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21화 (221/446)

221화

황실 직속 마법사 매그나는 소수의 로얄가드와 함께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에 와 있었다.

워프게이트를 열기 위해서였는데, 매그나는 의아함과 흥미로움을 동시에 내비치며 로얄가드 다카우스에게 물었다.

"귀한 손님이 오시나 보오?"

"나도 자세히 아는 것은 없소."

워프게이트가 사람 하나 왔다갔다한다고 열었다 닫는 물건이 아니었다.

허나 지금 전쟁이 터진 것도 아닌데 단 한 명을 위해 워프게이트를 연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어지간히 대단한 영향력이나 위업을 지닌 게 아니라면 이런 특혜를 받을 수는 없었다.

물론 매그나는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은 없었기에, 다카우스가 말을 돌리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내 활성화된 워프게이트 너머로 한 사람이 건너왔다.

매그나는 건너온 사람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로얄가드와 함께 철수했다.

워프게이트를 통과한 레이가 마중을 나온 스페라에게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스페라 님. 그동안 무탈하셨나요?"

"그럼요. 어서 와요, 레이."

레이는 스페라와 우선 인사를 나눈 후 요하나를 돌아봤다.

요하나는 평소 안 입던 가벼운 드레스 차림을 한 채 첫 마디를 뭐라 꺼내야 하나 쭈뼛거리고 있었다.

레이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나 없다고 안 울고 잘 지냈어?"

"..."

내가 잘못했어요, 흐에에엥... 그러니까 떠나지 마요, 흐에에에엥...

열세 살쯤 되었을 때였나.

레이가 마탑을 간다고 몇 달 떠난다고 했을 때 요하나는 레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그리 울어댔다.

세상 쪽팔렸던 기억이 떠오른 요하나는 결국 인사보다 주먹이 먼저 나갔다.

레이가 요하나의 주먹을 퍽퍽 얻어맞으며 데런을 돌아봤다.

"너도 잘 지냈고?"

"네, 형님. 저도 잘 지냈습니다."

데런이 레이와 요하나를 번갈아 보며 웃음기 섞인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 뒤로 레이는 면식이 있던 프리슬란 가문의 관계자들과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았다.

어느 정도 인사가 끝나자 스페라가 레이에게 다가왔다.

"증조부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에른스트 님... 프리슬란 후작님께서?"

"네."

"아... 그럼 바로 찾아봬야겠네."

레이는 그 길로 에른스트의 집무실로 안내받아 에른스트와 독대했다.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은 레이는 가장 먼저 루비하 왕국의 내전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에른스트가 레이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루비하 왕국에 관해선 제국 또한 주시하고 있었다.

에른스트, 그리고 인류의 오랜 역사를 꿰고 있는 황제는 결국엔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시기였는데,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건 명백했다.

에른스트가 벽에 걸린 지도를 바라보았다.

"전쟁을 수행하기는 지금이 적기이긴 하다."

현재 황제의 권위는 드높았다.

포이보스에게 부족했던 정통성을 모로스가 채워주기도 했으며.

포이보스가 황위를 계승하기 전 간을 보며 꾸물거렸던 귀족들은 앞으로 한동안은 고개를 수그리고 있을 예정이었다.

또한 근래 악마 숭배자들과 연관된 사태가 연달아 터졌다.

이런 때에 황제가 악마 숭배자와 야합한 세력을 말소하기 위한 개전을 명한다면 함부로 반발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앞으로 몇 년 더 시간이 지난다면...

제국이 무력을 휘두르는 것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슬금슬금 커지기 시작할 터다.

"그런 여론 따위 무시하고 짓밟으면 된다. 허나 귀찮은 일이지."

황제의 권위가 높고 반발하는 목소리를 내기 힘든 이 시점에서 전쟁을 치르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현명했다.

그런 측면에서 레이와 황제, 그리고 에른스트는 이해관계가 맞았다.

벽에 걸린 지도를 살피던 에른스트가 다시 레이를 돌아봤다.

"제국은 적기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말한 레인저 단장의 포섭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진행해보라 명하겠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한다면, 유물 두 개는 반드시 회수해야 됩니다. 그래야 확실히 위험을 제거할 수 있을 겁니다."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보았던 지팡이와 1황자가 사용했던 사령검을 가리키고 하는 말이었다.

