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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33화 (233/446)

233화

"...!! 아니, 저 고추는...?!"

"?"

레이가 몸을 움찔 떨며 욕탕 속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얼굴도 잘 모르는 남자가 갑자기 아랫도리를 삿대질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니 아무리 레이라 해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갈색 머리도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자기 친구를 돌아봤다.

그때 레이가 떨떠름한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제 고추랑 언제 따로 만나신 적 있으십니까...?"

"...!"

세바스를 바라보는 갈색 머리의 눈동자에 의아, 불신, 경계의 감정이 짙어졌다.

이 새끼가 그런 음습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구나, 뭐 그따위의 생각이 담긴 시선으로 갈색 머리가 쳐다보자 세바스가 뒤늦게 항변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너, 너 스페라 프리슬란의 혼약자라고 소문났던 그놈이잖아!"

"...!"

갈색 머리가 놀란 표정으로 레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레이도 갑자기 스페라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깜짝 놀랐다가, 천천히 눈가를 좁혔다.

"그걸 어떻게 제 고추를 보고 아셨습니까...?"

갈색머리가 다시 불신과 경계의 감정을 담은 눈빛으로 세바스를 돌아봤다.

세바스는 계속되는 의혹에 분통이 터져서 꽥 소리쳤다.

"옛날에 목욕탕에서 만났었잖아!! 황도의 공용 목욕탕에서!!"

"그때 제 고추를 정말 유심히 보셨나 보군요..."

레이가 슬그머니 욕탕 속으로 다시 몸을 감췄고, 갈색 머리도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며 세바스와 거리를 벌렸다.

세바스는 뒷목이 당겨오는 걸 느꼈다.

"아니 내 말 좀 제대로 들어, 이 새끼야!!"

*

사람의 인상은 쉽게 변한다.

눈썹의 화장법만 바꾸어도 인상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세바스와 그의 친우는 요하나와 데런과 과거에 잠시 만났었다.

허나 그 당시 요하나와 데런은 말 그대로 촌놈에 가까웠다.

옷은 둘째치고 행동거지와 전체적인 스타일이 딱 촌놈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현재, 요하나와 데런은 꽤 오랜 시간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에서 머물며 전체적인 스타일과 억양이 많이 세련되게 변했다.

추후 황도에서 지낼 때 문제가 없도록 작정하고 교정한 것이기에 변화가 빨랐다.

그렇기에 웬만큼 눈썰미가 좋은 자가 아니라면, 과거에 잠깐 만났던 기억만으로 요하나와 데런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허나 레이는 과거에 비해 스타일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세바스의 기억 속에는 공용 목욕탕에서 보았던 레이의 흉터와 아랫도리가 꽤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미 레이에게 기시감을 느끼고 있던 세바스였기에 레이의 아랫도리는 흩어진 기억을 짜맞추는 결정적인 힌트가 되었다.

레이가 세바스의 이야기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 고추를 참 인상 깊게 보셨다는 거군요..."

"아, 좀!!"

세바스가 발작하며 물을 첨벙거렸다.

지금 세 사람은 욕탕 안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깊이 담그고 있었기에 아랫도리는 서로에게 비치지 않았다.

레이는 두 손으로 물을 떠올려 세수를 몇 번 했다.

'이런 맙소사...'

지금 일은 레이에게도 상당히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여자도 아닌 남자에게... 얼굴도 흉터도 아닌 아랫도리로 신원을 식별 당하리라곤 레이도 결코 상상해보지 못했다.

레이는 지금 오랜만에 심적 압박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일단 세 사람은 다시 인사를 나누었다.

레이는 2급 생도인 갈색 머리의 이름이 '하비'이며 젠트리 계층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세바스는 잠시 고민하다 레이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신분을 대체 왜 숨긴 거야?"

"선배님들과 동기들에게 좀 더 부담 없이 가깝게 다가가고자..."

레이가 정치인들이나 할 소리를 하자 세바스와 하비의 표정이 동시에 떫어졌다.

