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이지스 입학 시험 응시자들의 1차 시험이 끝난 후.
오늘 시험관 역할을 맡은 황실 직속 기사단 소속의 카라한은 레이가 뚫어낸 표적 앞에 서서 인상을 찌푸렸다.
표적에 새겨진 구멍의 깊이는 기껏해야 10 cm 안팎이었다.
양단되다시피한 주변의 표적들 사이에서 참 소박한 흔적이었지만, 카라한은 도저히 웃지 못했다.
때마침 카라한의 동료가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넌 이거 되냐?"
"..."
카라한이 말 없이 자신의 검을 뽑아들어 검기를 발현해 보았다.
카라한은 시푸른 검기로 정면을 겨누고 정신을 집중했다.
츠즈즉!
거의 4 m까지 뻗어 나간 검기가 성장을 멈췄다.
정말 비효율적이고 무식하게 마나를 불어넣어 뻗어내봤자 기껏해야 4~5 m 수준이었다.
이 이상 검기를 성장시키기 위해선 마나 알갱이를 살상력도 거의 가지지 못할 만큼 옅은 농도로 쌓아올려야 했는데...
카라한은 그런 기예를 부리는 게 불가능했다.
카라한의 동료 또한 검기를 뽑아내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되는군."
"될 리가 없지."
아무리 독특한 마나 정제법과 검술을 익혔다고 해도 30 m 길이의 검기는 엑스퍼트 수준에서 보일 수 있는 기예가 아니었다.
그걸 재차 확인한 카라한이 낮게 중얼거렸다.
"상부에 응시생의 신원 확인을 재요청해야겠는데..."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을 앞에 두고 고개를 저은 카라한이 다시 자기 역할을 수행했다.
부서진 표적들과 파편들을 수거하고, 혹시라도 부정의 흔적이 없는가 확인한 뒤 전부 한 자리에 모았다.
시간이 꽤 걸리는 작업이었다.
"후우..."
일을 마치고 손을 탁탁 턴 카라한은 다른 시험관과 함께 2차 시험이 진행되고 있는 건물로 향했다.
슬슬 2차 시험도 끝이 났을 타이밍이었다.
허나 카라한이 결계를 넘어 입장하자마자 굉음이 귓가를 쾅 울렸다.
"...?"
카라한은 상급 정령이 날뛰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이그넷의 분노 아래 상급 화염 정령이 불길을 쏟아내며 날뛰어대고 있었다.
카라한은 심란함을 감추지 못하고 한 손으로 얼굴 위를 덮었다.
*
이그넷은 모욕을 참지 않는 성격이었다.
더군다나, 고작 '응시생' 따위가 면전에서 건방을 떠는 꼴을 가만히 지켜볼 만큼 자비롭지 못했다.
성질이 폭발한 이그넷은 징계 따위 감수하고 레이를 작정하고 조질 생각으로 상급 정령을 불러냈다.
화르륵!!
독수리 형상의 상급 화염 정령이 실체화됐다.
상급 화염 정령의 이름은 '코르코르'.
귀여운 이름에 비해 코르코르로부터 발산되는 화염의 기세는 결코 귀엽지 않았다.
레이가 공간을 가득 메우는 열기를 느끼며 정색했다.
"아니 저 시발련이?"
이그넷이 실체화시킨 코르코르는 레이를 통째로 구워버릴 기세로 열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레이는 정말로 짜증이 났다.
레이는 방금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정령을 안 잡아 죽이고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정말 기를 쓰고 노력하고 있었다.
헌데 이그넷이 급발진하더니 상급 정령까지 실체화시키며 압박해오자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저게 진짜 뒈질라고..."
양쪽 다 서로를 향해 발작하는 사이.
코르코르가 거대한 날개를 휘저으며 푸른 화염을 사방에 쏟아냈다.
화르륵!!
너울지는 푸른 화염이 삽시간에 실내를 뒤덮었다.
대기하던 다른 마법사들이 응시생들을 지키기 위해 황급히 마법을 발현해 불길을 방어했다.
레이가 서 있던 곳도 푸른 불길로 뒤덮여 타올랐다.
시험장에 있던 모두가 불길에 휩쓸린 레이를 보고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솔직히, 다들 레이가 약간이라도 무사하지 않았으면 싶었지만 그게 허황된 기대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불꽃 속에서.
레이가 예비용으로 받은 두 번째 검을 뽑아들었다.
"하, 씨..."
쏟아지는 화염 아래 선 레이가 양손에 쥔 검을 서로 강하게 충돌시켰다.
우웅!!
공간이 일그러진다.
머리 위로 쏟아지던 화염이 왜곡된 공간을 타고 흐르며 위아래로 요동쳤다.
불꽃의 장막이 일순 종잇장처럼 얇아진 순간.
레이가 불꽃의 장막을 단숨에 베어내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 찰나 레이가 왼 손에 쥐고 있던 검이 공간검의 부하를 버티지 못하고 부러져 나갔다.
