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27화 (227/446)

227화

"그럼 앞으로는 후작님께서 제게 먼저 인사해야 하는 겁니까?"

"..."

에른스트는 잠깐 혼란에 빠졌다.

순간 '이 새끼가 훈장 하나 받았다고 기어오르나?' 싶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레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제국 역사를 뒤져도 제국 수호 훈장 수여자는 극소수였다.

굉장히 험악한 난세가 아닌 이상 제국 수호 훈장을 수여받을 수준의 공적을 세울 기회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제국 수호 훈장 수여자들은 대개 로드 급이거나, 전투 병과가 아니더라도 나이가 지긋했다. 적어도 레이 이전까지는 모두가 그랬다.

레이 이전에 최연소 수여자가 레이보다 40살은 더 많을 터였다.

그렇기에 설령 로드급이라 해도 제국 수호 훈장 수여자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는 건 크게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었다.

"..."

그런 관례적인 측면에서.

에른스트가 레이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 정도는 합당한 편이었다.

하지만 레이는 아직 너무나 젊었다. 에른스트에 비해선 정말 새파랗게 어렸다.

에른스트는 초월적인 경지에 오른 소드마스터답게 시야가 넓고 현명하며 정무적 감각도 뛰어났지만...

상황이 이리되니 가슴 깊이 내재되어있던 노인의 똥고집이 피어오르는 기분이었다.

내가, 제국의 소드마스터라 불리는 내가 저 새파랗게 어린 놈한테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인간적으로 도저히,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레이가 에른스트의 표정을 읽고 다급히 덧붙였다.

"농담입니다, 농담."

레이는 본래 농담이라는 말 대신 '~라고 할 뻔' 따위의 말을 덧붙여 시건방을 떨어보려 했지만.

이 이상 에른스트의 인내심을 긁어보는 건 위험하다는 걸 눈치챈 레이는 얼른 말을 바꿨다.

레이가 정색한 채 하하 웃자 에른스트도 뒤늦게 표정을 풀었다.

이 사안은 따지고 들어가기 시작하면 에른스트가 무조건 불리했다.

그렇기에 에른스트도 그냥 허허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일주일 안에 폐하께서 하사한 무구도 도착할 거다. 이지스 입학 전에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

"어깨는 잘 맞는 것 같고..."

프리슬란 가문 요새 내부의 거울 방에서.

요하나가 새롭게 받은 옷을 갈아입고서 큰 거울 앞에 서서 팔을 좌우로 벌려보았다.

그옆에서 데런 또한 요하나와 비슷한 차림새를 한 채 이리저리 주먹을 뻗어보고 있었다.

요하나와 데런, 둘 다 우수한 성적으로 이지스 입학 시험에 합격했다.

합격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고, 요하나와 데런은 합격 소식과 함께 이지스의 정복을 전해 받아 지금 막 갈아입고 몸에 맞는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이지스의 정복은 사이즈의 차이만 있을 뿐 남녀 모두 같은 디자인의 옷을 지급받았다.

여성용 치마도 존재하기는 했는데, 이지스 생도들은 몸을 쓸 일이 많은 만큼 별로 선호되진 않았다. 가끔 좀 꾸며야 할 자리에 입고 나가는 수준이었다.

요하나가 무릎을 가슴 가까이 붙여보며 바지가 잘 늘어나는지 확인하고 있는데, 마침 레이가 방문을 두드렸다.

레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요하나와 데런을 번갈아 보았다.

"둘 다 옷 벌써 받았어? 어때, 몸에는 잘 맞아?"

"그럭저럭?"

요하나가 반대쪽 다리를 가슴에 붙여보며 말을 이었다.

"레이도 합격했어?"

"그럼 당연히 합격했지. 날 떨어뜨리면 누굴 붙이게?"

"너 나한테 졌잖아? 그래서 떨어질 줄 알았는데."

요하나가 은근히 깔보는 기색으로 히히 웃자 레이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한 번 더 붙어볼래?"

"싫은데?"

요하나가 한쪽 입 꼬리만 비스듬히 올리며 레이를 약 올렸다.

레이가 피식 웃고는 요하나와 데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둘 다 잘 했어."

요하나와 데런은 합격 사실만 알고 있었지만, 레이는 두 사람에게 책정된 정확한 점수를 에른스트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일단 요하나는 수석이었다. 1차, 2차, 3차 전부 만점이었다.

데런은 아쉽게도 점수 상으로는 등수가 세 번째였다.

물론 이지스는 단순 점수로 합격자를 분류하진 않는다.

나이, 재능, 전투에서 보여주는 센스 등에 따라 충분한 가점을 주어 합격자를 뽑았다.

