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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34화 (234/446)

234화

목욕탕에서 세바스와 만남 이후에도.

레이는 일단 겉으로는 충실히 이지스의 훈련을 계속 받았다.

고강도 악바리 훈련을 계속 받기엔 관절 쪽 문제가 있긴 했는데, 레이는 그냥 남들 몰래 마나를 활용해 근육을 강화하는 등의 꼼수를 부렸다.

어지간해서는 걸렸겠지만 레이의 실력이 뛰어난지라 적어도 동기들 중에 눈치챈 자는 없었다.

다만 동기들 사이에 섞여 기계적으로 헥헥대는 레이를, 넬슨은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카렌이 준 브로치도 레이가 자잘한 피로를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레이는 브로치를 항상 가지고 다니며 때에 따라 밖에 달거나 정복 안주머니에 보관하고는 했다.

덕분에 레이는 육체 혹사 관련해서는 걱정을 완전히 덜었다.

물론 이지스가 생도들에게 육체 단련만 계속 지시한 것은 아니었다.

이지스는 전문적인 군사 교육 기관이었고, 때문에 군사학을 비롯한 기타 교양 학문들을 이지스 생도들은 이수해야 했다.

이쪽도 상당히 빡쎄기는 마찬가지였다.

군사 교육만 해도 만만치 않은데 제국 최고의 엘리트랍시고 교양은 교양 대로 챙기길 강요받은 탓에 시간표가 아주 빼곡했다.

레이는 몸과 정신이 힘든 것과 별개로 내심 감탄했다.

이지스의 전반적인 커리큘럼은 레이가 예상했던 것에 비해서도 훨씬 체계적이고 전문화되어 있었다.

추후 이지스 생도들은 온갖 상황을 가정한 전투 교리들을 머리에 새겨넣다시피 교육받게 될 것이다.

물론 당장은 암호법이나 독도법 같은 기본부터 시작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지스 입학 나흘째.

체력 단련을 끝낸 생도들이 교실로 우르르 몰려가 자리에 착석했다.

오늘 처음 생도들과 만나게 된, 전술학개론 과목을 담당하는 나이 든 교수가 교실로 들어오더니 나긋한 말투로 수업을 시작했다.

이번 기수 생도들과의 첫 번째 수업이니만큼, 연륜 있는 교수는 처음부터 난해한 개념을 설명하기보다 생도들이 수업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이끌었다.

교수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전투 같은 것을 소개하며 그 안에 담긴 전술에 관해 묻고 답하며 토의하는 식으로 생도들의 흥미를 끌어냈다.

생도들도 교수에게 호응해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잡히자 교수는 아티펙트 장치를 활용해 허공에 홀로그램처럼 전장을 그려놓은 후 레이를 가리켰다.

"329번."

"예, 교수님."

수업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레이가 곧장 답했다.

교수는 홀로그램에 병력들을 배치하며 레이에게 물었다.

"이런 식으로 요새화된 진지를 공략하기 위해선 어찌 해야 할까?"

홀로그램 위에 나타난 것은 암석층 위에 건설된 완벽히 요새화된 진지였다.

레이는 자신 있게 답했다.

"메테오를 떨어뜨리면 됩니다."

"..."

주변 생도들이 레이를 미친놈 보듯 바라봤고 교수 또한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녀석이 보자보자하니까 나랑 지금 말장난을 치나, 교수가 그런 속뜻이 담긴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레이가 뒤늦게 답변을 정정했다.

"보급을 차단하거나... 양동 작전을 펼쳐 적의 화력을 분산시키고 준비된 마법을 소모하게 한 후 주력으로 단번에 일점 돌파해서 내부로 침입해야 하지 않을까요?"

"좋은 의견이다."

아무것도 안 배운 것치고는 훌륭한 답변이었다.

교수는 가볍게 레이를 칭찬한 후 홀로그램의 형상을 바꾸었다.

"메테오...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대량 학살이 가능한 고위 마법은 위력은 확실하지만 상응하는 위험 또한 부담해야 한다. 강력한 한 방을 노리다 패한 전투도 역사에 부지기수지."

홀로그램 속에서 하늘이 열리고 지면이 불타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홀로그램을 향해 쏠려 있을 때 교수가 설명을 덧붙였다.

"알리모 왕국에서 벌어졌던 사건에서도... 제국 특무대가 악마숭배자들의 마법을 역이용해 적을 섬멸했다고... 알음알음 소문이 돌고 있지."

