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네 번째 대련에서 레이는 삐뚤어져 버렸다.
완전히 기분이 상한 레이는 다섯 번째 대련에서 무기를 바꾸지 않고 부러진 직검을 들고 참여했다.
대련이 시작되고, 레이의 다섯 번째 대련 상대인 수험번호 '45번'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정말 열심히 발악했다.
아무리 실력 차이가 나도 '부러진 직검' 따위에 패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레이의 부러진 직검을 받아내던 45번은 기세를 잃지 않기 위해 고함에 가까운 기합을 질렀다.
"크아앗!!"
"어쭈?"
레이가 정색했다.
이미 단단히 삐뚤어져 버린 레이는 부러진 직검의 검 자루로 45번을 후드려 팼다.
어떻게든 버텨보려던 45번은 검 자루에 맞아 쇄골이 골절되어 털썩 주저앉았다.
"끄으윽...!"
아팠다.
육체도 아팠지만, 마음이 더 아팠다.
45번은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치욕감 탓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무리, 아무리 실력 차이가 난다고 해도 부러진 직검에 패했다는 건... 다가오는 게 달랐다.
평생을 천재라고 집안에서 둥가둥가 떠받들어져 왔던 45번은 생애 처음으로 끔찍한 좌절을 느꼈다.
레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45번을 내려다보다 한 소리 했다.
"일어나라, 45번. 약자가 강자에게 패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
45번은 머리가 회까닥 돌아 고통도 잊고 레이에게 달려들다가 시험관들에게 제압당해 끌려나갔다.
45번이 끌려나간 후 레이를 향한 야유는 절정에 달했다.
시험관들이 통제하지 않았다면 무기를 쥐고 뛰쳐나올 기세였다.
삐뚤어져버린 레이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야유가 한 층 더 커졌다.
이제 마지막 대련만이 남아있었다.
여섯 번째 대련의 상대는, 당연히 요하나였다.
요하나는 4차 대련에서 데런을 꺾고 5차 대련 또한 가뿐히 승리하고 결선에 올라왔다.
그녀는 제국의 기재들이 모였다는 응시생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으로 빛났다.
마침내 심사관이 대련장 위에서 요하나의 번호를 불렀다.
"26번 올라와라."
번호를 불린 요하나가 대련장에 올라섰다.
직후 응시생들이 요하나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요하나!! 요하나!! 요하나!! 요하나!! 요하나!!"
요하나는 누가 이름을 물어보기에 답해주었을 뿐인데, 이젠 모두가 요하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요하나는 응시생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총 다섯 번의 대련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요하나였기에 응시생들은 요하나가 저 빌어먹을 악한을 물리쳐 주리라 깊게 믿었다.
이젠 오직 요하나만이 정의를 바로 세우고 눈물을 흘리며 스러져간 응시생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었다.
요하나의 신분이 평민이니 귀족이니 따위는 더는 중요치 않았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요하나의 이름을 계속 연호했다.
주변의 과한 관심에 요하나의 얼굴이 은근히 붉어졌다.
그때 심사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60번, 올라와라."
곧장 야유가 터졌다.
"우우우우우우우!!"
삐뚤어져버린 레이는 역시나 야유꾼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대련장으로 올라왔다.
이젠 이곳이 이지스의 신성한 입학 시험장인지 아니면 피와 눈물과 광기가 흐르는 콜로세움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요하나가 세상 경멸스러운 시선을 레이를 쳐다봤다.
레이는 순간 욱했다.
남들이 다 욕을 해도, 너는 내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
레이는 그런 심정으로 응시생들 중 데런을 찾아 돌아보았다.
허나 데런 또한 요하나와 엇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자, 레이는 이게 모두 공간검 원툴 병신인 자기 잘못이라는 걸 납득했다.
그때 시험관이 레이를 향해 물었다.
"...무기는 교체하지 않을 건가?"
"네."
레이가 부서진 직검을 빙글빙글 돌렸다.
요하나는 이번 대련에서 자기 전용검을 사용하지 못했다.
레이는 이번 대련에서 하르시아의 주력 검술인 이도류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고, 검강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 외에 오버드라이브 등의 잔기술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부러진 직검을 들었다. 사실 이 정도는 해야 밸런스가 맞긴 했다.
뚱한 표정을 한 요하나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별말 없이 검을 들었다.
마침내 마지막 대련이 시작되며 레이와 요하나가 격돌했다.
쩌엉!!!
검기가 강맹히 부딪치며 공기를 크게 울렸다.
요하나는 5번째 대련까지 해왔던 손대중을 그만두고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레이를 믿었기에, 또한 레이와의 격차를 알았기에 검을 휘두를 때 망설임을 없었다.
시험관들은 잔뜩 긴장했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졌을 시, 제때 둘의 대련을 저지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둘의 대련을 지켜보던 응시생들의 표정도 자연히 굳었다.
요하나는 분명 엑스퍼트 급이었다. 여기 있는 응시생들도 전부 엑스퍼트 급이었다. 허나 무언가 달랐다.
