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28화 (228/446)

228화

올해 이지스 입학 시험을 통과한 3급 생도들의 숫자는 총 25명.

그들 중 마지막으로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는 건물로 입장한 레이가 배정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레이 옆자리엔 신분차별자 뷰세... 아니, 쥬세핀이 앉아 있었다.

쥬세핀은 레이를 흘깃흘깃 바라보며 대놓고 불편한 티를 냈다.

사실 쥬세핀에게 있어서 가장 껄끄럽게 다가오는 것은 레이의 정체를 정확히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입학 시험 때 누군가의 추측대로, 레이가 생도들의 성격같은 걸 파악하기 위한 비밀 교관 같은 것이라면 아무리 기분이 상했어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와 반대로.

만약 레이가 정말로 희대의 천재라도 된다면 더더욱 무작정 날을 세우긴 어려웠다.

"..."

쥬세핀은 자신에게 그토록 끔찍한 굴욕을 안겨준 상대에게 친한 척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레이는 그꼴을 보고 머리가 아팠다.

'이런 은혜도 모르는 년을 봤나?'

입학 시험 때 레이가 쥬세핀에게 실력을 드러낼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쥬세핀은 분명 떨어졌을 것 아닌가.

레이가 인상을 구기고 쥬세핀을 노려보자 쥬세핀이 얼른 눈을 피했다.

그렇게 레이와 쥬세핀이 일방적인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됐다.

오리엔테이션의 첫 번째 순서는 수석과 차석 발표였다.

"수석, 요하나."

요하나가 사회자에게 지명되어 앞으로 나가자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박수를 쳐주었다.

요하나의 신분이 평민인지라 좀 고깝게 보는 시선이 있을만 했지만, 다들 눈을 빛내며 요하나를 향해 짧게 환호했다.

레이는 재차 '악역은 익숙하니까' 따위의 개소리를 중얼거렸다.

"차석, 아론 베르보."

요하나에 이어서 입학 시험의 차석, 아론이 사회자에게 호명되어 앞으로 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가는 아론을 보고 레이가 작게 감탄했다. 아론은 레이에게 부러진 직검으로 두들겨 맞은 45번이었다.

단상 위에 선 아론과 의자에 앉아있던 레이가 눈이 맞주쳤다.

아론의 목에 곧장 힘줄이 올라왔다.

레이가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자 아론은 제자리서 부들부들 떨며 경기를 일으키려 했다.

다행히 아론의 조금 남은 이성이 버텨주어 레이에게 달려들진 않았다.

수석과 차석을 향한 짧은 상찬이 끝난 뒤.

본격적으로 오리엔테이션다운 내용이 진행됐다.

이지스의 커리큘럼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일단 입학생들은 본인의 적성에 적합한 검술과 마나 정제법을 배울 기회를 얻는다.

권세 있는 귀족가에서도 접하기 어려운 수준의 최상위 검술과 마나 정제법이 생도들에게 제공된다.

그와 함께 생도들은 제국의 최정예 전투 집단에 어울리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담금질 되기 시작한다.

대기사전, 대마법사전, 대성직자전, 그밖에 전장에서 경험 가능한 모든 고급 병종들의 조합들을 어떻게 대적해야 하는지 배웠다.

또한 악마숭배자들과 관련된 기밀 자료의 열람이 허락되어 그 어떤 위험에도 대처 가능할 수 있도록 단련된다.

그렇게 6년 이상 걸려 기본기를 갖춘 제국의 최정예 인재들은 각자의 자리를 찾아 배속됐다.

이지스 생도들 중 많은 숫자가 황실 직속 기사단의 수습 기사로 배속되었다.

그곳에서 생도들은 스스로를 갈고닦아 더 높은 직위를 쟁취하거나 로얄가드로 선출될 수 있었다.

이지스 생도가 졸업 직후 로얄가드로 직행하는 경우는 굉장히 극소수였다.

물론 졸업생 모두가 기사단 소속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었다.

이지스 생도들 중엔 제국군의 고위 장교, 그중에서도 작전 참모 역할을 하는 직책 쪽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실전 투입이 가능한 스폐셜리스트들을 굳이 작전 참모 쪽으로 배속시키는 걸 의아해 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이유는 분명했다.

황도 내부에서 장기적인 전략을 구상하는 자들에겐 무력이 필요 없었지만, 전장에 직접 참여해 전술을 구상하고 조언하고 실행해야 할 참모들은 무력이 필수였다.

작전 참모가 그냥 머리만 좋은 일반인이라면 전장 위에서의 경호 난도가 미친듯이 치솟았다.

또한 이 세계의 전장에선 대규모 회전보다는 소규모 고급 병종들의 무력 충돌이 잦은 만큼, 실전을 직접 뛰어본 자가 아니라면 전장 상황을 오판하기 쉬웠다.

뭐 어쨌든 간에.

이지스 생도들이 제국 최고의 엘리트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그렇기에 황실은 이지스 생도들에게 많은 자원을 투자했다.

