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레이는 성검을 쥐려는 요하나를 별생각 없이 지켜봤다.
요하나를 지켜보는 다른 이들의 태도도 레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지스의 다른 생도들은 '이야기 속의 영웅이 혹시 나는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으면서도 남에겐 그리 관대하지 못했다.
애초에 성검을 뽑기 위해선 '최소한의 역량'을 갖춰야 한다.
역대 성검의 소유자들도 갓난아기 때부터 성검을 뽑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요하나가 설령 미래의 영웅이라 해도 최소한의 역량을 갖추려면 아직 멀었...
덜컥!
"?"
"?"
"?"
치솟는 당혹 속에서 모두의 시선이 요하나를 향해 콱 쏠렸다.
단상처럼 솟아오른 바위 위에 박힌 성검이 요하나의 손에 쥐인 채 덜컥거리고 있었다.
얼을 타던 주위의 기사들이 뒤늦게 거대한 방패를 들어 요하나와 생도들의 주변을 감쌌다.
그로 인해 구경꾼들의 시야가 가려져 버렸지만, 기사들이 방패를 든 것은 주변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성검이 뽑히면 그 아래 고여있던 막대한 신성력이 터져 나온다.
역사서에 따르면 거의 폭발하듯 비산한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로인해 발생한 풍압만 해도 민간인을 상대로는 충분한 살상력을 지녔다.
성검이 뽑히는 순간 피를 볼 생각이 아니라면 방패를 들어 주변을 휩쓸 후폭풍을 경감시켜야 했다.
한편, 요하나는 성검이 덜컥거리기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검을 흔들어 보았다.
덜컥! 덜컥!
성검이 덜컥거릴 때마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어깨도 같이 덜컥거렸다.
요하나는 쾅쾅 뛰는 자신의 심장의 소리를 들으며 성검을 위로 뽑아 올리듯 힘을 주었으나...
이내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성검이 흔들리긴 했는데 어째 뽑혀 나오진 않았다.
요하나는 처음엔 혹시 성검이 망가질까 두려워 힘을 약간만 주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최선을 다해서 성검을 당겼다.
허나 성검은 끝까지 땅에 박힌 채 그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지 않았다.
레이가 덜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교관, 넬슨에게 물었다.
"성검이 원래 저렇게 덜컥거립니까?"
"..."
넬슨이 말없이 레이를 돌아봤다.
성검이 녹슬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대체 왜 제자리서 덜컥거린단 말인가.
넬슨의 표정만 보아도 답변이 되었기에 레이는 굳이 다시 물어보지 않았다.
"후..."
마침내 요하나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성검을 손에서 놓았다.
생도들이 하나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뽑아야 하는데 선수를 뺏길 뻔했네! 다들 그런 말도 안 되는 유치한 생각을 조금씩은 품고 있었다.
레이 또한 성검 뽑을 수 있다고 그리 유세를 부려놨는데 개쪽 당할뻔 했다며 내심 안도했다.
요하나가 비켜서자, 생도 번호 302번이 긴가민가하는 기색으로 성검 앞에 섰다.
땅에 박힌 성검이란 게 과연 원래 덜컥거리는 것일까? 302번은 그럴 것이라 믿었다.
나라면 혹시 덜컥거리는 걸 넘어 성검을 뽑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가지고 성검을 잡아 당겼다.
"..."
"..."
"..."
성검은 덜컥거리지 않고 고고하게 그 자리를 지켰다.
302번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할 때까지 근육에 힘을 주어봤지만 성검은 냉정하게 302번의 손길을 거부했다.
결국 단 한 번의 덜컥임도 이루지 못한 302번이 실망 가득한 기색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상황이 그리되니 다들 요하나를 다시 돌아봤다.
요하나도 '저거 원래 덜컥거리는 거 아니었어?'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깜박였다.
이윽고 남은 생도들이 순서에 따라 성검을 손에 쥐었다.
요하나 이후로 덜컥이는 소리는 단 한 번도 생도들의 귓가를 울리지 못했다.
요하나만이 특별했다는 것을 깨달은 생도들이 복잡한 기분을 드러내며 입술을 씹었고, 그에 반해 요하나는 묘하게 상기된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328번까지 성검을 뽑아내는 데 실패하고 마침내 레이의 차례가 되었다.
주변의 관심이 훅 올라갔다.
생도들 대부분은 레이가 정체가 불분명한 미친놈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능력만큼은 확실히 궤를 달리한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레이가 터벅터벅 앞으로 나가 성검에 손을 뻗었다.
흡사 자석에 이끌린 금속처럼, 레이의 손아귀가 성검의 검 자루에 촥 감겨들었다.
*
레이가 성검을 손에 쥐었다.
