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20화 (220/446)

220화

"사령검이 회수되었다."

"...사령검?"

"1황자가 사용했던 악마의 유물."

"아, 그게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었어?"

사령검. 네크로맨서 또는 사령군주라 불렸던 과거의 사도가 사용한 유물.

레이는 그 유물이 1황자와 함께 녹아서 소실된 줄 알았으나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로베리가 말을 이었다.

"몇 년 전 발견되어 회수됐다. 왕실로 보냈고, 파괴되었다고 알고 있다."

"파괴했을 리가. 자꾸 전쟁 일으키려는 이유를 알겠네."

대규모 전쟁에 의해 막대한 전사자가 발생하면 네크로멘서나 그에 준하는 존재가 쉽사리 힘을 기를 수 있었다.

꼭 네크로멘서가 아니더라도, 악마 숭배자들은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전사자들의 사체와 원한을 활용해 수작질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소규모 특임대를 통한 지휘부 타격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레이가 잠깐 인상을 구겼다가 피식 웃었다.

"그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은 제국과 손잡을 의사가 있다고 판단해도 되는 건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연락책을 제공해주기를 희망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음..."

잠시 고민한 레이가 괜찮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열흘 뒤 자정에... 시그니 산맥에 있는 다비드의 추모비 앞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보내. 연락책을 마련해주지."

루나에게 부탁하면 연락 가능한 아티펙트 하나쯤은 얻어낼 수 있을 터다.

이를 통해 로베리가 필립스 백작가에 연락하도록 한 뒤, 필립스 백작가에서 다시 에른스트나 황실 쪽으로 연락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레인저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전쟁 계획을 수립하는데 꽤나 도움이 될 터다.

루비하 왕국이 본격적으로 내전 사태에 치닫거나 그에 준하는 상황에 처하면.

그때 제국이 확실하게 불순한 무리들을 처단하기 위해 움직일 거다.

제국에게 그 정도 힘과 판단력은 존재했고, 레이 또한 상황이 그리되도록 의견을 개진할 생각이었다.

레이와 합의를 끝낸 로베리가 한발 물러섰다.

"네 말 대로 하지. 열흘 뒤에 사람을 보내겠다. 지금부터 10분 정도 기다려 줄 테니... 무사히 탈출하길 바란다."

산속에서 레인저들이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물론 보여주기 식에 가까웠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무운을 빌지."

로베리와 레이가 동시에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레이와 루나는 무사히 레인저들의 포위망을 탈출했다.

레이는 칼가를 타고 루나와 함께 날아가다가 입을 열었다.

"루나, 부탁이 있어."

부탁이 있다는 레이의 말에 루나의 표정이 조금 더 차가워졌다.

루나가 칼가 위에서 돌아앉아 레이를 마주 보자 레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나 이지스에 가 있는 동안 필립스 백작령 좀 잘 부탁할게."

"..."

얼마 전 루나는 레이에게 이지스에 따라가겠다고 했었다.

이지스에 입학하는 건 아니었지만, 루나는 적어도 황도 인근에서 생활하며 유사시 레이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

루나의 표정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읽어낸 레이가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루나, 거기 뭐 위험할 게 없어. 걱정 안 해도 돼."

정체 불명의 권력을 가지고 똥폼을 잡는 학생회도 없다.

레이를 제외하면 생도가 교관보다 강한 생도-교관 역전 세계도 아니었다.

심심하면 방위가 뚫려 악당들에게 침입을 허용하는 곳도 아니었고.

갑자기 공간 단절 결계가 펼쳐져 교관 없이 생도들만 고립될 일도 없었다.

황도에 있는 이지스에 그딴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려면 나라가 망했어야 가능했다.

"어... 물론 기합찬 똥군기와 출신 차별은 존재하겠지만..."

어쨌든 레이에게 실질적으로 위협이 되는 요소는 결코 아니었다.

레이에게 당장 위협이 될 요소는... 이젠 레아라는 존재 뿐이었다.

