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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30화 (230/446)

230화

자기소개가 끝나고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쯤.

레이는 구석에서 혼자 술을 홀짝거리다 2급 생도들에게 불려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참동안 훈계 비스무리 한 것을 들은 레이는 2급 생도 중 한 명인 로안에게 이끌려 주점 안을 돌아다녔다. 입학시험 때 까불었던 거 사과하러 말이다.

'시발...'

레이는 기분이 참 뭐했지만, 사회생활한다 생각하고 축 처진 얼굴로 로안을 따라다녔다.

여기저기 사과를 건넨 끝에 레이는 마침내 45번, 아론과 마주했다.

레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입학시험 때는 죄송했습니다."

"...?"

아론은 굉장히 떫은 표정으로 레이를 쳐다보다가 옆을 돌아봤다.

레이 옆에는 2급 생도인 로안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기서 아론이 레이에게 '꺼져, 씹새꺄' 따위의 분풀이를 하면 로안도 같이 엿 먹이는 꼴이 되었기에, 아론은 어쩔 수 없이 레이와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반강제로 화해가 성사된 뒤 레이가 자리로 돌아오자 2급 생도 하나가 불쑥 물었다.

"야, 근데 그 30 미터 검기는 무슨 소리냐?"

"아... 1차 시험 때 검기를 좀 길게 뽑아냈는데 그게 와전되어서 퍼진 것 같습니다."

"부러진 직검은 또 뭐야?"

"토너먼트 진행 도중 검신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심사관님이 무기 교체를 권하셨는데 제가 그대로 토너먼트를 진행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일이 와전된 것 같습니다."

"아, 그래?"

2급 생도들이 '그럼 그렇지'를 중얼거리며 저들끼리 낄낄 웃었다.

3급 생도들은 3급 생도들끼리 서로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레이가 말 그대로 반 토막이 난 검을 들고 설쳤다고 여기서 일러바치기엔... 뭔가 좀 거북했다.

레이가 생도들의 생활을 파악하기 위한 비밀 교관 같은 게 아닐까 의심하는 의견도 있지 않았던가.

레이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3급 생도들 사이에서 눈치 싸움이 좀 더 이어질 전망이었다.

어쨌든, 나름대로 들뜬 분위기 속에서 술자리가 막바지로 향했다.

레이는 선배들의 술잔에 열심히 술을 채우면서도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3급 생도들이나, 2급 생도들이나... 레이의 생각보다도 훨씬 화기애애하게 서로 잘 어울리고 있었다.

잘 뜯어보면 묘한 기류가 흐르는 곳도 몇 군데 있었지만, 사람이 모이다 보면 그런 게 아예 없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레이가 로안의 잔에 술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제가 감히 질문 하나를 선배님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어? 어, 그래, 한 번 해봐."

완전히 하대하는 로안의 태도에 레이는 감격해서 몸을 부르르 떤 후 또박또박 물었다.

"저는 신분 때문에 불편해하시는 선배님들이 많이 계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들 잘 대해주셔서 놀랐습니다. 이지스 분위기가 원래 이렇습니까?"

"..."

꽤나 민감한 질문에 로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술 기운도 올랐겠다, 굳이 자리를 박찰 만큼 불쾌하진 않았기에 로안은 인상을 펴며 레이에게 되물었다.

"너 평민이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평민, 평민... 하아, 평민 놈들이 워낙 독해야지."

로안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평민 녀석들이 독하다.

로안은 그리 표현했지만 그 문장 하나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애당초 평민 신분으로 이지스 입학에 성공했다는 것 자체가 재능 만큼은 이지스에서도 정상급에 가깝다는 의미였다.

처음엔 성적이 좀 처지더라도 제대로 된 지원을 받고 난 이후엔 단숨에 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인재들이었다.

로안은 독하다고 돌려 말했지만, 그 말은 결국 이지스에 입학하는 데 성공한 평민놈들은 재능부터가 유난히 뛰어나다는 소리였다.

거기다 3년 정도 같이 생활하며 지지고 볶다 보면 이래저래 동료애같은 게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지스 내에서 노골적인 신분 차별이 힘든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황실과 관련되어 있었다.

황실은 기반, 혹은 저변이라 부를만한 게 부족한 인재를 좋아했다.

이미 배가 부른 자에겐 충성을 얻어내기 어렵다.

설령 겉으로는 충성을 얻어냈다고 해도 마음속 깊이까지 상대를 복속시키고 황실과 일원화시키기는 정말로 어려운 법이었다.

그렇기에 황실은, 신원만 확실하다면 신분과 배경이 부족한 인재일수록 도리어 환영하는 경향이 강했고, 또한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리 황실이 원하는 바가 있다보니 노골적인 신분 차별이 이지스 내에서 행해지면 윗선에서 꽤 강경하게 개입이 들어왔다.

