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쥬세핀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더니 땅으로 뚝뚝 떨어졌다.
쥬세핀의 눈물은, 감성팔이로 치부하기엔 그 호소력이 너무나도 짙었다.
그 와중 가뜩이나 비호감도가 하늘까지 치솟은 레이가 쥬세핀을 향해 욕설을 지껄이니 사방에서 쥬세핀을 향한 응원의 목소리와 레이를 향한 야유가 쏟아졌다.
원래 이런 상황이 펼쳐지면 시험관들이 말려야했는데...
시험관들은 너무 심한 욕설만 아니라면 응원과 야유를 묵인해주고 있었다.
쥬세핀은 용기를 얻어 다시 검을 쥐었다.
화악!
쥬세핀의 검신 위로 찬란히 빛나는 검기가 피어올랐다.
대련장 가까이에 기사단장 급 기사와 고위 마법사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시험관 직을 맡아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응시생들은 그저 실전처럼 최선을 다하면 되었다.
쥬세핀은 붉어진 눈시울을 팔뚝으로 쓱 닦아낸 후 상처를 딛고 일어났다.
모두의 응원 속에서, 쥬세핀이 기합과 함께 레이에게 선공을 가했다.
"흐압!"
*
쥬세핀이 선공을 가하기 직전.
레이는 쏟아지는 야유 속에서 상황 판단을 끝냈다.
레이는 더 이상... 전생에서 우스갯소리로 '힘을 숨긴 찐따' 따위로 불리던 노릇을 하는 건 글렀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쥬세핀에게 져 주는 건 안 되었다. 여기서 져주면 점수 상으로는 무조건 탈락이었다.
그럼 그냥 최선을 다해서 상대를 빠르게 찍어누르고 대련을 끝낼까?
'그건 좀...'
레이는 필요에 따라 살인도 거리낌 없이 행할 수 있는 냉철한 사람이었지만.
상황이 허용하는 선에선 배려심도 꽤 깊은 편이었다.
3차 시험에서는 토너먼트에서 높이 올라가는 것도 중요했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 자기 실력을 시험관에게 증명해야만 했다.
설령 토너먼트에서 일찍 떨어지더라도, 충분히 활약을 했다면 많은 가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헌데 토너머트 1차 시합에서 자기 실력을 내보일 기회도 없이 박살이 난다면...
시험관이 자비를 베풀어 추가 시험이라도 치를 기회를 주지 않는 이상 탈락을 면하기 힘들었다.
레이는 은원 관계도 아닌 파릇파릇한 애들의 미래를 굳이 뭉갤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쥬세핀이 선공을 해오는 순간.
레이는 쥬세핀이 자기 실력을 충분히 심사관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일단 방어 자세를 취했다.
캉!! 카가각!!
본격적으로 대련이 시작됐다.
섬광이 번쩍이며 서로의 검격이 맞부딪쳤다.
쥬세핀은 생각보다 대련이 할만하다는 걸 깨닫고 조금 당황했다.
선공을 가할 때만 해도 내심 단칼에 떨어져나가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레이의 검격은 쥬세핀의 예상보다 훨씬 볼품없었다.
뭐지? 혹시 봐주는 건가? 일부러 약한 척하다가 엿 먹이려는 건가?
잠시 그런 의문을 품었던 쥬세핀은 굳어 있는 레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용기를 되찾았다.
내가 생각보다 강하구나! 그래서 저놈도 당황했구나!
바보 같은 생각이긴 했지만 본디 실력 차이가 크게 날수록 주제 파악이 힘든 법이었다.
쥬세핀은 행복회로를 힘차게 돌려 긴장을 털어낸 뒤 마음껏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카가가가강!!
쥬세핀의 공세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레이는 쥬세핀의 검을 받아내며 쥬세핀의 실력이 그럭저럭 괜찮다고 평가했다.
쥬세핀의 검술은 직선적이지 않은 탓에 속도가 조금 느렸지만, 그 느림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 끊임없이 레이를 압박해왔다.
이런 식의 검술은 타고난 센스가 좋아야 대련에서도 제대로 사용 가능했다.
'이 정도면 레어 등급 정도는...'
레이가 그따위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쥬세핀은 성공적으로 레이를 밀어붙이며 희열을 느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세를 탄다면 레이의 틈을 파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쥬세핀은 지금 이 순간 확신했다.
자신이 이야기 책 속의 영웅처럼 힘겨운 시련을 극복하고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허나 허황된 꿈이었다.
레이가 쥬세핀의 검을 충분히 받아줬다고 생각하고 기세를 바꾸었다.
카각!!
"?!"