레이는 루나가 필립스 백작령에 남아서 사람들을 지켜주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레이가 계속해서 설득을 이어가자, 루나가 결국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아이 씻팔, 메테오 맛 좀 볼래?

순간 꿈에서 들었던 루나의 경고가 떠오른 레이가 흠칫 놀랐다.

잠시 뒤로 몸을 뺐던 레이가, 루나의 차가운 시선을 받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후 괜히 실실 웃었다.

"어, 왜, 왜? 루나야?"

"...한 번만, 한 번만 더 제가 없을 때 다쳐서 돌아오면... 양보 안 할 거예요."

결국 다치면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레이가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

걱정하지 말라고 해놓고서 잔뜩 다쳐서 돌아왔던 게 한두 번이었던가.

루나는 불만을 내비치면서도 더는 따지고 들지 않았다.

루나 또한 이지스에 레이에게 위협이 될 요소가 실질적으론 없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 곧 이지스에 간다.

레이는 요하나와 데런을 떠올리며 잘 지내고 있기를 바랐다.

*

시간이 계속 흘렀다.

레이는 루나에게 부탁해 통신이 가능한 아티펙트를 받아서 레인저에게 건넸다.

레인저 단장과 연락이 가능해지면서, 제국은 물론 필립스 백작령 또한 루비하 왕국의 상황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레이는 루비하 왕국의 내전과 제국의 참전에 관해 에른스트와 깊게 이야기를 나누어 볼 생각이었다.

그 뒤로 얼마 안 가 레이가 떠나야 하는 날짜가 다가왔다.

레이는 떠나기 전, 참 오랜 만에 가디 자작가의 시종장, 피에트로와 만났다.

피에트로는 이제 노환이 찾아와 실무를 보기엔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시종장으로서 역할과 임무는 리파를 비롯한 몇몇 후임들에게 많이 넘겨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피에트로는, 디나르에서 필립스 백작령의 영주성까지 찾아와 레이를 마나 거듭 감사를 전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자꾸 고개 숙이시면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피에트로는 아들을 잃은 후 울트가 귀환하기만을 바라면서 지냈다.

허나 울트는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고 밖을 배회했고, 그러다가 실종되었다.

어쩌면 울트조차 얼굴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 아닐까, 그리 두려움에 떨었을 때.

레이가 울트를 구출해 무사히 귀환시켰다.

피에트로는 이에 대해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전한 후 뒤로 물러났다.

레이는 약간은 착잡한 얼굴로 입을 다시며 울트를 돌아보았다.

"가디 자작님, 제발, 사고치지 말고, 당장은 얌전히 계세요."

"알겠어."

"이번에도 사고 치시면 진짜 수습 못합니다. 티티에게 해가 되는 판단을 하지 마세요."

"알겠다니까."

몇 번이나 울트에게 당부한 레이가 잠시 고민하다 결국 한 가지를 더 당부했다.

"보육원 주변이나 애들 주변에 함부로 접근하지 마시고요."

"..."

울트가 굉장히 아니꼬운 얼굴로 레이를 쳐다봤다.

레이 또한 아니꼬운 시선으로 마주 울트를 쳐다봤다.

그 사이 알레시아가 다가와 레이에게 졸랐다.

"나의 기사여! 나도 동행하면 안 되겠느냐?"

"아가씨께서 이지스에 입학할 것도 아니고... 황도에 가면 어디서 머무시게요? 숙소를 잡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들 텐데."

"프리슬란 가문의 저택이 있지 않느냐?"

"..."

프리슬란 가문의 저택에서 손님으로 지내면서 밥만 축내겠다는 소리였다.

알레시아는 그쯤은 즐겨도 되지 않냐면서 떳떳하게 허리를 폈다.

알레시아가 왜 굳이 레이를 따라가려 하는가?

그곳에 맛있는 공짜 다과와 공짜 찻잎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덧붙여 도시 구경도 좀 하고 말이다.

레이가 깝깝한 얼굴로 자기 아가씨를 바라보다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옛날에 비해선 덜 포동포동해진 옆구리를 푹 찔린 알레시아가 레이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레이가 툴툴거리는 알레시아를 향해 피식 웃었다.