몸놀림, 검술의 활용법, 마나 제어, 그 모든 측면에서 요하나는 다른 응시생들과 무언가 달랐다.
응시생들은 요하나로부터 뭐라 형용키 힘든 격차를 느꼈다.
노련함이나 기술의 완성도 따위와는 조금 다른... 순수한 '재능'의 격차.
이 대련을 지켜보는 모두가 그걸 느꼈다.
레이는 다른 응시생들보다 훨씬 분명히 요하나의 재능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요하나의 마나는 불변성이 강한 다른 기사들의 마나에 비해 변형성이 강했다.
마나의 변형성이 강하면 검기나 그 이상의 것을 구현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허나 요하나는 타고난 마나 제어력과 센스를 이용해 그 단점을 상쇄시켰다.
그리고 필요한 순간 원하는 성질로 마나를 고정시켜 상대를 위협했다.
요하나의 검술은 자유로웠다.
이를 상대 입장에서 풀어서 설명하자면, 검을 한 번 나눌 때 고려해야 할 경우의 수가 무지막지하게 늘어남을 뜻했다.
요하나에겐 한 번 말리는 순간 극복하기 힘들었다.
요하나와 비등한 재능을 지닌 스페라 쯤 되면 어찌저찌 다시 균형을 잡을 수 있겠지만, 다른 이들은 불가능했다.
카가강!!!
요하나는 날카롭고 정교하고 신속하고 자유롭게 레이를 압박했다. 요하나의 검술은 아름다웠다.
응시생들은 요하나와 재능의 격차를 느끼면서도, 그런 요하나를 부러진 직검을 들고 상대하고 있는 레이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레이는 아예 그들의 이해를 벗어나 있었다.
끄득!
레이는 요하나의 검격을 막아내다 자기 검이 깎여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부러진 직검도 이젠 한계에 다다라 얼마 가지 못해 박살이 날 게 분명했다.
그럼 정말로 검 자루만 들고 싸워야 했는데, 아무리 레이라도 요하나를 상대로 그건 불가능했다.
"흠..."
레이가 승부를 걸어봐야 하나 고민한 순간.
도리어 요하나가 레이와 거리를 확 좁히더니 뒤돌려차기를 날렸다.
어릴 때 가르쳐준 체술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레이도 깜짝 놀라 허리를 크게 들었다.
쐐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요하나의 다리가 레이의 코끝을 스쳤다.
레이는 발차기를 피한 뒤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잠깐 당황했지만 거리가 좁혀지면 부러진 직검을 든 레이에게 유리했다.
헌데 그 찰나 요하나가 검을 쥐고 있던 왼손과 오른손의 위치를 바꿔 잡았다.
갑작스러운 스위칭과 함께 요하나의 검술이 크게 변했다.
사실 좌우만 거울처럼 반전시킨 것뿐이었지만 상대하는 입장에선 그게 말처럼 간단히 다가오지 않았다.
서로의 호흡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검격이 짧게짧게 쪼개져서 맞부딪쳤다.
레이는 요하나에게 말려들어 감을 느끼며 그 와중에 피식 웃었다.
요하나의 검술이 변화함에 따라 어지러워진 궤적 속에서.
레이는 찌르기를 행할 것을 강요당했다.
레이는 굳이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요하나에게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요하나는 기다렸다는 듯 검을 옆으로 누인 채 왼손으로 검 자루를 짧게 잡아 고정시킨 뒤, 오른손을 자기 품으로 당겨 넣으며 지렛대처럼 검신을 앞으로 밀었다.
끄드득!!
레이의 부러진 직검이 부러졌을 때 유난히 깊게 파인 틈을 향해.
요하나의 검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불안정했던 레이의 검기가 일렁인다.
그 순간 요하나의 검날이 부러진 직검을 검 끝에서부터 반으로 갈라내며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더는 버티지 못한다.
부러진 직검이 산산이 바스러져 나감과 동시에 강한 충격이 레이를 덮쳤다.
충격에 저항하려 해봤자 더 크게 다치기만 했기에 레이는 몸을 뒤흔드는 충격에 순응했다.
쩌엉!!!
박살이 나버린 부러진 직검의 파편과 함께 레이의 몸이 나뒹굴었다.
레이는 자기 얼굴로 향하는 파편만 대충 쳐내고는 데굴데굴 구르다 땅에 털썩 쓰러졌다.
레이의 손에는 이제 반으로 갈라진 검 자루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레이는 허리를 일으켜 보려다, 다시 털썩 쓰러졌다.
잠깐의 정적 후.
사방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
"이겼다, 이겼어!!!"
"요하나!! 요하나!! 요하나!! 요하나!!"
대련이 이어지며 흥분했던 요하나가 잠깐 낯부끄러움을 잊고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곧장 더욱 큰 환호가 터져나왔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요하나는 뒤늦게 쪽팔림이 몰려와 자기 얼굴을 가렸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엄청난 환호 속에서, 지면에 뻗어버린 레이는 뒤늦게 스스로를 포장했다.