트득!
"가지가지..."
아주 싸구려 검은 아니었지만, 기껏해야 응시생들에게 대여해주는 검이다 보니 품질이 좋지가 않았다.
레이는 반으로 쪼개진 검을 신경질적으로 던져 버리고는 허공을 밟았다.
발 아래로 발산한 마나를 막처럼 만들어 디딤돌로 삼은 레이가 몸을 앞으로 가속시켰다.
레이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끌렸기에 빠르게 결과를 내야 했다.
한편 이그넷은 허공을 딛고 다가오는 레이를 향해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이그넷의 통제를 따라 하급 정령 둘과 중급 정령 하나가 레이를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이그넷이 히죽 웃었다.
'이래도 정령을 안 벨 거냐?'
정령들은 레이를 포위하듯 감싼 채 돌진하고 있었다.
레이가 정령들을 회피하기엔 거리가 너무 가까워 불가능했다.
또한 돌진하는 정령들은 그 자체가 강력한 불과 바람이었에 인간이 맨몸으로 그들을 받아내는 건 자살 행위였다.
이그넷은 이번에야말로 레이가 정령을 향해 칼질을 하리라 확신했다.
아님 죽을 테니까 말이다.
저러다 레이가 크게 다치면 이그넷도 분명 곤란해질 테지만.
그럼에도 이그넷은 레이가 이곳에서 더 이상 건방을 떠는 꼴을 용인해줄 생각이 없었다.
허나 레이는, 이그넷의 기대를 정면에서 배신했다.
"하, 시발."
다가오는 정령을 보고 욕설을 지껄인 레이가 이를 꽉 물었다.
직후, 레이의 신체가 급격히 가속했다.
콰앙!
오버드라이브.
하르시아의 절기가 행해지며 레이가 포위망의 틈새를 꿰뚫고 나아갔다.
레이를 포위하려 했던 정령들이 한발 늦게 포위망을 벗어난 레이를 돌아봤다.
이그넷은, 일이 이 지경이 되어서도 상대를 농락하길 포기 않고 헛짓거리를 이어가는 레이를 보고 거의 경기하다시피 했다.
급격히 거리를 좁혀오는 레이를 향해 이그넷이 분노를 토해냈다.
"저 새끼 죽여버려!!!"
상급 화염 정령, 코르코르가 계약자의 명령에 따라 레이의 앞을 막아서며 날개를 펼쳤다.
화르륵!!
푸른 불길이 쏟아지며 레이를 막아선다.
상황이 그쯤 되자 레이도 악에 받쳐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음 같아선 코르코르의 대가리를 검으로 쪼개버리고 싶었지만, 레이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화아악!!!
코르코르가 만들어낸 응축된 불길이 지면을 쓸어내며 다가왔다.
레이는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오버드라이브를 사용한다 해도, 코르코르를 따돌리고 이그넷에게 접근하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레이는 검기를 한계까지 뽑아내 화염덩어리를 베어낸 후 곧장 검을 역수로 돌려 잡았다.
재차 불길을 토해내려는 코르코르의 안면을 향해, 레이가 검 자루를 휘둘렀다.
쩌억!!
[?!]
고개가 휙 돌아간 코르코르가 순간 얼을 탔다.
아팠다. 뭐 죽을 만큼 아픈 건 아니었는데, 어쨌든 '고통'이 느껴졌다.
코르코르는 너무 당혹스러워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각이 '고통'이 맞는지 재차 돌아보았다.
그 당혹감 일부가 이그넷에게도 전해져서, 이그넷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 찰나의 틈을 레이가 오버드라이브까지 사용해서 파고들었다.
촤악!
레이의 검이 이그넷의 팔뚝에 감겨 있던 흰색 완장을 베어버렸다.
목표를 완수했다.
이그넷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2차 시험이 끝나있었다.
레이는 완장을 베어내자마자 하나 남은 칼을 내던지며 짜증을 토해냈다.
"아니, 시발!!"
레이는 정말로 짜증이 나 있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사람 차별해도 되는 겁니까?! 예?! 왜 나만 난도가 달라요?!!"
"익, 이익...!"
"거 아직 노망날 나이도 아닌 것 같은데 사리분별 좀 똑바로 합시다!! 알아들어요?!!"
계속된 레이의 폭언에 결국 정신줄을 놓아버린 이그넷이 서클을 활성화시켰다.
"내 기필코 이 씹새끼를 죽여버리겠다!!!"
이그넷은 끔찍한 모욕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마법진을 그려냈다.
레이 또한 곧장 버렸던 검을 주워들며 마주 욕설을 토했다.
씹새끼야, 시발련아, 그래 어디 한 번 끝까지 해보자, 누가 뒈지나 보자...
온갖 험악한 욕설이 난무하며 기세가 폭발하려던 찰나 다른 심사관들이 달려들어 둘을 뜯어말렸다.