다만 수석과 차석 만큼은 논란이 없도록 순수 점수로 뽑았는데, 데런은 토너먼트에서 요하나를 일찍 만나 도중에 탈락함으로써 점수가 조금 깎였다.

차석이 아닌 건 아쉬워할 일이긴 했지만.

어쨌든 데런은 이번 기수 최연소 합격자였다.

레이가 데런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데런은 조금 낯부끄러워하면서도 웃음을 머금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그래. 그리고 그... 입학 시험 때 일은 오해하지 말고."

"..."

레이는 입학 시험이 끝나고 나서, 입학 시험 때 자신이 왜 그런 모습을 보여야 했는지 두 사람에게 대충 이유를 설명했었다.

물론 요하나와 데런은 그다지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지금도 눈빛이 좀 불순했다.

레이는 자기 업보가 깊다는 걸 자각하며 제국 수호 훈장을 꺼내 보였다.

"아, 그리고 나 이거 받았어. 제국 수호 훈장."

"...?"

"...?"

요하나와 데런이 제자리서 굳어버린 채 눈만 깜박였다.

제국 수호 훈장... 뭐, 엄청 유명한 물건이긴 하지만, 저게 가장 최근에 수여된 것이 무려 200년 전이었다.

그렇기에 제국민들에게 있어 제국 수호 훈장이라는 것은 정말 이야기 책 속에서나 접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걸 레이가 손에 아무렇게나 쥐고 달랑달랑 흔들고 있으니... 이걸 대체 반응해야 할지 바로 감이 잡히지 않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데런이 간신히 한 마디 했다.

"어, 어, 혀, 형님, 축하드립니다...?"

"오냐."

"어, 그, 어..."

데런은 '축하드린다' 한 마디를 하고서 다시 머리가 꼬였는지 말을 더듬었다.

레이는 이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볼까 고민하다가 제국 수호 훈장을 어깨 아래에 붙였다.

그러고는 옷걸이에 걸린 천을 들고 온 레이가 천으로 어깨 아래를 빙글빙글 동여매서 제국 수호 훈장을 가려버리고는 데런을 불렀다.

"데런."

"예, 예, 형님."

"이지스에 들어가면 자꾸 까부는 놈들이 생길 거야. 그렇지?"

"그, 당연히... 그렇겠죠?"

현 시점에서 레이에게 강압적으로 무언가를 강요할 위치에 있는 자는 제국에서조차 다섯도 안 되었다.

근데 신입생 신분으로 이지스에 입학하게 되면, 기강 잡겠답시고 레이에게 까부는 놈들이 셀 수 없이 많을 터다.

데런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가 말을 이었다.

"적당히 까부는 건 용인해줘야지. 근데 어떤 잡놈이 자꾸 선을 넘는 거야. 그럼 네가 내 옆에 있다가 '아, 이 새끼 안 되겠다' 싶으면 이 천을 확 풀어버리는 거지."

"..."

"그럼 그 잡놈이 훈장을 딱 보고 어떻게 반응하겠어? 막 자지러지면서, 허억, 제국 수호 훈장 수여자? 이러겠지? 주변에서 구경하던 애들은 기겁하며 뒷걸음질치고?"

"..."

그 장면을 상상해본 데런은 존나 병신같지만 멋있다고 생각해버렸다.

데런이 자기 멋대로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막기 위해 인상을 구기는 사이 레이가 낄낄거리며 천을 풀었다.

"농담이야, 농담."

"아, 농담이요..."

내심 그런 상황을 기대하고 있던 데런이 조금 풀죽었다.

데런 또한 레이를 앞세우고 호가호위하고 싶다는 음습한 욕구쯤은 은밀히 가지고 있었다.

한편 방금까지 혼란에 빠져있던 요하나가 슬그머니 레이에게 다가와 물었다.

"나, 나 이거 구경해봐도 돼?"

"얼마든지. 아, 그리고 남들한테는 말하지 말고."

요하나가 빠릿빠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헤벌레한 얼굴로 훈장을 받아갔다.

어린 시절 주구장창 읽었던 이야기 책 속의 영웅은 결말 쯤 가서 제국 수호 훈장을 수여 받고 황족이나 귀족과 혼약을 맺는 것으로 마무리를 장식하고는 했다.

삽화 같은 것으로만 보았던 훈장을 직접 보니 마음이 멋대로 들떴다.

요하나와 데런이 나란히 붙어 훈장 위에 짧게 요약되어 있는 레이의 공적을 읽어보는 사이.

레이가 맡겼던 팔찌를 돌려줄 겸 레이를 찾아 산책을 나섰던 스페라가 사용인에게 안내를 받아 거울 방을 찾아왔다.