귀찮은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경우에 따라 이지스 생도들의 직계 가족 정도는 황도 내부나 인근에서의 생활을 보장받을 수도 있었다.

이에 관련된 자세한 설명이 오리엔테이션에서 이어지자 입학생들은 들뜬 얼굴로 사회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시간이 금세 흘러 오리엔테이션이 마무리되었다.

앞으로 6년 이상의 힘든 기간을 이겨내야겠지만, 그 기간을 잘 견뎌낸다면 모두 영화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이지스에 입학한 모두가 10년 정도는 옆을 돌아볼 틈도 없이 스스로를 혹사시킬 각오 쯤은 가지고 있었다.

그때,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단상 앞으로 걸어나왔다.

"자, 빨갱이들."

붉은 견장을 찬 3급 생도들을 '빨갱이'라고 부른 자는 어깨에 푸른 견장을 차고 있었다. 2급 생도였다.

입학생들을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맞추며 차렷 자세를 취했다.

입학생들에게 있어 직속 선배인 2급 생도는 어떤 측면에선 로얄가드보다도 어렵게 다가왔다.

2급 생도는 겉으로나마 군기가 바짝 든 입학생들을 보고 피식 웃었다.

"다들 따라와."

*

하루 동안 대여한 황도의 한 주점 안에서.

환영회에 참여한 2급 생도 몇 명이 신입생들을 기다리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 빨갱이 중... 하하."

2급 생도 한 명이 말을 하다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 모인 이들도 얼마 전까지는 퍼랭이가 아닌 빨갱이였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웃기게 다가오긴 했다.

"크음, 이번에 빨갱이 중 희한한 놈이 한 놈 들어왔다며?"

"소문이 무성하던데?"

이지스 입학 시험 내에서 벌어졌던 일은 원칙상으로는 외부 발설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2급 생도들도 정확한 정보가 아닌 소문에 의지하여 대화를 이어갔다.

"30 미터 검기... 뭐, 이건 과장일 테고. 그래도 정령사 상대할 때랑 토너먼트할 때 장난질을 좀 친 건 사실인 것 같더라."

"하하하... 미친놈이네."

"걔는 진짜 안 되겠다. 오늘 좀 밟아 놔야겠어."

과거에 사건 사고가 몇 번 있었기에 근래 이지스 신입생들의 환영식은 얌전히 진행하는 편이었다.

기합 잡는 거야 입학식 이후에 해도 되었고 말이다.

허나 자기 잘난 맛에 빠져 입학 시험 때부터 헛짓거리를 한 놈이 있다면 미리 기를 좀 죽여놔야 할 필요성은 있었다.

"누가 할래? 내가 할까?"

"아냐아냐, 내가 할게."

2급 생도, 로안이 답했다.

다른 2급 생도들도 로안이 나서자 어련히 잘할 것이라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쯤 빨갱이, 그러니까 신입생들이 우르르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가득 긴장한 신입생들이 어버버 얼을 타는 와중에 환영회가 시작됐다.

환영회는 간단한 자기소개부터 시작됐는데, 대다수 신입생들의 생각보다 환영회의 분위기는 상당히 부드러웠다.

얼마 가지 않아 신입생들도 긴장을 덜어내고 술잔을 들어 올리며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2급 생도들은 신입생들에게 빨갱이 빨갱이 거리면서도 썩 친근하게 이지스에서 겪었던 이런저런 썰을 들려주었다.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많았기에 신입생들은 흥미롭게 선배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쯤.

로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중에 '부러진 직검'이 누구야?"

"..."

술집 안에 갑자기 정적이 내려앉았다.

눈치를 보던 신입생들의 시선이 자연히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로안이 레이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너야? 일어나 봐."

레이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했다.

로안은 친히 레이 앞까지 다가가 레이를 빤히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하, 시발..."

다시 침묵.

얼음장처럼 굳어버린 공기 속에서, 로안이 레이의 뺨을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입학 시험 때 그렇게 깝죽거리고 다녔다녀?"

"죄송합니다."

"야... 이지스가 우습냐?"

"아닙니다."

"너 혼자만 잘났어?"

"아닙니다."

"여기 있는 놈들 중 천재라고 못 불려봤던 놈들은 아무도 없어. 근데 어디 방만을 떨고 있어? 눈에 뵈는 게 없지?"

"죄송합니다."

레이가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로안은 레이의 태도가 생각보다 깍듯하자 내심 만족하면서도 레이를 계속해서 갈궜다.

원래 이런 일은 한번 시작했으면 다른 녀석들한테도 제대로 주의가 되도록 끝을 봐야 했다.

약 10분 가량 질책을 이어간 로안이 낮게 깐 목소리로 명했다.

"탈의 실시."

"...예?"

"탈의 실시. 입고 있는 옷 싹 다 벗으라고."

탈의는 어느 세상과 시대에서나 유서 깊은 가혹 행위였다.