쥬세핀이 흐름을 이어가던 검의 궤적에 레이가 억지로 검을 비집어 넣었다.
레이는 서로 맞댄 검을 한 바퀴 돌려서 위로 올려쳐 버리고는 쥬세핀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쥬세핀은 굉장히 당황했으나 그래도 안쪽으로 파고드는 레이를 상대로 그럭저럭 잘 대응했다.
어떻게든 자신의 흐름을 이어가려는 쥬세핀의 노력은 심사관들에게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허나 그럼에도.
레이와 기본적인 실력의 격차가 너무 컸다.
얼마 못 가 쥬세핀의 목에 레이의 검이 겨누어졌다.
심사관이 레이의 번호를 불렀다.
"60번, 승리."
캉-!
패배했음을 깨달은 쥬세핀이 검을 떨어뜨렸다.
쥬세핀은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놈... 날 또 기만했구나...! 날 가지고 놀았어...! 마지막 순간까지 날 농락했구나...!"
마음이 꺾이지 않겠다 맹세한 여기사는 결국 마음이 꺾여 꺼이꺼이 울었다.
레이는 '야 이 시발련아'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침묵했다.
대련장을 내려가는 레이를 향해 사방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
기사 학부 응시생들의 숫자는 총 60명.
3차 시험인 토너먼트에서 개인이 결선까지 올라간다면 총 여섯 번의 대련을 치러야 했다.
레이는 두 번째 대련을 이긴 후 세 번째 대련은 부전승으로 건너뛰었다.
두 번째 대련에서도 레이가 쥬세핀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를 농락하고 기만하자 야유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상황이 이쯤 되니 레이의 신분을 의심하는 자들도 생겼다.
혹시 레이가 '비밀 시험관'은 아닐까.
시험관으로서 응시생들을 가까운 곳에서 평가하기 위해 저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꽤나 합리적인 가설이 나돌았다.
시험관들 사이에서도 '너 혹시 뭐 아는 거 있냐' 따위의 수군거림이 짧게 일었다.
허나 레이가 하는 행동이 워낙 악질인지라, 어쨌든 레이를 향한 야유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아..."
레이가 한숨을 내쉬며 네 번째 대련을 진행하기 위해 대련장에 올랐다.
이제 레이는 그냥 입학 시험을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었다.
허나 레이의 네 번째 대련 상대인 컬펜은 레이와는 반대로 의욕이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너를 꺾고 반드시 정의를 구현하겠다!!!"
"..."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딱 그 시기가 전능감에 차 눈에 뵈는 게 없을 시기였다.
주제 파악이 더럽게 안 되는 시기다, 이 말이었다.
물론 겸손함을 유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대개는 컬펜처럼 자기 객관화가 잘 되지 않았다.
근거 없는 자만심을 치료하는 방법은 얻어터져 보는 것 말고는 없었다.
레이가 고개를 저으며 검 끝을 컬펜을 향한 채 까닥였다.
컬펜은 자기 덩치에 알맞게 시험용 검 중 가장 거대한 대검을 들고는 레이의 도발에 정직하게 반응했다.
쩌엉!!
네 번째 대련이 시작됐다.
컬펜은 거대한 덩치와 강한 힘을 타고났고, 검술 또한 그에 따라 강맹했다.
정교함이 아직 좀 부족했지만, 그쯤이야 시간을 들여 보강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카강!! 카앙!!!
레이는 컬펜이 휘두르는 대검을 정면에서 맞받아치며 대련을 이어갔다.
레이는 첫 번째 두 번째 대련 때와 마찬가지로 컬펜이 자기 실력을 펼쳐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준 뒤 적당히 대련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허나, 레이조차 예견 못 했던 사태가 대련 도중 발생했다.
뿌득!
"...?"
대련 도중, 레이가 새로 지급받았던 시험용 검이 공간검의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졌다.
검신이 절반 넘게 부러진 탓에 레이의 검은 졸지에 짧은 단검이 되어버렸다.
당황한 레이는 곧바로 시험관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려 대련 중단을 요청하려 했다.
허나.
컬펜은 레이의 검이 부러지자마자 괴성을 지르며 대검을 휘둘렀다.
"크-아-아-앗!!"
"...!"
콰앙!!
컬펜의 일격을 지면을 굴러서 피한 레이가 황급히 시험관을 돌아보았다.
대련 도중 무기가 부러지면 무조건 대련을 중단하고 무기를 교체해줘야 하는가?
이건 살짝 애매한 면이 있었다.