하비가 눈살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그... 교관님들은 알고 계시냐? 너 이거 잘못하면 일 커진다?"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교관, 혹은 더 윗선까지 속이고 레이가 이지스에 입학했다면 이건 굉장히 문제가 커졌다.

하비는 이지스가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았기에 언뜻 간절함까지 담긴 목소리로 레이에게 재차 물었다.

"당연히 알고 계시지...?"

"교관님께서 알고 계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황제 폐하께선 알고 계십니다."

갑자기 레이의 입에서 '황제'가 튀어나오자 세바스와 하비는 덜컥 굳었다가 이내 긴장을 풀었다.

이지스가 황실 직속 교육 기관인 만큼 신분 위장 같은 민감한 문제 같은 건 당연히 황제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황제가 알고 있다는 말에 하비가 안심하며 욕탕 벽에 등을 기댔다.

"근데 이지스엔 왜 입학한 거야? 제국의 소드마스터께서 고른 증손녀의 혼약자라며? 굳이 이곳에 입학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

"제가 워낙 잘나서."

레이가 그리 말하며 하하 웃었다.

"제가 온전히 프리슬란 가문 사람이 되기를 황제 폐하께선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높으신 분들의 이런저런 논의 끝에... 일단 이지스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엔 어찌 될지는 저도 뭐라 확답하기 힘드네요."

레이의 자기 자랑에 자존심이 상한 세바스와 하비가 뭐라 한마디씩 하려 했다.

허나, 그보다 앞서 레이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레이의 손가락 위로 마나의 기류가 뻗어나와 응축되더니, 이윽고 가파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주 찰나의 순간.

츠즉!!

날카로운 마나의 섬광이 레이의 손가락 위에서 거칠게 점멸하다 사라졌다.

매개체 없는 검기의 생성.

설령 찰나의 순간이라 해도 매개체 없이 검기를 생성하는 것은 엑스퍼트 급은 도전하기 힘든 기예였다.

세바스와 하비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레이는 아직 빛 무리가 감도는 손가락을 휘휘 저으며 자기 실력과 입지를 은근히 과시했다.

황실과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동시에 탐내는 인재.

그쯤 되면 교관이 온다 해도 건드리기 껄끄러운 수준이었다.

적당히 자기 PR을 끝낸 레이가 한 마디 덧붙였다.

"당장은 제 신분을 비밀에 부쳐주실 수 있으실까요? 나중에 선배님들께 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레이도 아직 생각 정리가 안 돼서 하는 부탁이었다.

정확한 컨샙을 어떻게 잡고 이지스 내에서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 레이도 아직 제대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물론 소문이 퍼진다고 해도 어쩔 수는 없었다.

세바스와 하비가 서로를 마주 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는데... 나중에 똑바로 사과하도록 해."

"예, 감사합니다. 선배님들께는 꼭 다시 제대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레이가 최소한의 예의는 깍듯하게 지켰기에 세바스도 더는 따지고 들지 않았다.

레이가 제국 최고 권력들의 수호를 받고 있기도 했고, 이지스 생도들이 그토록 강요받는 미덕 중 하나가 침묵이었으니 당장은 세바스나 하비의 입을 통해 레이에 관한 소문이 퍼질 일은 없었다.

그 후, 레이는 몇 번 더 세바스와 하비에게 고개를 숙이며 비위를 맞춰주다 물었다.

"근데 3급 생도는 욕탕 이용이 불가능합니까?"

"야, 환영회랑 교류회에서 다 들어놓고...!!"

세바스가 목소리를 높였다가 뒤늦게 진정했다.

"임마, 다 설명해준 걸 벌써 까먹었어? 술을 얼마나 처마셨길래?"

"아, 죄송합니다."

술자리에서 2급 생도들이 이것저것 떠들긴 했는데 레이는 대부분 한 귀로 흘렸다.

어차피 이지스 시설 이용 매뉴얼이 담긴 책자를 따로 나눠주기에 레이는 그냥 매뉴얼만 적당히 외워 놓았다.

허나 당연히, 이지스에서도 악습과 부조리가 존재했다.