사람에게 모욕감을 주기에 탈의처럼 간편하고 확실한 수단도 없었다.

특히 이지스 생도들은 신체를 혹사하는데 익숙했기에, 이런 식으로 모욕감을 주는 것이 체벌보다 효과가 좋았다.

로안은 레이가 망설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때를 대비한 계획도 다 있었다.

허나 레이는 곧장 탈의를 실시했다.

로안은 잠깐 흡족해하다 곧 표정을 굳혔다.

'이 새끼... 바지부터 벗는다고...?'

여기 모여있는 자들 대부분이 레이에게 초면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여자들도 있었다.

이런 곳에서 탈의를 명령받으면 제정신 박힌 놈들은 겉옷과 상의부터 쭈뼛거리며 벗고는 했다.

근데 바지부터 벗어? 겉옷도 안 벗고 팬티부터 내리려고 해?

로안은 이지스 생도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서 깊은 격언을 떠올렸다.

-옷 벗을 때 하의부터 벗는 놈을 조심하라-

옷 벗을 때 하의부터 벗는 놈들은, 그래, 인간으로서 무언가가 결여된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로안은 레이가 만만찮은 미친놈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허나 레이는 레이 나름대로 아랫도리 쪽부터 벗는 이유가 있었다.

일단 레이는 상체가 상처투성이였다.

상체 절반 가까이에 한 번 눌어붙었다가 회복된 흉터가 남아있었는데, 자잘한 흉터는 그 밖에도 많았다. 남들에게 그다지 자랑스럽게 보일 만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레이가 바지부터 내린 것은... 분명 '자신감'의 영향도 컸다.

환생한 후 결코 꿀리지 않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레이는 행동이 거침없었다.

레이가 바지부터 벗어내자 쥬세핀은 깜짝 놀라서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도 슬그머니 손가락 사이를 벌렸다.

자신에게 굴욕을 준 남자가 굴욕을 당하는 장면을 놓쳐서는 안 된다, 뭐 그런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요하나는 '옛날에 봤던 건데...'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흥미진진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리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레이가 속옷마저 벗어내려는 순간 로안이 레이의 배를 걷어찼다.

퍼억- 쿠당탕!

바닥을 한 바퀴 구른 레이가 곧장 일어서서 로안 앞에 섰다. 아직 속옷은 입은 채였다.

로안이 움직임만큼은 빠릿빠릿한 레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 똑바로 해. 지켜볼 거야."

"예! 알겠습니다!"

"새끼... 바지 가지고 들어가."

"감사합니다!!"

크게 대답한 레이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입학 시험에서 그렇게 난리를 치던 레이가 선배들에게 꼼짝도 못하자 신입생들은 다들 강한 대리만족을 느꼈다.

그렇기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던 것도 잠시, 신입생들은 도리어 한 층 활기차게 변해 술잔을 나눴다.

한편 자리로 돌아온 레이가 데런 가까이 앉은 채 낮게 중얼거렸다.

"하, 시발, 훈장 가져올걸."

"..."

데런은 레이의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뭐 어쨌든, 그날의 환영회는 레이의 일을 제외하면 별 탈 없이 마무리되었다.

*

알슈테인 가문 본가의 안뜰.

화단을 보며 차를 마실 수 있게 마련된 공간 안에서, 세리아는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던 도중에 불쑥 입을 열었다.

"조카 보러 갈래."

세리아와 마주 앉아 있던 디오리카가 허리를 바로 세우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음..."

세리아가 지금 말하는 조카가 디오리카 같은 '짭조카'는 아닐 터다.

디오리카는 세리아가 얼마 전 레이에 관한 정보를 접했다는 걸 상기하며 입을 열었다.

"고모님이 원하시면 자리를 한 번 마련해보겠습니다."

레이가 지금 황도에 있으니, 세리아와 잠깐 얼굴을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세리아는 고개를 짧게 저으며 부정의 의사를 표했다.

"싫어."

"예?"

"조카는 아가야."

잠깐 침묵한 디오리카가 혹시나 해서 다시 물었다.

"...레이를 baby라고 하신 겁니까?"

"레이는 아가야. 옆에 있어야 돼. 보살펴줄 보호자가."

"..."

"보호자인 내가 옆에 있어야 돼."

"..."

디오리카는 반박할 말이 아주아주 많았다.

허나 디오리카가 반박한다고 해서 세리아가 고집을 꺾을까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고모님이 한 학기 정도 특별 교관으로 근무를 요구한다면 이지스도 팔 벌려 환영은 하겠다만...'

이건 디오리카 선에서 이지스랑 의견을 조율하고 끝낼 문제가 아니었다.

디오리카는 잠시 고민해보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자리를 구해볼 수 있는지 한 번 알아는... 보도록 하겠습니다."

디오리카가 긍정적인 답을 돌려주자 세리아가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아는 아가를 귀여워해줄 생각에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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