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29화 (229/446)

229화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로 귀환한 뒤.

에른스트의 호출을 받은 레이는 이지스 생도들의 정복을 입은 채 에른스트의 집무실 앞에 섰다.

노크를 하지 않았지만 집무실 안에서 에른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거라."

레이가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

"..."

잠깐 정적이 흘렀다.

레이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려보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후작님."

"..."

에른스트는 눈앞의 새끼가 지금 누가 먼저 인사하나 기싸움을 했다는 걸 깨닫고 진지하게 허리춤에 찬 검을 매만졌다.

허나 에른스트는 초인다운 인내심으로 표정을 풀고 집무실 한편에 정렬된 아티펙트들로 눈을 돌렸다.

"폐하께서 네게 하사하신 무장들이다. 온전히 네 것이고, 문제가 생긴다면 황실에서 도움을 줄 것이다."

레이는 사양 않고 진열된 아티펙트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아티펙트의 숫자는 총 넷이었다.

레이는 갑주 형태의 아티펙트를 먼저 살펴보았다.

드래곤 하트를 동력원으로 사용한 영향인지 아직 제대로 가동시키지 않았음에도 세찬 마나의 기류가 느껴졌다.

에른스트가 레이 곁에 서서 입을 열었다.

"이 무구들 전부가 드래곤하트의 조각을 동력원으로 삼는다."

드래곤하트의 조각은 반영구적인 동력원에 가깝다.

드래곤하트는 출력도 뛰어났고 부피 대비 마나를 다량 축적할 수 있었기에 아티펙트의 동력원 중 이와 비견되는 성능의 물질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에른스트가 레이에게 서류 더미를 건넸다.

아티펙트의 제원과 매뉴얼이 기록된 설명서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레이는 서류를 간단히 살피고 잠시 서랍장 위에 올려두었다.

4개의 아티펙트는 전부 광학 위장 기능까지 갖춘, 제국에서도 최상위 아티펙트였다.

동력원까지 드래곤하트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자체 성능만큼은 따라올 아티펙트가 몇 없을 터다.

레이가 갑주 형태의 아티펙트를 가볍게 두드려 보았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뭐... 감사히 받겠습니다."

좀 건방진 태도이긴 했으나 에른스트는 타박하지 않았다.

레이는 단창 형태의 아티펙트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이지스에는 못 들고가서 아쉽네요."

에른스트가 레이를 따라 웃더니 손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마나로 인해 발생된 풍압이 레이의 품속에 있던 훈장을 밖으로 빼냈다.

훈장을 잡은 에른스트가 레이의 왼편 가슴에 훈장을 패용해주며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네 공적을 언제든지 공개해도 된다. 제국은 너의 이름을 기꺼이 칭송해줄 것이다."

레이의 고집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다.

에른스트도 레이가 공적을 감추려하는 사유에 상당 부분 동의하기는 했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레이는 에른스트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눈 뒤 설명서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

에른스트의 집무실에서 나온 뒤.

레이는 복도를 걸으며 훈장 위에 카렌이 주었던 브로치를 착용해 보았다.

브로치를 착용하니 훈장이 완전히 가려졌다.

훈장의 크기가 작은 게 아니라 브로치 크기가 커서 그런 것이었다.

레이는 괜히 혼자서 낄낄거렸다.

브로치의 크기가 컸던 이유는 카렌의 부족한 실력으로는 크기가 작은 브로치에 제대로 된 축성 작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카렌은 결국 좀 과하다 싶은 크기의 브로치를 선택해야했는데, 레이는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의 카렌이 했던 고뇌가 예상되어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레이는 브로치에서 발산되는 은은한 기운을 느끼며 훈련장에 들렀다.

레이가 에른스트에게 호출되기 전에는 훈련장 안에 요하나와 데런만 있었는데, 레이가 에른스트의 집무실에 다녀오는 사이 스페라가 훈련장에 찾아와 있었다.

"스페라 님 오셨습니까?"

"아, 다녀왔나요?"

"예. 다들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레이가 그리 묻자 데런이 세상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형님, 장기자랑은 어떡하실 겁니까?"

"...장기자랑?"

"예. 입학식 전날에 해야한다고... 환영회에서 선배들이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아, 그런가?"

자기소개해야하니까 간단한 장기자랑 같은 거 미리 준비해둬라, 그런 식으로 누군가 언질을 준 기억이 있긴 했다.