검술 중에선 상대의 병기를 훼손하고 파괴하는데 특화된 검술 또한 존재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금 일은 시험관의 재량에 따라 개입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사안이었는데, 시험관들은 그다지 레이의 편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기에 대련을 그냥 진행시켰다.
컬펜은 시험관이 대련을 중단시키지 않자 더욱 과감하게 대검을 휘둘렀다.
공격을 피해 연거푸 지면을 구른 레이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짜증이 난 레이는 어디 한 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부러진 직검'을 들어 올렸다.
부러진 검에 검기를 발현하기는 극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검의 구조가 뒤틀려 있는 탓에 마나의 기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인가? 그건 아니었다.
레이 정도 실력이면 부러져 나간 검을 들고도 잠시 동안은 안정적으로 검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츠즉!!
부러진 직검 위로 검기를 발현한 레이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대검을 막아냈다.
쩌엉!
"...!!"
예기치 못한 레이의 반격에 컬펜이 깜짝 놀랐다.
부러진 직검 위로 찬란한 검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고 당황한 건 비단 컬펜만이 아니었다.
시험관들조차 자기 눈을 의심하며 경악하는 사이.
레이는 곧바로 세차게 컬펜을 몰아붙여 결국 부러진 직검으로 컬펜을 패배시켰다.
"..."
털썩!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컬펜이 망연자실한 채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내가 지금 멀쩡한 무기를 들고 부러진 직검에 패한 것인가...?
믿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자괴감에 휩싸인 컬펜이 결국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상처 입고 절망한 사나이의 눈물에 지켜보던 모두가 같이 눈시울을 붉혔다.
컬펜에겐 응원의 목소리가 쏟아졌고 레이에겐 다시 야유가 쏟아졌다.
레이는 야유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언가를 해명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결국 레이는 레이 대로 자포자기해 그냥 남들이 원하는 컨셉을 밀고 나가주기로 했다.
그리고 찾아온 다섯 번째 대련에서.
새로운 시험용 검을 내미는 시험관을 향해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시험관님, 이번엔."
"..."
"그냥 처음부터 부러진 직검으로 해볼게요."
레이는 삐뚤어져 버렸다.
*
황실 직속 기사단 소속이자 오늘 시험관 역할을 맡은 카라한이 한 발 떨어진 거리에서 3차 시험이 진행되고 있는 대련장을 지켜봤다.
대련장은 좌절한 응시생들의 절규와 레이를 향한 야유의 목소리로 개판이 나 있었다.
레이는 그 와중에 부러진 직검으로 다섯 번째 대련 상대를 후드려 패고 있었다.
카라한은 턱을 괸 채 그 끔찍한 광경을 덤덤히 지켜봤다. 이제는 뭐라 따지고 들 힘도 없었다.
그때 카라한의 상급자가 나타나 봉투를 건넸다.
"답신이 왔다."
"아, 그렇습니까?"
카라한은 레이의 신분을 재차 확인해 달라고 상부에 요청했다.
시험장이 황도 인근에 붙어 있는 만큼, 연락이 빠르게 이루어져 3차 시험이 진행되는 동안 신분 재확인 절차가 끝난 모양이었다.
"위에서는 뭐랍니까?"
"직접 확인해 봐."
카라한은 상급자에게 받은 봉투를 열어보았다.
봉투 안쪽엔 서류가 몇 장 들어있었는데, 카라한이 신분 재확인 절차를 상부에 요청하며 동봉했던 레이의 신원과 관계된 서류들이었다.
"...?"
참고하라 보냈던 서류를 왜 다시 돌려보냈단 말인가.
카라한이 의아해하며 서류를 펼쳤다.
서류에는 카라한이 이미 알고 있던 내용들이 변함없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서류 끝자락에.
황제의 직인, 그러니까 제국의 국새가 새롭게 찍혀 있었다.
"..."
카라한은 말 없이 서류를 고이 접어 봉투 안에 넣었다.
답신에 제국의 국새가 찍혀 돌아왔다는 건... 정황상 레이를 황제가 보냈다는 뜻이 된다.
'로얄가드...? 제국 특무대 소속인가...?'
로얄가드를 이지스 내부에 생도 신분으로 잠입시켜야 할 어떤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
허나 그런 연유로 로얄가드를 보냈다고 해도, 입학 시험에서 깽판을 쳐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특별 입학으로 들여보냈으면 훨씬 편했을 것 아닌가.
한 가지 확실한 건, 황제가 입학 시험에서 깽판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을 리는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입학 시험에 참가한 저놈이 자의로 저 지랄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정말 경이로운 미친 새끼로군..."
애들 사이에서 진짜 저러고 싶을까.
카라한이 뒷말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