이 전투에 참여한 특무대원 중 한 명이 제국 수호 훈장을 수여받았느니마니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풀어놓던 교수가 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레이가 흐뭇한 얼굴로 웃어주자 교수는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

이지스의 교수가 전부 첫 수업이라고 관대한 것은 아니었다.

독도법을 가르쳐준 교수는 첫 번째 수업부터 이론을 줄줄 읊었는데 독도법에 관한 개념은 처음 들을 땐 난해할 수밖에 없었다.

기초적인 지도 보는 법이야 생도들도 전부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군 독도법은 훨씬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교수가 독도법의 핵심적인 개념을 줄줄줄 설명하고 수업을 끝내버리자 몇몇 생도들이 얼을 탔다.

교수가 설명을 못 한 건 아니었다.

도리어 명쾌한 편이었지만, 생도들은 생소한 개념을 접했다 보니 머리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레이가 적당히 주요 개념을 요약하고 정리한 뒤 일어서려는데 요하나가 레이의 책상 위에 자기 노트를 턱 올려놨다.

"이해 안 돼."

가르쳐달라는 요구를 썩 당당하게 하는 요하나였다.

레이가 요하나를 향해 눈을 껌벅거렸다.

일단 대외적으로는 레이와 요하나는 이지스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다.

지금처럼 무언가를 가르쳐달라고 당연하게 요구하는 것은 남들 보기에 이상해 보일 것이다.

레이가 가만히 있자 요하나가 연기톤으로 또박또박 덧붙였다.

"이 개념이 이해가 안 돼. 너는 이해한 것 같은데, 혹시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뭐... 그래."

레이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 노트를 펼쳤다.

그렇게 레이가 요하나와 쑥덕거리고 있으니 얼마 안 가 데런까지 책상에 합류했다.

서로 꼬꼬마 때부터 보아왔던 사이인데 어색한 척을 하자니 분위기가 참 이상하게 어색해졌다.

레이는 그게 웃겨 입꼬리를 올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레이는 기본적으로 두뇌가 뛰어난 편이었고, 이런 '학습'에 관해서는 남들보다 이골이 나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요하나와 데런이 헷갈렸던 부분은 깨우쳐주었다.

그리 추가 수업을 이어가고 있자 레이의 옆옆 자리에 앉아 있던 쥬세핀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노트에 무언가를 받아적었다.

레이가 설명을 이어가다 말고 쥬세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야, 뷰세핀."

"...내 이름은 쥬세핀이다."

"...아니, 왜 그렇게 헷갈리게 이름을 지었어?"

"지, 지금 내 이름을 모욕하는 건가...!!"

"농담이니까 너도 거기서 그만 훔쳐 듣고 일로 와 봐."

"..."

쥬세핀이 꾸물거리다 결국 노트를 들고 레이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쥬세핀이 굴욕감에 휩싸인 얼굴로 레이와 마주앉더니, 이해 못 했던 부분을 레이의 설명을 듣고 이해한 후 작게 탄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이게 그런 의미...! 였구나..."

히죽거리던 쥬세핀은 레이의 얼굴을 보고 다시 표정을 굳혔다.

그 뒤로 독도법 수업 말고 다른 수업에서도 불친절한 교수가 몇 명 있었는데, 매번 교수에게 무언가를 질의하긴 어려웠기에 자연히 생도들끼리 묻고 답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렇게 3급 생도들은 점점 더 가까워져 갔다.

*

이지스 입학 6일째.

오늘의 예정 중엔 '무장수여식'이 존재했다.

무장수여식에선 황제가 새롭게 입학한 이지스 생도들에게 선물한 무장들이 수여됐다.

각각의 생도들은 본인의 검술이나 체격에 적합한 무장들을 수여받았다.

수여받는 무장의 숫자와 질은 생도들마다 천차만별이었는데, 이를 통해 이지스가 각각의 생도들에게 가지는 기대치를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좀 잔인한 이벤트이긴 했지만 이지스는 생도들에게 지속적으로 경쟁심과 향상심을 불어넣길 마다치 않았다.

그 때문에 무장수여식을 앞두고 묘한 기류가 3급 생도들 사이에서 흘렀다.

나중에 가면 또 무던해질 일이었지만, 당장은 3급 생도들 대부분이 혹시라도 자신이 싸구려 무구를 받아 자존심이 상할까 싶어 날카로워져 있었다.

넬슨은 그런 3급 생도들을 이끌고 중앙 회관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30분 정도 기다림 후에 무장수여식이 시작됐다.