"레이, 여기 있나요?"

"아, 스페라 님, 들어오세요."

스페라가 방에 들어와 레이에게 팔찌를 돌려주었다.

레이는 감사를 표한 후 요하나가 손에 들고 있던 훈장을 가리켰다.

"저 훈장 받았어요."

"정말요?"

스페라의 반응은 담담했다.

레이쯤 되면 훈장 따위야 몇 개를 받아도 놀라울 것은 없었다.

허나 스페라는 요하나에게 다가가 같이 훈장을 살펴보고는 역시나 기겁했다.

한참 동안 제국 수호 훈장을 구경한 스페라가 가장 중요한 걸 레이에게 물어보았다.

"어... 그럼 앞으로 증조부님께서 레이에게 먼저 예를 갖추셔야 하나요?"

레이가 진지하게 되물었다.

"한 번 시켜볼까요?"

잠깐 고민한 스페라가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증조부님보다 레이가 강해지기 전에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레이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

이틀 뒤 레이는 요하나와 데런보다 조금 늦게 이지스 정복을 전달받았다.

그때쯤 이지스 신입생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도 있었기에 레이는 요하나와 데런과 함께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지스는 생도들은 1급 생도, 2급 생도, 3급 생도로 분류된다.

신입생인 레이는 이제부터 3급 생도 신분이었으며, 입학 시험이 3년 주기로 진행되므로 각 급마다 보통 3년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3년 주기인 일반 입학과 특별 입학 외에 다른 루트로 이지스에 중간 입학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극소수였다.

이지스 생도들은 보통 6년 정도 교육을 받아 1급으로 승급한 후, 본인의 실력과 적성에 적합한 직위와 직무를 부여받아 본격적으로 날개를 펼친다.

즉 1급 생도들 대부분은 졸업생, 혹은 예비 졸업생 신분이나 마찬가지여서 3급 생도들이 이지스 내부에서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오리엔테이션은 입학 시험을 치렀던 황도 인근의 이지스 훈련 시설에서 진행되었다.

로얄가드가 직접 나와 입학생들을 환영해주었다.

3급 생도를 나타내는 붉은 견장을 찬 입학생들은, 황금색 끈으로 장식된 정복을 차려 입은 로얄가드를 선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는 건물로 입장하기 전, 쥬세핀은 건물 입구에서 마주친 로얄가드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로, 로코비아 가문 출신의 쥬세핀이라고 합니다! 영광입니다!"

"입학을 환영합니다. 부디 이지스에서 좋은 성취를 거두시길 바랍니다."

로얄가드가 손을 맞잡으며 정중하게 인사를 받아주자 쥬세핀은 감격해서 어깨를 살짝 떨었다. 자신이 이지스에 입학했다는 것이 새삼 실감되었다.

쥬세핀은 몇 번 더 고개를 숙인 뒤 안으로 입장했다.

쥬세핀 뒤에서 기다리던 레이는 마침내 자기 차례가 되어 로얄가드와 손을 맞잡았다.

레이가 입을 열어 인사를 건네려는데 로얄가드가 선수를 쳤다.

"이지스에 입학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로얄가드, 다카우스입니다."

로얄가드는 관례적으로 본인의 작위나 가문을 앞에 잘 내세우지 않았다.

레이가 잠시 다카우스를 바라보다 손을 맞잡았다.

"레이입니다. 내세울 가문은 없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카우스가 가볍게 웃어주고는 안쪽으로 레이를 안내했다.

입학 시험에서 합격한 3급 생도들이 모두 모이자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됐다.

오리엔테이션은 큰 사고 없이 들뜬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 되었다.

그 후엔 2급 생도들의 3급 생도 환영회가 시작됐다.

2급 생도들은 기합이 바짝 든 신입생들을 세상 따뜻한 시선으로 환영해...주지만은 않았고...

이런저런 일이 있었던 끝에.

환영회 도중 레이를 일으켜 세운 2급 생도 한 명이 레이에게 명령했다.

"탈의 실시."

"...예?"

"탈의 실시. 입고 있는 옷 싹 다 벗으라고."

"..."

잠깐 침묵한 레이가 곧장 혁대를 풀었다.

레이가 빠르게 명령에 따르기 시작하자 2급 생도는 흡족하게 웃다가,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표정을 굳혔다.

2급 생도는 얼마 안 가 자신이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 새끼가 근데...?'

탈의하란 명령을 받은 레이는 지금 상의가 아니라 바지부터 벗고 있었다.

심지어 겉옷도 안 벗고 팬티부터 내리고 있었다.

2급 생도는 레이가 만만찮은 미친놈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지스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