레이는 애들 앞에서... 물론 신체 나이만 따지면 이지스 생도들보다 레이가 더 어리긴 했지만, 어쨌든 애들 앞에서 재롱을 부려야 할 걱정을 해야 한다는 게 참 서글프게 다가왔다.

그래도 당장은 참아야 했다.

레이가 굳이 완전히 신분을 감추고 이지스에 입학한 이유는 이지스 내부의 생활을 날 것으로 경험해보기 위해서였다.

물론 입학 시험 때 그 깽판을 쳐놔서 이젠 의미가 있다 싶었지만...

어쨌든, 데런은 레이와 달리 장기자랑을 어떻게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선배들에게 첫인상을 각인시키는 자리인 만큼 신입생으로서 경시할 수는 없었다.

데런이 레이에게 다시 물었다.

"형님, 형님은 어쩌실 겁니까?"

"글쎄? 마법이라도 보여줘야 하나?"

레이가 손가락 위로 작은 불꽃을 피워올렸다.

마법을 쓸 수 없는 데런이 축 처진 표정을 짓는 사이 스페라가 한 마디 했다.

"음... 그러면... 아마도 바보 취급 받을 걸요...?"

순화해서 바보이지, 기사가 서클을 만들었다면 대개 병신 취급 받았다.

레이가 공간검을 익혔으리라고 대체 어느 누가 예상하겠는가.

고개를 끄덕인 레이가 불꽃을 꺼트리며 데런에게 물었다.

"너는 뭐할 생각인데? 아직 아무것도 못 정했어?"

"음... 저는 그냥 평범하게..."

"평범하게, 뭐?"

"여장하고 춤이나 출까..."

"..."

레이가 곧장 정색했다.

"데런,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하면 반으로 접어버린다?"

레이의 전생에서 '여장'은... 말하자면 유행 다 지난 어르신들의 전유물 같은 거였다.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축제 때마다 유행했다고는 하는데, 레이는 어찌 그런 미개한 문화가 21세기에서도 유행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반면에 데런은 억울한 심정이었다.

적당히 허접한 여장은 무대의 반응을 이끌어내기에 굉장히 좋았다. 적어도 데런은 선배들에게 그렇게 충고받았었다.

데런은 요하나가 지급 받은 치마를 잠깐 빌려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레이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형님은 뭐하시게요?"

"그을쎄? 노래라도 불러야 하나?"

레이는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만약에... 내가 간다면...

저 새끼 목소리 뭐야? 하, 시발 술맛 떨어지게. 야, 저 새끼 빨리 끌어내려.

자기 미래가 예상이 간 레이는 미간을 쓱쓱 매만졌다.

안타깝게도 레이의 목소리는 그리 매혹적이지 못했다.

레이는 괜히 깝치지 말고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신나는 노래를 골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 요하나 너는?"

모두가 요하나를 돌아보았다.

요하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솔직하게 자신 없는 기색을 내비쳤다.

"잘 모르겠는데..."

"간단한 춤 같은 거 춰."

몸 쓰는 일은 다 잘하는 요하나였다.

물론 요하나가 춤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어차피 장기자랑에서 한 번 출 거 며칠 날치기로 배워도 충분했다.

레이의 시선을 받은 스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춤을 가르쳐줄 사람을 한 번 알아볼게요."

선배들에게 첫인상을 심어주는 자리였기에 열심히 준비해 간다고 나쁠 게 없었다.

요하나는 머쓱해하면서도 스페라를 향해 감사를 표했다.

*

입학식을 이틀 앞두고.

주점 하나를 빌려서 이지스의 2급 생도와 3급 생도 모두가 한 자리에 모였다.

교류회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행사는 공식 행사는 아니었지만 참여가 반강제되었다.

선후배끼리 미리 얼굴 좀 익혀 놓자는 취지였으니 아득바득 빠져서 좋을 것도 없었다.

주점에 모인 3급 생도 중에서는 레이가 입학 시험에서 보지 못했던 얼굴도 있었다.

특별 입학으로 입학한 자들이었는데 숫자는 다섯이었다. 레이는 그들을 그냥 얼굴만 대충 보고 말았다.

이내 3급 생도들의 자기소개 시간이 시작되었다.

3급 생도들은 차례차례 단상 앞으로 나가 자기소개를 했다.