처음엔 신분을 나누며 선을 긋는 데 급급했던 이지스 생도들도 계속 압박을 받다보면 반강제로 융화될 수밖에 없었다.

도리어 고위 귀족가의 자제들이 겉도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은 결국 '나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용을 돌려 돌려 얘기한 로안이 역으로 의문을 드러냈다.

"우리들이야 뭐... 3년 동안 같이 지낸 동기니까 가까워졌다고 해도... 신입생 때는 다들 신분 문제로 꽤 날카롭게 굴거든?"

귀족, 젠트리, 그리고 평민.

젠트리까지는 허용해준다고 해도, 평민 쯤 가면 사람 취급 안 하려는 경우도 생겼다.

적어도 로안이 입학했을 당시 신입생들의 분위기는 그랬다.

"..."

로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3급 생도들은 큰 견제나 신경전 없이 다들 함께 낄낄거리며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로안이 신입생이었던 시절 동기들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교관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로안의 기수가 유별난 게 아니라 이번 신입생들의 기수가 유별난 것이었다.

"...너희 기수는 좀 특이하네. 성격이 유별나."

로안은 이번 신입생들의 성격이 유별나다고 평했지만, 일이 이렇게 된 건 이번 신입생들의 성격이 좋아서가 결코 아니었다.

이건, 레이가 혼자 날뛰어대며 모든 악의와 어그로를 홀로 끌어모았기에 성사 가능했던 평화였다.

본디 인간이란 '적'이 존재해야 손을 맞잡는 법이었으니까.

레이가 중얼거렸다.

"악역은 익숙하니까..."

"지금 뭐라 했어?"

"예? 아, 취기 때문에 정신이 좀 멍해서, 혼잣말을 했나 봅니다."

"뭘 벌써 엄살을 부려. 받아야 할 잔이 많은데."

레이는 다시 굽실거리며 선배들과 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2급 생도들은 환영회에서 레이가 바지를 먼저 벗었다고 해서 교류회가 시작될 때만 해도 레이를 경계했지만, 레이가 꾸준히 저자세로 나오자 흡족해하며 술을 따라주었다.

레이가 술을 또 한 잔 들이키며 물었다.

"그, 성검은 언제 뽑습니까?"

"어허, 이 새끼가... '뽑아'? 어디 건방지게..."

"아,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실언을 정정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앞으로 조심해. 다시 말해봐."

"성검을 언제 잡아볼 수 있을까요?"

"입학식 끝나고 거의 바로? 앞으로도 몇 번 만져볼 기회가 있을 거야."

입학식 때 한 번. 빨갱이에서 퍼랭이로 넘어가기 직전이나 직후에 한 번.

그 이후에도 몇 번 더 잡아볼 기회가 있었다.

성검이란 게, 처음엔 뽑지 못하더라도 스스로를 갈고 닦고 쌓았던 죄를 참회하면 그제야 응답해주는 경우가 역사적으로 꽤 있었다.

여기 있는 2급 생도들 중에서도 언젠가는 성검을 뽑아보리라고 의지를 다지고 있는 자들이 몇몇 있었다.

이야기를 알아들은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

이틀 뒤.

이지스 신입생들의 입학식이 다가왔다.

레이, 요하나, 그리고 데런은 하루 전날 에른스트와 인사를 끝내고 미리 황도 인근에 숙소를 잡아 대기하고 있었다.

해가 뜨자 레이는 이지스 생도의 정복을 차려입고 길을 나섰다.

날씨가 쾌청했다. 이런 행사가 있는 날엔, 설령 날씨가 쾌청하지 않았다고 해도 황도를 감싸는 배리어를 생성해 비를 막았을 터다.

입학식은 황궁 앞에서 이루어졌다.

황궁 앞에 하나둘 모인 생도들의 숫자가 마침내 서른 명이 되었다.

이지스 교관이 생도들에게 입학식 절차에 관해 다시 한 번 설명해주었다.

그로부터 2시간 뒤에 본격적으로 입학식이 시작됐다.

학교장에게 인사하고, 황실과 제국의 안녕을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고, 높으신 분들의 연설도 듣고.

연설이 특히 길었다.

누군가는 단상에서 제국의 역사를 나열하고, 누군가는 단상에서 위국헌신과 관계된 정신을 부르짖었는데, 레이에겐 이래저래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학 신고 차례가 되었다.

입학 신고는 본디 입학 시험 수석이 맡아서 했다.

이번 기수 수석은 다름 아닌 요하나였다.

"신입 생도 29명은 요하나 생도가 지휘한다."

"...!"

요하나가 엄청 긴장한 기색으로 단상 앞으로 나서자 레이는 괜히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이를 꽉 깨물었다.