에른스트가 알았다고 답하고는 필립스 백작령 이야기를 꺼냈다.

"필립스 백작령에 병력을 파견해 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이다."

레이 또한 그 점에 대해선 동의했다.

아마 전쟁이 발발하면 필립스 백작령 사람들은 한시적으로 대피해야 할 텐데, 에른스트는 그 부분에 대해 세심하게 신경 써주겠노라고 레이에게 확답했다.

그렇게 루비하 왕국과 관련된 이야기를 에른스트와 끝낸 레이는, 차를 홀짝이다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근데 후작님, 황도에 있는 성검 말이죠, 제가 뽑아도 됩니까?"

에른스트도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내가 왈가왈부할 사안은 아니다만, 성검을 뽑을 생각이었으면 굳이 네 공적을 숨길 필요가 있었느냐?"

"그렇긴 하죠?"

레이가 가볍게 웃었다.

에른스트는 잠시 고민하다 화제를 돌렸다.

"곧 네게 하사할 무구가 완성된다는구나."

드래곤하트의 파편을 이용해 제작한다던 아티펙트였다.

레이는 도리어 그쪽에 더 관심을 보였다.

*

레이는 에른스트와 독대 후 스페라와 식사 자리를 가졌다.

요하나와 데런 또한 식사에 초대되어 같은 식탁에 모여 앉았다.

레이는 스페라와 한 번 더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그럼요. 근데 레이는 조금 지쳐 보이네요."

레이가 자기 뒷목을 주물러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마차 타고 오느라, 그게 조금 피곤했나 봐요."

"식사하고 들어가서 좀 쉬어요."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내 음식이 나왔다.

스페라가 슬그머니 레이 가까이 몸을 붙이더니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식사하는데 요하나 얘기를 해도 되나요?"

"..."

스페라 딴에는 예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바탕 삼아 농담으로 한 소리였다.

애초에 요하나는 지금 레이 바로 앞에 앉아있었다.

레이는 잠깐 옛날 생각이 나 콧잔등을 매만지더니 담담하게 웃었다.

"물론 됩니다."

요하나는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이해 못 해 두 눈을 깜박였다.

어쨌든 레이의 동의를 받은 스페라가 허리를 곧게 펴며 당당하게 말했다.

"오늘은 제가 이겼어요."

스페라의 입가에 뿌듯한 웃음이 감돌았다.

레이와 요하나는 조금 늦게 스페라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당황한 요하나가 뒤늦게 소리쳤다.

"스, 스페라 님! 어제는 제가 이겼잖아요!"

"어쨌든 오늘은 제가 이겼어요."

둘의 말싸움을 듣고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킥킥 웃으며 허리를 숙였던 레이가 스페라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스페라는 뿌듯해했고 요하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레이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다시 한 번 웃음을 머금었다.

요하나는 차마 스페라에게 바락바락 따지고 들지 못한 채 고기만 쓱쓱 썰었다.

레이는 그 모습을 보며 요하나가 옛날보다 고기 자르는 모양새가 많이 우아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이젠 요하나보다 레이가 고기 자르는 모양새는 더 어설펐다.

레이야 귀족들 예법은 필요할 때 잠깐잠깐 배우고 말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레이는 요하나와 데런을 따라 고기를 썰어보며 스페라에게 물었다.

"이지스 입학 절차가 어떻게 되나요?"

"음... 입학 방법은 여러 개 있긴 한데..."

이지스는 황실이 가용할 정예 병력을 양성하는 사관 학교에 가까웠다.

신분이 좀 처지더라도 재능 있는 자들은 선별하는 데 집중했다.

물론 아무리 재능 중시라 해도 평민 이하의 신분이 이지스에 입학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평민에게는 애초에 자기 재능을 남에게 내보일 수 있을 만큼 개화할 기회 자체가 잘 주어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신원의 확인과 검증이 어려웠다.

그렇기에 주로 한미한 가문 출신의 귀족 자제나 젠트리 계층이 이지스의 문을 두드렸다.

물론 제국 고위층의 자제들도 이지스에 입학하곤 했다.

황제를 가까운 곳에서 보필하는 중앙 귀족의 자제들이 입학하는 경우도 있었고.

