자문관들의 경우엔 외부인 신분으로 이지스 내에서 활동했다.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는 자들이나 교단의 고위 관계자들이 보통 고문직을 맡았다.
생도들 사이의 수군거림이 가라앉은 가운데 넬슨이 자문관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했다.
시간이 흘러, 이윽고 넬슨이 마지막 자문관을 소개했다.
"...교단의 이름 높은 하이템플러, 안소니우스 님, 단상 앞으로 나와주시길 바랍니다."
하이템플러.
교단에서 인정받은 템플러들 중에서도 특히 우수한 자들만이 하이템플러라 칭해졌다.
성기사, 혹은 템플러라 불리는 성직자들은 신성력을 운용하는 방식과 가짓수에 있어 개인의 편차가 상당했기에 하이템플러의 기준이 정확히 무엇이라고 명시하긴 힘들었다.
다만 충분히 스스로를 갈고닦은 템플러들은 신성력을 격자구조로 짜내어 병장기를 뒤덮어낼 수 있었는데, 이게 가능한 자들이 보통 하이템플러로 분류되고는 했다.
격자구조로 짜내어진 신성력으로 뒤덮인 병기는 절삭력은 많이 떨어지지만 그 단단함은 검강을 막아 세울 정도였다.
때문에 하이템플러들이 든 병기는 그 종류가 도검일지라도 실질적으론 매우 강력하고 단단한 둔기에 가까웠다.
"...?"
이지스에 우수한 템플러가 자문관으로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레이는 묘한... 무언가 묘한 혼란을 느꼈다.
알 수 없는 기시감, 혹은 불안감 같은 것이 레이의 심장을 조금 더 빠르게 뛰게 했다.
레이는 단상 위로 올라서는 하이템플러, 안소니우스를 바라봤다.
다른 생도들도 마찬가지로 안소니우스를 바라보더니 놀라움을 드러내며 작게 수군거렸다.
이지스의 생도들마저 작게 동요할 만큼 안소니우스는 하이템플러 중에서도 명성이 뛰어난 자였다.
현 시점에서, '팔라딘의 자리와 가장 가까운 자'.
누군가 그런 말을 입에 담자 레이는 뒤늦게 묻혀있던 자신의 기억을 상기했다.
'그래... 당신이 바로...'
레이가 냉혈한 인상을 지닌 안소니우스를 바라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내가... 구원하지 못한 자.'
*
새로 부임한 교관과 자문관들의 소개식이 끝났다.
생도들은 잠시 자유시간을 얻었기에, 레이는 야외의 벤치를 찾아 앉아 가만히 하늘을 바라봤다.
"..."
쪽쪽쪽쪽.
귓가에 이명처럼 들려오는 뽀뽀 소리에 레이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괴로워했다.
한참 뒤척이다 세리아 일은 잊어버리자고 되뇐 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안소니우스라...'
레이로 인해 이 세계가 본래 겪어야 할 역사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레이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미래의 정보 또한 이제는 그 가치가 대부분 소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안소니우스, 그는 레이가 알고 있던 미래에서 제대로 된 행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부질없이 죽었다. 그의 죽음은 아무 영향도 가치도 없었다.
현 시점에서 안소니우스가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레이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결코.
"..."
레이가 의자에서 무게를 잡고 앉아있는데, 2급 생도들이 지나가다 레이를 발견하더니 저들끼리 한마디씩 했다.
"쟤 왜 아직 살아있냐?"
"나였다면 바로 옥상 올라가서 머리부터 떨어졌다."
"그 수치를 당하고도 얼굴을 들고 다녀? 독하다, 독해."
"..."
레이는 기분이 매우매우 울적해졌다.
세리아가 온다고 미리 연락만 받았더라도 어떻게든 둘만 먼저 만나 쓰다듬을 당했을 텐데, 하필 처음 마주친 곳이 중앙회관이었던 지라 화를 면치 못했다.
레이가 몸을 배배 꼬고 있는데 아론이 다가왔다.
"어... 레이."
아론은 궁금한 게 꽤 많은 표정이었다.
레이는 어차피 남들 앞에서 쪽이 다 팔렸기에, 조금 나중에 밝히려던 사실을 아론에게 설명해주었다.
레이의 설명을 전부 들은 아론은 떫은 얼굴을 했다.
레이의 설명대로라면, 레이는 에른스트가 증손녀인 스페라의 혼약자로 삼으려고 한 유망주이자 세리아의 친조카로서 알슈테인 공작가와도 인연이 있었다.
신분은 평민이긴 한데 배경만 보면 이런 금수저가 또 없었다.
"이지스에서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던 자신감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뭐 임마?"
"어? 어, 아니, 아무 말도 안 했어."
무심코 머릿속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낸 아론이 얼른 손을 저었다.
아론은 레이가 따지고 들기 전에 얼른 말을 돌렸다.
"넌 그러면 고향이 어디야? 세리아 알슈테인 경과 같은..."
"고향? 내 고향이 알 바야? 그게 왜 궁금한데?"
레이는 꽤 공격적으로 답했다.
레이가 고향을 애지중지한다는 식으로 소문이 퍼져봤자 좋을 게 없었다.
레이는, 이지스 내에서만이라도 촌구석인 고향을 부끄러워하고 기억에서 없애고 싶어하는 촌놈을 연기할 예정이었다.
아론은 레이가 원하는 대로 레이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근데 세리아 알슈테인 경께서 널 참 아끼, 풉...! 아끼시는... 크읍...!"
아론이 웃음을 제대로 참지 못하고 계속 어깨를 떨었다.
레이가 살기어린 눈동자를 하자 아론을 자기 목젖을 퍽퍽치며 표정을 바로했다.
"크음...! 음... 이, 이제 그만 돌아갈까?"
"아직 휴식 시간 좀 남았잖아?"
"혹시라도 늦으면 곤란하잖아. 특히 오늘은 조심해야지."
"왜?"
"내일 외출이 허가되잖아. 오늘 뭘 잘못해서 외출 통제라도 받으면 일주일을 다시 기다려야 해."
"아... 그건 그렇네."
이지스에선 일주일에 한 번씩 생도들에게 외출이 허가된다.
훈련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 이지스의 부지를 벗어나는 경우도 잦았지만 이동하는 내내 철저하게 통제받았다.
그렇기에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이며 황도를 구경 가능한 시간은 일주일에 한 번 뿐이었다.
아론이 조금 들뜬 기색으로 덧붙였다.
"품위유지비도 지급되니까, 다른 지원을 받지 못해도 필요한 물품쯤은 나가서 구매할 수 있을 거야. 네가 곤궁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 알겠어. 괜히 나 혼자 늦었다가 연대책임이랍시고 단체로 외출 통제당하면 원망이 자자하겠네."
"하하, 그렇지."
"같이 돌아가자. 근데 황도를 손잡고 돌아다닐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일 굳이 나가야 하나 싶기는 하네."
"..."
고모 손을 꼭 붙잡고 돌아다니면 되지 않을까?
아론은 목구멍까지 나왔던 말을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아론은 보기보다 학습 능력이 있는 남자였다.
이지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