"301번 생도, 앞으로."

요하나가 단상 앞으로 나가가 검 한 자루와 방어형 아티펙트 네 개가 수여됐다.

검은 요하나에게 익숙한 물건이었는데, 다름 아닌 제플린이 제작해준 요하나 전용 검이었다.

방어형 아티펙트 중 견갑과 각반도 이전에 요하나가 제플린의 아틀리에에서 받은 물건이었고 말이다.

그걸 대외적으로 황제가 선물한 것으로 꾸며 다시 준 것인데, 어쨌든 남들 눈에는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다른 3급 생도들은 질투 어린 눈길을 요하나에게 보내면서도 요하나가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직접 겪어봐서 알았기에 쌉싸름한 한숨과 함께 박수를 쳐주었다.

그후 레이는 검 한 자루, 망토 하나, 그리고 면직물처럼 흐물거리는 내갑을 하나 받았다.

셋 모두 아무 문양도 없어서 얼핏 보면 그 가치를 알아채기 힘들었다.

허나 레이가 받은 검은 오메가 시리즈였고, 망토의 재질은 드래곤 가죽이었으며, 내갑은 로얄가드에게 공급되는 물건이었다.

이 정도 장비만 있어도 레이가 전력을 발휘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기에 레이는 웃는 얼굴로 장비를 받아 챙겼다.

'설마 황도 내에서 전투를 벌일 일은 없겠다만...'

레이는 제발 그럴 일이 없기를 바랐다.

레이 다음에 아론까지 무장을 수여받았다.

3급 생도들은 값비싼 무장을 선물 받았다는데 기쁜 마음을 느끼면서도 다른 생도들의 무장과 자기 것을 비교해보며 여러 감정을 품었다.

그후 3급 생도들은 수여받은 무장을 각자의 기숙사 창고에 넣어놓고 다시 중앙회관에 집합했다.

중앙회관에는 그 사이 2급 생도들까지 전부 집합해 있었다.

3급 생도들은 말없이 살짝 고개를 숙이곤 열을 맞추어 차렷 자세를 취했다.

"주목."

넬슨이 단상에 올라가 입을 열었다.

"이번 학기부터 이지스에 부임하게 되신 교관님들을 소개하겠다."

이번 학기부터 이지스에 부임한 신참 교관, 혹은 기간직 교관들.

신참이나 기간직이라 해서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이지스의 신참 교관들은 바로 직전까지 현역에서 활약하던 제국 최고의 엘리트였으며, 기간직 교관의 경우 명망 있는 권위자들을 이지스에서 한시적으로 모셔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자기 분야에서만큼은 최고의 전문가인 그들을 고작 생도들 따위가 신참이라 무시하는 건 정말 정신 나간 짓이었다.

2급 생도와 3급 생도 모두가 긴장감을 끌어올린 가운데.

새롭게 이지스의 교관직을 수행하게 된 자들이 한 명씩 중앙회관 뒷문을 열고 들어와 단상 위에 섰다.

생도들의 규칙적인 박수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넬슨이 마지막 교관을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아티펙트 운용 실습' 과목을 담당해주실 '세리아 알슈테인' 경, 단상 앞으로 나와주시길 바랍니다."

"?"

레이가 별생각 없이 줄을 맞춰 서 있다가 자기 귀를 툭툭 쳤다.

뭔가 익숙한 이름을 들은 것 같은데, 레이는 설마설마하는 심정으로 현실을 부정했다.

한편 생도들은 힘차게 박수를 치며 들뜬 감정을 드러냈다.

세리아 알슈테인이라면 제국에서도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는 뛰어난 기사였다.

세리아는 호사가들 사이에서 종종 '웨폰마스터'라 칭해질 정도로 다수의 아티펙트를 동시에 다루는데 능숙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덜컥!

중앙회관 뒷문이 열리고 세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세리아를 바라보다 시선이 딱 마주쳐버렸다.

"..."

세리아와 시선이 마주친 레이가, 잠깐 얼을 타다 반사적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얼마 못 가.

레이가 축 늘어진 채 세리아에게 잡혀 왔다.

일련의 과정을 전부 지켜본 모두의 시선에 세상 당혹스러운 감정이 깃들었다.

세리아는 남들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레이의 겨드랑이 사이를 잡아 들어 올린 채 단상 위까지 올라왔다.

주변을 쓱 둘러본 세리아가 레이를 자랑하듯이 앞으로 쭉 내밀었다.

레이는 죽고 싶었다.

이지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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