이그넷은 심사관들에게 팔다리가 구속당해 끌려가면서도 계속 소리쳤다.
"놔라!! 이거 놔라!! 오늘 기필코 저 씹새끼를 죽여버리겠다!!"
"안 됩니다, 이그넷 님!! 제발 참으세요!!"
심사관만 다섯이 들러붙어 이그넷을 끌고 간 뒤에야 시험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레이가 손에 쥔 검을 다시 던져버리고 머리를 쓸어올렸다.
호흡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킨 레이가 옆에 있던 심사관에게 물었다.
"제 기록이 어떻게 됩니까?"
"..."
심사관이 말 없이 응시생들의 순위표를 레이에게 보여주었다.
2차 시험은 클리어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수록 점수가 차감되는데, 응시생들 중 레이가 정말 압도적으로 꼴찌였다.
상급 정령까지 소환되어 드잡이질을 해야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레이가 한숨과 함께 욕설을 중얼거렸다.
"하, 시발..."
"..."
심사관은 그냥 침묵하고 있기로 했다.
본디 미친 새끼를 건드려봤자 얻을 게 없는 법이었다.
*
이지스 입학 시험에서 1차와 2차 시험의 과제는 매번 조금씩이나마 변동이 있었다.
허나 3차 시험만큼은 웬만해선 변동 없이 치러졌는데, 3차 시험 과제는 바로 응시생들 간의 대련이었다.
대련은 토너먼트 형식으로 치러졌으며, 응시생들은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반드시 상대를 꺾어야 했다.
종종 시험관들이 특정 응시생의 실력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추가적인 시험을 진행하거나 면담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엔 이지스는 3차 시험까지 응시생들이 보여준 실력과 잠재력을 평가해서 합격자를 뽑았다.
레이에게 있어 3차 시험의 과제가 응시생들 간의 대련이라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적어도 1차와 2차 때처럼 헛짓거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레이는 한숨이 나왔다.
"하아..."
1차와 2차 시험 때 레이는 너무 낮은 점수를 받았다. 정확히는, 최저점을 받았다.
점수 상으로 레이가 이지스에 붙기 위해선 3차 시험의 토너먼트 대결에서 결선까지는 가야했다.
'애들 노는 곳에서 뭐하는 짓이냐...'
레이는 자신이 파릇파릇한 애들 노는 곳에서 훼방질이나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뒤늦게 회의감과 자괴감이 몰려왔다.
허나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본래는 1차와 2차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3차에선 다른 응시생들에게 적당히 져주고 시험을 마칠 계획이었지만.
이젠 그냥 죄다 꺾어버리고 결선까지 진출해야 했다.
레이가 하늘을 보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윽고 레이의 수험 번호가 불렸다.
레이는 새롭게 지급 받은 시험용 검을 들고 대련장에 올라갔다.
레이의 첫번째 대련 상대는 '신분차별자 쥬세핀'이었다.
이제 서로 간단히 인사를 하고 대련을 진행하면 되었는데...
갑자기 쥬세핀이 훌쩍이며 울기 시작했다.
"흐읍...! 커흡...! 큽...!"
"...?"
갑자기 상대가 질질 짜기 시작하자 레이는 매우 당황했다.
쥬세핀은 어떻게든 자기 감정을 추스르려 했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세상 서럽게 끅끅거렸다.
계속해던 훌쩍이던 쥬세핀이 레이를 향해 목소리를 쥐어짰다.
"나는, 나는 널 용서할 수가 없다. 내가, 내가 대체 어떤 각오를 가지고 이 자리에 섰는데..."
"..."
"근데 너는... 찰나의 오락을 위해... 나의, 우리의 각오와 의지를 폄하하고 기만하고...!"
대련장을 지켜보던 응시생들과 시험관들과 참관인들...
그들 모두가 쥬세핀에게 깊게 이입한 채 쥬세핀과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또한, 그들 모두가 정말 인간 폐기물을 보는 시선으로 레이를 쳐다봤다.
데런과 요하나의 시선 또한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레이는 뒷목이 당겼다.
레이는 마음 같아선 쥬세핀에게 아가리 좀 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진짜 뒷수습이 안 될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대련장을 눈물 바다로 만든 쥬세핀이 마침내 검을 들어 올렸다.
"네가... 네가 날 아무리 끔찍하게 농락해도... 내 마음만은 꺾지 못할 것이다...!"
만화 주인공 같은 대사를 내뱉는 쥬세핀에게 결국 레이가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아니 시발 좀... 적당히 하지?"
"흡...!"
쥬세핀이 움찔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욕설을 지껄인 레이를 향해 대련장을 지켜보던 이들이 한마음으로 온갖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레이는 쏟아지는 야유 속에서 깝깝한 얼굴로 자기 콧잔등을 말아 쥐었다.
기만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