힘 있는 귀족가의 자제들이 추후 황실의 무력 집단에 속할 자들과 친분을 쌓고 인맥을 만들어 놓기 위해서 이지스에 입학하기도 했다.

"계층적으로 좀 양분화된 면이 있어요."

스페라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 설명을 덧붙였다.

"입학 방법은 크게 특별 입학이랑 일반 입학으로 나누어지는데, 요하나와 데런은 입학 시험을 치르고 일반 입학을 하게 될 거예요."

요하나는 제국의 적당한 귀족 가문이 신분을 보장해준 것처럼 꾸미고 이지스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그후 황실이 요하나의 잠재성을 확인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 그 재능을 개화시켰다...라는 게 앞으로의 줄거리였다.

물론 시간이 좀 지나면 요하나의 출신 성분에 대해 알 사람은 다 알게 될 거다.

그럼에도 정치라는 게 대외적으로 어찌 치장하느냐가 중요했기에 이리 시답잖은 절차를 밟게 된 것이다.

누군가는 꼴값을 떤다고 생각하겠지만, 레이는 때때로 눈 가리고 아웅도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레이가 고기를 썰며 물었다.

"그럼 저도 일반 입학인가요?"

"레이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해요. 레이까지 굳이 출신과 신분을 속일 필요는 없긴 한데..."

필립스 백작령 출신의 레이.

대외적으로 '필립스 백작령 출신의 레이'는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탐낸 인재이자 스페라 프리슬란의 혼약자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로 알려져 있었다.

물론 레이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레이에 관한 소문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전에 황위 계승 문제로 제국이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레이에 관해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건 필립스 백작가와 황실을 제외하면 프리슬란 가문과 알슈테인 가문쯤이었다.

'그 외에 내가 어디서 신분을 노출한 적이 있던가...?'

알리모 왕국에서.

제국의 파견대와 접촉했을 때 얼굴을 한 번 노출하긴 했다.

헌데 그때가 메테오가 떨어진 직후여서 얼굴이 완전 개판이었다.

그 당시 마주 보고 대화한 로얄 가드를 제외하면 레이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자들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음..."

생각을 한 번 정리해본 레이가 입을 열었다.

"이름은 그냥 두고 출신지만 적당한 곳으로 하나 꾸며서 만들어 주세요."

스페라의 혼약자란 타이틀은 어그로가 과했다.

레이는 이지스에서 조용히 지내며 전반적인 교육 환경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한 학기 정도 지내보다 큰 문제가 없으면 그만둘 예정이었고 말이다.

스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렇게 전해 놓을게요."

"근데 입학 시험 과제가 뭡니까?"

"...글쎄요? 시험 과제는 기밀이고 매번 조금씩 바뀐다고 듣긴 했는데..."

스페가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알아봐 줄까요?"

레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레이와 아이들이 입학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춰주었을 뿐, 에른스트나 스페라는 그 이상 무언가를 신경쓰진 않았다.

레이와 요하나는 물론이고, 데런 또한 이지스에 충분히 입학 가능한 훌륭한 재능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어떤 과제가 나오든 충분히 통과할 수 있었다.

레이도 너무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합격점을 받으면 되었고 말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레이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

얼마 뒤, 이지스 입학 시험이 진행되고 있는 장소에서.

1차 시험에 응시한 레이가 시험관을 돌아보며 혹시나 해서 되물었다.

"뭘 어떻게 하라고요?"

"검기를 쏘아내서, 표적을 부숴라. 최소 5 cm 이상 깊이의 흔적을 남겨야 타격이 유효하다고 인정된다."

"..."

레이가 시험관이 가리키는 공터를 바라봤다.

공터 위엔 일정 거리마다 단단한 암석으로 된 표적이 세워져 있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게 30 m 거리에 있었다.

"...30 m보다 더 가까운 표적은 없나요?"

시험관이 한숨을 푹 쉬더니 한심한 얼굴로 레이를 바라봤다.

"30 m 떨어진 표적도 타격하지 못하면 낙제다."

"..."

검을 들고 한참 동안 표적을 노려본 레이가, 깝깝한 감정이 담긴 욕설을 중얼거렸다.

"하, 시발, 좆 됐네."

기만 (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