사실 요하나 입장에선 이리 많은 사람들 앞에서, 더군다나 제국의 실세 다수가 지켜보고 있는 자리에 대표로 나서서 말 몇 마디 한다는 게 그리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입학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요하나는 중압감 탓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자기 할 일을 다했다.

그렇게 입학식은 별 탈 없이 무사히 마무리 되었다.

입학식이 끝나자 다들 긴장이 풀린 얼굴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입학식 후에 생도 번호를 새롭게 부여받았는데, 수석인 요하나가 1번이고 차석인 아론이 30번이었다.

가장 우수한 자가 앞에서 이끌고, 두 번째로 우수한 자가 뒤를 지켜라... 뭐 그런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 교관이 설명해주었다.

생도 번호 가장 앞자리엔 '급'이 붙었기에, 정확히는 요하나가 301번이고 아론이 330번이었다.

그리고 레이는 329번이었다.

이후 입학생들은 기숙사로 안내되었다.

제국 최고의 인재들이 머무는 기숙사인 만큼 시설은 좋았으나 전반적으로 삭막했다.

공간은 넉넉했지만 2인 1실이 기본이었다.

레이는 배정된 숙소로 들어와 짐을 내려놓은 후 자기 얼굴을 쓸어내렸다.

막상 군시설 비스무리한 곳에 들어오니... 진짜 존나 있기가 싫었다.

전생의 PTSD가 발작하는 느낌에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내가 잠깐 미쳤나...?'

아무리 짧은 기간이라 해도 이세계 군복무를 선택하다니.

레이가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끙끙거리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쥬세핀이었다.

"..."

"...히익!"

레이를 보고 눈을 껌뻑거리던 쥬세핀이 뒤늦게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치다 넘어졌다.

레이는 더욱 머리가 아파졌다.

제국이 미치지 않고서야, 혹은 레이가 환생한 곳이 아타다까이하고 야사시한 라노벨 세계가 아니고서야 사관학교에서 하나의 방에 남녀를 밀어 넣을 리가 없었다.

레이가 귀찮다는 얼굴로 손을 휘휘 저었다.

"방 잘못 찾아왔다."

애초에 남자와 여자가 사용하는 기숙사의 층이 달랐다.

레이가 생각하기에 쥬세핀은 맹하게 앞사람 따라가다가 계단을 한 층 더 올랐을 게 뻔했다.

쥬세핀은 뒤늦게 엉덩이를 질질 끌며 뒤로 물러나 방 호수를 확인하더니 방문을 쾅 닫았다. 사과는 없었다.

"..."

잠깐의 정적 후.

다시 방문이 열렸다. 45번, 부러진 직검의 희생양 중 하나였던 아론이었다.

레이는 같은 방을 이용해야 하는 동기에게 예의 상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잘 부탁드립니다."

"..."

보기 좋게 무시당했다.

레이는 너 꼴리는 대로 해보라는 심정으로 어깨를 으쓱인 후 남은 짐을 정리했다.

짐을 정리할수록 전생의 군대 생각이 떠올라 레이가 혼자서 몸을 비틀어대는데 복도에서 큰 목소리가 울렸다.

"10분 뒤에 중앙체련관으로 집합한다. 다시 전한다. 10분 뒤다."

목소리의 주인은 3급 생도 총괄 담당 교관인 넬슨이었다.

노인이라 불러도 무방한 나이의 넬슨은 그 기세만큼은 칼처럼 날카로운 자였다.

생도들은 방을 정리하거나 휴식을 취하다 말고 황급히 겉옷을 다시 입었다.

중앙체련관까지 거리가 꽤 있기에 바로 움직여야 했다.

10분 뒤, 생도들이 중앙체련관 앞에서 조용히 열을 맞춰 나열해있자 넬슨이 짧게 명했다.

"따라와라."

모두가 넬슨의 뒤를 따르며 상기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어린 시절, 성검이나 신검을 뽑아 영웅으로 추대되는 망상을 한 번씩은 해보았다.

물론 성검을 뽑는다고 당장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이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성검은 어린 날의 추억을 함께한 존재이자 욕망보다 더 근원적인 무언가를 자극하는 신기였다.

손에 한 번 쥐어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들뜨지 않는게 이상했다.

마침내 이지스에 입학한 신입생이자 3급 생도들이 교관의 인도에 따라 성검이 꽂혀 있는 광장에 도착했다.

넬슨이 광장을 지키는 기사들에게 신원확인 절차를 밟은 뒤 생도들을 돌아보았다.

"번호 순으로, 앞으로 나와라."

301번인 요하나가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다른 생도들과, 교관과, 주변의 구경꾼들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성검과 요하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반짝반짝, 아름답고 성스럽게 빛나는 성검을, 요하나 또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손에 쥐었다.

손에 쥐고 당긴다고 해도 당연히 뽑히지는...

덜컥!

"?"

"?"

"?"

이지스 (5)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