"악역은... 익숙하니까."
개소리였다.
*
"..."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 안에서.
에른스트는 성황리에 입학 시험을 마치고 돌아온 레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에른스트가 한 마디 던졌다.
"당장 가서 성검도 뽑아오지 그러느냐?"
"..."
에른스트는 사실 이런 식으로 비꼬는 듯한 화법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상황이 워낙 어처구니가 없어, 정말 자연스럽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레이가 특별 입학을 거절하고 입학 시험을 치르겠다고 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평범하고 학생처럼 위장한 후 조용히 이지스에서 요하나와 데런이 잘 지내는가 지켜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헌데 레이는 이지스 입학 시험에서 정말 역대급 깽판을 치고 돌아왔다.
본래 응시생들과 시험관은 이지스 입학 시험 과정에서 발생한 일을 함부로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되지만, 레이가 워낙 깽판을 쳐놓은 지라 벌써 이런저런 소문이 돌고 있었다.
에른스트로서는 이 새끼가 정말 나랑 한 번 해보고 싶어서 이러나,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에른스트도 레이가 '공간검 원툴 병신'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런 상상을 하기는... 제국의 소드마스터라 해도 정말 쉽지가 않았다.
눈치를 살살 보던 레이를 지켜보던 에른스트가 결국 화를 참고 화제를 돌렸다.
"...황제 폐하께서 네게 정식으로 제국 수호 훈장을 수여하셨다. 관련 절차가 복잡한 면이 있어 시간이 좀 걸렸다."
에른스트가 값비싼 보석이 올올이 박힌 자그마한 석함을 꺼내 보였다.
레이는 조금 당황해서 되물었다.
"제국 수호 훈장이요?"
"열어봐라."
레이가 석함을 받아 열어보았다.
마름모 꼴... 뭐, 아래쪽으로 조금 더 뻗어나온 형태이긴 했지만, 어쨌든 레이의 눈에도 꽤 익숙한 모습의 훈장이 석함에 들어있었다.
속이 비어 있는 원형 위에 마름모. 마름모 위에는 제국을 상징하는 용을 형상화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레이는 이 훈장을 실물로는 처음 보았다.
그럼에도 익숙하게 느껴졌던 것은, 이 훈장이 제국을 대표하는 훈장이자 어린아이들이 읽는 이야기 책 속에 꼭 등장하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제국 수호 훈장.
이건 제국의 최상위 훈장이자 빈도로 따지면 일백 년에 한 번이나 수여될까 말까 한 훈장이었다.
이 훈장은, 그야말로 역사에 기록될 영웅적인 위업의 상징이자 제국민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영예였다.
레이는 크게 벅찬... 감정까지는 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당혹감과 비슷한 감정은 느꼈다.
"음..."
훈장의 끄트머리엔 레이의 이름과 레이가 세운 공적이 작은 글씨로 음각되어 있었다.
"...비공식적으로 수여된 겁니까?"
"공식적으로 수여된 훈장이나, 수여자가 공개되진 않았다."
앞으로 한동안은 제국 수호 훈장을 수여받은 자가 누구인지 유추하느라 제국이 떠들썩할 터다.
메테오 낙하 사건에 비밀리에 투입된 로얄가드나 제국 특임대 요원 중 하나이지 않을까, 많이들 그리 생각하겠지만 정답을 찾기는 힘들 터였다.
에른스트는 굳이 레이에게 제국 수호 훈장에 대한 감흥을 묻지는 않았다.
저건 레이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이었기에, 어떤 감흥을 느끼든 에른스트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네가 죽으면, 그때는 수여자가 누구였는지 공개될 거다."
이건, 레이가 죽는다 해도 레이가 기록해나갔던 역사를 지우고 덮어버리지 않겠다는 황제의 증명이었다. 레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이다.
에른스트는 담담히 제국 수호 훈장 수여자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입에 담았다.
사실 워낙 유명해서, 레이도 대략적인 건 알고 있었다.
연금이니 뭐니를 비롯한 특수한 혜택이 넘쳐났는데, 기실 신원이 비공개인 상태에서 쓸 수 없는 게 대부분이긴 했다.
하여튼 간에 제국 수호 훈장의 혜택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인사 예법과 관련된 사항이었다.
황제를 제외한 제국의 모든 이들, 그러니까 황족과 귀족을 포함한 모든 이들은.
신분과 직위를 막론하고 제국 수호 훈장 수여자에게 먼저 예를 갖춰야 했다.
그렇기에 제국 수호 훈장 수여자는...
황제가 아닌 그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었다.
그런 특권을 부여 받을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수여됐기에, 제국 수호 훈장은 영웅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다.
레이가 제국 수호 훈장을 만지작거리다가 에른스트에게 물었다.
"그럼 앞으로는 후작님께서 제게 먼저 인사해야 하는 겁니까?"
"..."
"농담입니다, 농담."
레이가 정색한 채 하하 웃었다.
이지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