"잘 지내고 계세요. 올 때 선물 사올게요."

"나의 기사가 그리 말한다면, 기다리고 있겠느니라!"

동행하겠다는 건 처음부터 농담이었기에, 표정을 푼 알레시아가 화답했다.

그때 레아가 쪼르르 다가와 알레시아 곁에서 눈치를 보았다.

알레시아가 옆으로 비켜주자 레아가 레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오빠! 레아도 선물! 레아도 선물!"

요즘 레이가 꽤 사근사근하게 대해 주었기에 긴장이 풀린 레아가 레이에게 졸랐다.

레이는 굉장히 딱밤이 마려웠지만, 꾹 참고 레아를 들어서 안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레아 선물도 꼭 사올게."

"와아! 오빠 최고!"

선물 사오겠다는 레이의 말투가 참 사무적이었지만 레아는 어쨌든 좋았다.

레아가 해맑게 웃으며 레이를 꽉 안았다.

레이가 레아를 위아래로 흔들어주며 벨라에게 다가갔다.

벨라는 레이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한 번 넘겨준 후 따뜻하게 웃었다.

"아들... 잘 다녀오고, 다치지 말고."

"엄마도 잘 지내. 저번에 얘기했던 거, 꼭 잊지 마시고."

레이는 레아에 관한 주의사항을 벨라에게 설명했었다.

레아를 외부인에게 함부로 내보이지 않는 것도 조심해야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레이는 레아가 벨라 곁에서 자신의 힘을 제어 못 해 사고를 일으킬까 봐 걱정됐다.

레이는 레아의 힘을 받아낼 수 있었지만 벨라는 레아의 불길을 받아낼 그 어떤 수단도 없었다.

레이는 벨라에게 방어용 아티펙트를 선물함과 동시에 되도록 레아를 데리고 지미나 매튜와 멀리 떨어지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레아의 힘이 조금이라도 폭주하면 지미 정도는 되어야 확실히 수습할 수 있었다.

레이는 그에 관해 한 번 더 돌려서 당부하고는 벨라와 포옹했다.

그후 배웅을 나온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눈 끝에 레이는 카렌과 마주섰다.

카렌은 약간 부끄러워하다가 보석이 박힌 브로치를 레이에게 건넸다.

레이는 브로치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신성력에 눈을 크게 떴다.

카렌이 뒤늦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 내가 축성한 거야. 대단한 물건은 아니지만..."

카렌 말마따나 대단한 물건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활기를 약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었을 뿐, 제대로 된 고위 성직자가 축성한 물건에 비해선 그냥 부적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기쁘게 웃으며 브로치를 받았다.

레이가 카렌을 한 번 안아주며 말했다.

"건강 조심하고, 잘 지내고 있어."

"응. 레이도 다치지 말고 잘 다녀와."

마지막으로 필립스 백작의 차례가 되었다.

필립스 백작은 답답함을 뒤로 숨기며 레이를 바라보았다.

필립스 백작은 여전히 레이가 대체 어떤 의도로 자신의 작위조차 고사하고 이리 행동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레이는 아직 그에 대해 필립스 백작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레아의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하는지 결심이 섰을 때, 그때 진실을 전부 밝힐 생각이었다.

어쨌든 필립스 백작에게 레이는 은인이었다.

필립스 백작은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며 레이를 배웅했다.

"잘 다녀오게."

"네, 감사합니다."

워프게이트까지 타고 갈 마차는 필립스 백작이 준비해주었다.

레이는 다시 한 번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마차에 올랐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나가 등을 돌렸다.

"..."

루나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루나는, 아프텔로부터 과거 공간검을 익히려 했던 자들이 어떤 꼴로 죽었는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과 달리 레이는 공간검을 익히는데 성공했지만.

과연 부작용까지 완전히 극복한 것일까?

만약 레이에게도 과거 죽어 나갔던 자들과 유사한 문제가 나타난다면, 해결책이 필요했다.

늦기 전에 말이다.

기만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