무언가가 일체화되는 감각이 일순 레이를 휘어잡았다.
레이는 자신에게 알기 힘든 정보가 흘러드는... 혹은 각인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음...'
정보에 가까운 무언가가 휘몰아치며 레이의 뇌리를 쿡쿡 찔렀다.
레이는 그를 통해 성검이 어떤 절차로 작동되는가에 대해 일부 인식했다.
'더럽게 어지럽네...'
레이가 접한 정보는 개념이나 형식이 굉장히 추상적이었다.
인간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이었고, 때문에 레이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면서도 흘러드는 정보를 최대한 단순화해서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다.
성검. 성검은 아티펙트란 카테고리에 부합하는가?
이건 인간이 주조한 검이다. 허나 그 안에는 막대한 초월자의 권능이 깃들어 있었다.
결국 성검의 본질은 검이란 형상 안에 깃든 권능의 덩어리였다. 아티펙트라 칭하기는 어려웠다.
성검을 쥘 자격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조건은 여러가지였다. 하나의 조건이 충족될 때마다 파편화된 자격이 부여되고 성검의 기능이 차례차례 해방된다.
단순한 역량, 목적의 순수성과 방향성, 그것 외의 잡다한 기준들.
이와 같은 미리 설정된 값에 부합하는 개체일수록 성검에 대한 더 많은 권한을 획득할 수 있었다.
레이가 만약 뽑아서 가져다준다면, 에른스트 또한 성검의 기능을 웬만큼은 이끌어낼 수 있을 터다.
요하나가 성검을 손에 쥐었을 때 덜컥인 것은 요하나가 비교적 많은 부분에 있어서 '조건'을 충족했기 때문이었다.
600년 전 하르시아 또한 성검을 자유롭게 사용 가능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다만 하르시아는 성검을 사용 가능했음에도 전장에서 손에 쥐지 않았다.
이는 성검의 특성 때문이었는데, 성검이 지닌 대부분의 기능은 신성력을 다루는 존재에게 도움이 되도록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평범한 검사 입장에도 성검이 최상위 아티펙트에 비견되는 물건임은 맞다.
허나 600년 전에는 성검의 기능을 완전히 끌어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인물이 당대의 팔라딘이었기에 하르시아는 팔라딘에게 성검을 양보했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레이가 의문을 품었다.
레이는 지금 당장에라도 성검을 뽑을 수 있었다.
그게 과연 레이가 모든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인가? 아니, 달랐다.
성검을 사용할 때 자격이나 조건 같은 요소를 일부 무시 가능한, 시스템적으로 상위의 '키'를 가진 존재들.
그런 '선택받은 존재'들이 세상에 일부 존재했다.
그리고 레이는... 그 존재 자체가 일종의 마스터 키에 가까웠다.
초월자로부터 선택 받아 환생한 레이는 모든 전제 조건을 무시하고 성검을 사용 가능했다.
갓난아기 때 성검을 쥐었어도, 성검이 뽑혔을 터다.
'이걸... 흥미롭다고 해야 하나...'
성검은 완벽히 짜여진 시스템 속에서 구동됐고, 레이처럼 마스터 키를 활용해 조건을 우회할 방법은 존재했지만 시스템의 설정 값을 변경하는 식의 중간 개입은 불가능했다.
설령 성검을 창조한 초월자가 개입하려 한다 해도 성검은 독립된 시스템 속에서 움직일 것이다.
'날 이곳에 보낸 존재는 확실히 전지전능과는 거리가 멀군.'
성검이란 신기를 하나 내려보내는데도 제약이 덕지덕지 붙었다.
이것이 과연 전지전능한 존재들이 유희를 즐기기 위해 스스로 제약을 붙인 것일까.
아니면 신을 표방하는 존재들이 지니고 있는 근원적 한계 때문일까.
레이는 알 수 없었다.
고민해봤자 답이 안 나오는 이야기였기에 레이는 고개를 한 번 젓고 말았다.
'나한테 지금 중요한 건 이걸 당장 뽑냐 안 뽑냐인데...'
당장 뽑아서 이득 볼 게 있을까?
사실 제국 수호 훈장만 해도 명성을 떨치는 데는 충분했다.
물론 성검까지 뽑는다면 명성이야 치솟겠지만 제국은 좀 곤란해할 것이다.
수명이 3년 남은 용사를 제국민들에게 내세워봤자 레이가 죽고 나면 논란만 생길 게 뻔했다.
레이 입장에서도 황실 눈 밖에 나면서 무조건 명성만 올려봤자 실속이 없었다.
숨겨야할 게 있는 입장에서 생전에 너무 유명해지면 그것대로 리스크가 커졌다.
"..."
레이는 한숨을 삼켰다. 고민의 종착점엔 언제나 '레아'라는 존재가 서 있었다.