자기소개가 끝나면 2급 생도들은 박수를 치며 장기자랑을 요구했다.

3급 생도들은 이런 식으로 남들 앞에서 재롱을 떨만한 기회가 살면서 별로 없었던지라 굉장히 낯부끄러워하면서도 장기자랑을 이어갔다.

춤이나 노래를 준비한 생도들이 가장 많았고, 현악기 같은 걸 준비해 연주하거나 카드를 사용해 그럴 듯한 손장난을 보여주는 생도들도 있었다.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2급 생도들은 낄낄 웃으며 박수를 쳤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3급 생도들도 금방 분위기에 동화됐다.

분위기가 고조되는 와중에 데런의 차례가 되었다.

데런은 자기 소개를 끝내고 잠깐 단상 아래로 내려가더니 가발을 쓰고 치마를 입은 채 단상 위로 올라왔다.

레이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아, 저 병신이..."

레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다들 폭소를 터뜨리는 와중에 데런이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보았다. 그 깜찍한 재롱에 2급 생도들이 좋아서 자지러졌다.

그후로도 여장이나 분장을 하고 분위기를 띄우는 생도들이 몇 명 더 있었다.

그때마다 2급 생도들은 특히 크게 환호하며 술잔을 마주쳤다.

요하나 차례가 되어 요하나가 단상 위에 올라가자 박수 소리가 커졌다.

다들 요하나가 이번 기수 수석임을 알고 있었다.

요하나는 자기 소개를 한 뒤 며칠 동안 배웠던 가벼운 춤을 선보였다.

몸을 쓰는데는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요하나답게 짧게 배웠던 춤임에도 굉장히 느낌 있었다.

요하나는 3급 생도들 중에서도 나이가 굉장히 어렸고 겉보기도 귀여운 소녀였기에 요하나를 지켜보는 모두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맺혔다.

계속해서 자기소개가 이어진 끝에 레이의 바로 직전인 쥬세핀의 차례가 되었다.

쥬세핀은 쑥쓰러워 하면서도 자기 할 일을 다했다.

장기자랑으로는 바이올린을 닮은 현악기를 하나 가져와서 켰는데 레이가 듣기에도 실력이 썩 괜찮았다.

그리고 마침내, 레이의 차례가 되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존경하는 선배님들."

레이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자 2급 생도들은 흡족해했다.

자기소개를 끝낸 레이가 제자리서 말했다.

"노래 한 곡 불러보겠습니다."

곧장 야유가 터졌다.

"우우우!"

"야, 노래 부를 거면 치마라도 입고 해!!"

"성의가 없어, 성의가!"

2급 생도들이 짓궂은 말을 하며 낄낄 웃었다.

분위기 자체는 화기애애했다. 이 자리에서 행복하지 않은 건 레이 혼자였다.

레이는 그냥 30 미터 검기를 뽑아내볼까 고민하다가 포기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 유명한 멜로디 위에 전생에서 들었던 노래의 가사를 적당히 덧입힌 노래였다.

"led by the force of cosmic soul, I can-!"

"오오~!"

반응은 꽤 좋았다.

레이가 노래를 잘 불렀다기보다는 그냥 분위기 띄우는데 괜찮은 노래였다.

지금 분위기에서 '만약에...' 같은 걸 시작했다간 그냥 끌려 내려왔을 터다.

그렇게 남들 앞에서 최선을 다해 똥꼬쇼를 한 레이는 지친 기색을 숨기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시발...'

내가 이러고 있을 짬밥인가 레이가 자괴감에 빠진 사이.

레이를 바라보던 2급 생도 중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했다.

'어디서 봤던 얼굴인데...?'

허나 당장 기억이 떠오르진 않았다.

고민하던 2급 생도는 그냥 옆자리의 친구와 술잔을 마주쳤다.

그렇게 큰 사고 없이 들뜬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교류회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쯤.

2급 생도 로안이 앞으로 나서서 두 손을 마주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 빨갱이들, 오늘까지는 즐기고, 입학식 때는 마음 단단히 먹고 몸 단정히 하고 오도록 해.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우렁찬 답변을 들은 로안이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입학식도 입학식이고... 다들 죄 지은 거 있으면 미리 참회하고 와."

로안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부정한 자가 성검 만지면 신벌 받는다?"

3급 생도들 사이에서 환희에 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지스 (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