3급 생도들은 대형 목욕탕을 이용하지 못한다... 같은 것 말이다.

'뭐... 심각한 건 아닌데...'

레이의 전생에서도 이런 부조리는 좀 있었다.

더군다나 레이가 경험하기 이전 군대인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정말 짐승을 다루는 것보다 못한 끔찍한 부조리들도 넘쳐났었다.

전생의 레이는 자신의 윗세대가 그런 끔찍한 문화를 직접 겪었으며 또한 자행했다는 것에 대해 종종 섬뜩함을 느끼고는 했었다. 그것도 다 지난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대형 목욕탕 이용 금지쯤은 부조리 중에 아주 귀여운 측에 속했다.

문제는 그런 부조리가 한두 개가 아닐 것이란 거였는데, 레이는 그냥 만사가 귀찮았다.

"어으어..."

앓는 소리를 낸 레이는 판이 깔린 김에 정말 궁금했던 사안을 꺼냈다.

"선배님들 중에 겉도시는 분들이 몇 분 계시던데 혹시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니 이 새끼가 근데 건방지게 말이야. 야, 일어서."

하비가 벌떡 일어나며 그리 명령하자 레이도 곧장 벌떡 일어났다.

레이가 벌떡 일어서자 코앞에서 옛날에 봤던 그 물건을 마주 보게 된 세바스가 기겁하며 뒤로 넘어갔다.

첨벙!

"커헙...! 어푸!"

뒤로 자빠져서 혼자서 쇼를 하며 물을 먹은 세바스가 켁켁거리다 뒤늦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분위기가 다 깨져버린 하비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야, 다시 앉아."

"옙."

"하..."

고민하던 하비가 혀를 몇 번 차더니 레이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우리 기수 중에 남부 출신 애들이 분위기가 좀 안 좋기는 해."

"남부가 왜... 아..."

말귀를 알아들은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마족인 에리다누스가 행한 워프게이트 습격 사건 이후.

당대의 황제는 습격 사건에 엮인 남부 쪽 관계자들을 크게 질책하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갔다.

물론 남부 쪽 가문 몇 개가 완전히 주저앉긴 했지만 정말 최소한의 조치에 가까웠다.

이후 포이보스가 황제가 되며 갈등이 일시적으로 봉합되긴 했으나, 정치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완전히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보니 남부 출신인 이지스 생도들도 분위기가 좋을 수가 없었다.

주변의 시선은 둘째치고, 이지스에서 졸업 후 높은 자리에 배정받기 힘들다는 소문도 돌고 있는지라 이래저래 좀 어수선했다.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네.'

지역과 출신, 그로 인한 갈등들.

일단 한 번 갈등이 생기면 해결하기 쉽지가 않은 법이었다.

레이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고민하고 있자니 이번엔 하비가 레이의 팔을 툭툭 쳤다.

"넌 근데 이 흉터는 어쩌다 생긴 거냐?"

"예전에 악마숭배자와 전투가 있었습니다. 고위 마법이 머리 위로 떨어져서, 그거 빗겨 쳐내느라 팔 하나를 통째로 날려 먹을 뻔했죠."

공간검으로 공간 왜곡까지 일으켜서 위력을 반감시켰는데도 몸을 절반 가까이 태워 먹었었다.

그때를 상기하면 레이도 꽤 아찔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반면에 세바스와 하비는 굳은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이 새끼 이거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리네, 딱 그런 표정이었다.

하나하나 따져볼까 고민하던 세바스가 귀찮다는듯 손을 휘저었다.

"그만 나가 봐. 괜히 여기 있던 거 다른 애들한테 들켜서 한 소리 듣지 말고."

"예, 감사합니다, 선배님들."

레이가 고개를 꾸벅 숙이곤 물속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또 레이의 아랫도리를 코앞에서 마주보게 된 세바스가 욕설을 토했다.

"아니 시발 좀! 그 좆같은 것 좀 그만 들이대!!"

"..."

레이는 몸을 좌우로 흔들어 거시기 털에 묻어 있는 물을 세바스를 향해 털어볼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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