당장 성검을 뽑기보다 추후 황실에서 황실의 드래곤 하트를 주니 안 주니 간을 볼 때 협상 카드로 올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이러나 저러나 레이는 한 가지는 확신했다.
'이건 부르면 진짜 온다.'
레이의 존재 자체가 마스터 키에 가까웠기에 성검과 한 번 접촉한 이상 무조건 레이의 명령이 우선됐다.
'근데 신성력이 없는 내가 성검의 기능을 전부 개방한다 해도 상처 치유나 부정한 기운을 몰아내는 용도 외엔 큰 쓰임새는 없을 것 같고...'
하르시아가 왜 팔라딘에게 성검을 양보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물론 레이가 성검을 손에 쥐면 고위 성직자 하나를 대동하고 다니는 수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그 외의 이점이라면... 성법에 대한 완전 내성.
레이의 존재에 성검까지 더해지면 성법으로 레이를 구속하거나 해치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한 레이는 일단 성검을 그대로 두고 손을 놓으려고 했다.
어차피 이거 부르면 날아왔기에 생각이 바뀌면 접근하지 않아도 허공에 손만 뻗으면 됐다.
한편, 생도 번호 330번 아론은 레이 뒤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레이는 집중하느라 자각하지 못했지만, 레이가 성검을 손에 쥔 이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레이가 덜컥거리지도 않는 성검을 한참 동안 잡고 있으니 다음 차례인 아론은 짜증과 조바심이 몰려왔다.
결국 참다못한 아론이 레이에게 다가가 한마디 했다.
"야, 그만 비키지?"
"..."
"야, 내 말 안 들려?"
아론이 인상을 찌푸리며 레이의 어깨를 좀 강하게 밀었다.
그러자 균형을 잃은 레이의 몸이 잠깐 옆으로 기울어졌다.
스릉!
"?"
"?"
"?"
*
레이가 고민을 끝내고 물러서려던 차.
아론이 갑자기 어깨를 밀치자 한참 집중하고 있던 레이는 균형이 흐트러져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참 부드럽게, 성검이 따라서 뽑혀나오려고 했다.
우웅-!!
성검이 박혀 있던 틈 속에서 액체처럼 고여 있던 신성력의 덩어리가 요동쳤다.
성검이 1/3 쯤 뽑혀나온 순간, 레이는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성검을 다시 꽂아넣기 위해 팔을 움직였다.
허나 한 번 자극받은 신성력의 덩어리는 곧장 성검을 밀어내고 하늘로 치솟아 오르려 했다.
레이가 온갖 쌍욕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지면에 발을 밀착시키고 성검을 찍어 눌렀다.
드드드득!!!!
막대한 힘이 부딪침과 동시에 성검이 위아래로 요동쳤다.
이빨을 꽉 깨문 레이가 코어와 서클을 활성화시키며 손아귀를 말아쥐었다.
주변의 온도가 확 낮아짐과 동시에 레이의 등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었다.
"끄으으윽...!"
레이는 정말 최선을 다해 성검을 찍어눌렀다.
결국 요동치던 신성력의 덩어리가 힘에서 밀려 아래로 가라앉았다.
캉!!
성검이 다시 땅으로 박혀드는 소리가 참 맑게 울렸다.
부르르 떠는 성검의 울림이 완전히 멎을 때까지, 레이는 한참 더 성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마침내 성검의 울림이 완전히 멎었다.
레이가 식은땀으로 푹 젖어있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모두가 괴상한 표정을 한 채 레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고민한 레이가 뒤늦게 하하 웃었다.
"하, 시발... 이게 안 뽑히네."
"..."
분위기가 참 적막했다.
레이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아론을 돌아보았다.
아론이 흠칫 놀라 뒷걸음질치자 레이가 이리 오라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야."
"..."
한숨을 길게 내쉰 레이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성검 모서리에 대가리 찍혀 볼래? 왜 갑자기 밀치고 지랄이야?"
아론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가 공손히 답했다.
"어, 어... 죄송합니다."
*
이지스의 학교장은 전통적으로 은퇴한 로얄가드, 그중에서도 젠트리 태생이었던 자가 맡았다.
현 이지스 학교장인 카르민은 기다리던 손님이 도착했다는 소식에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마 안 가 노크 소리가 들려 응답하니 사무원이 문을 열고 손님을 집무실 안으로 안내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카르민은 의자에 앉아 다시 한 번 상대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리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리아 알슈테인 경."
사실 세리아라고 하면 로얄가드와는 악연이 있는 인물이었다.
허나 시간이 꽤 오래 지난 일이었고, 과실은 전적으로 황실 쪽에 있었기에 카르민은 표정을 풀고 웃음을 머금었다.
이지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