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레이와 마주쳤던 레인저가 레인저들만의 연락책으로 신호를 보낸 후.
레이와도 꽤 인연이 있었던 자가 다른 레인저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브랜딜이었다.
브랜딜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수하를 향해 무언가를 질문하려던 순간 레이가 검을 가볍게 한 바퀴 돌렸다.
쾅!
허공을 찢어낸 도약 검기가 브랜딜의 바로 앞에 떨어져 내렸다.
미간을 찌푸린 브랜딜이 레이에게 다시 시선을 옮겼다.
"설마...?"
"오랜만이군."
"하..."
브랜딜이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가 싸울 생각은 없다는 듯 검을 꽂아넣은 후 브랜딜에게 물었다.
"여전히 직위는 중대장인가?"
브랜딜이 어깨를 으쓱였다.
몇 년째 진급하지 못했다는 뜻이지만, 솔직히 레이는 브랜딜이 아직까지 레인저 부대에서 버티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브랜딜의 행적을 감안하면 진즉 숙청당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이는 일단 자기 사정을 설명했다.
"저놈들은 내가 이 근방을 정찰하던 중 발견했다. 제국병을 흉내내고 있었지만, 아니더군. 네놈들이 보낸 첩자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음..."
브랜딜 입장에서도 상황이 좀 골 때렸다.
머리를 긁적인 브랜딜이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그들을 우리에게 인계해줄 수 있을까? 저놈들이 우리 기지를 습격해 쫓고 있었거든."
"어렵지 않지. 근데 믿을 만한 수하에게 맡기는 게 좋을 거야."
레이의 말을 이해한 브랜딜에 곁에 있던 레인저들에게 턱짓했다.
레이에게 당해 쓰러져 있는 습격자들을 레인저들이 챙기는 동안 브랜딜이 레이에게 다가와 물었다.
"음... 잠시 동행할래? 가면서 서로 해명할 부분이 있으면 오해를 풀자고. 껄끄러우면 그냥 돌아가 봐도 되고."
"앞장서."
이게 함정일 수도 있었지만 레이는 개의치 않았다.
레이의 자신감을 본 브랜딜이 웃음을 머금고는 산길을 걸었다.
레이와 브랜딜은 산길을 걸어가며 서로 가지고 있는 정보를 교환했다.
그 또한 일종의 거래였는데, 레이는 그 과정에서 루비하 왕국 내부에 발생한 혼란에 대해 다시 한 번 이해할 수 있었다.
'계속 가면 내전 한 번 터지겠는데?'
레이가 개입했던 과거 1황자 사태 때.
루비하 왕국의 타라니스 가문은 악마 숭배자와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때 루비하 왕국의 국왕은 타라니스 가문을 비호했고, 이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늘어났다.
이후 타라니스 가문은 제국에까지 영향력을 넓히며 힘을 키울 기회를 잡을 뻔 했지만, 레이에게 저지당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현재는 타라니스 가문을 위시로 한 국왕파와 그에 반하는 반(反)국왕파가 루비하 왕국 내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반 국왕파의 필두 중 하나가 시그니 산맥과 가까이 위치한 영지를 지닌 변경백, 호룸 백작이었다.
'브랜딜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군.'
호룸 백작은 레인저 부대에 상당히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브랜딜이 타고 있던 라인이 호룸 백작 라인이었던 덕분에, 또한 왕국 내부의 갈등이 더 격해지고 난잡해진 덕분에 브랜딜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 레이는 추측했다.
"그러니까... 지금 서로 매국노라고 열심히 욕하고 있다는 거네."
친국왕파에선 반국왕파를 제국에게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라고.
반국왕파에선 친국황파를 악마숭배자와 야합한 매국노라고 말이다.
혼란이 길어지니 갈등은 깊어졌다.
레이는 길을 걸어가다 브랜딜에게 물었다.
"저 제국병 흉내를 내는 놈들이 레인저 기지를 습격했다고?"
"그래."
"습격당한 자들이 친국왕파 인물인가?"
"...그쪽 계열 인사들이 다수이긴 하지. 하지만 우연인지 고의였는지는... 이제부터 알아봐야겠고."
"내가 볼 때는 국왕파 세력이 호룸 백작 라인인 너희들을 쳐내려고 밑밥 까는 것 같은데."
레이는 피식 웃었다.
전생의 지구를 돌아봐도 역사적으로 권력자들과 열강들은 자주 이런 개수작을 부리고는 했다.
설령 그 수작질이 너무나도 허술해 도중에 걸렸다고 해도 사과하는 일은 없었다.
옳든 그르든 일단 명분은 만들었으니 막무가내로 우기며 힘으로 후려패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레이의 중얼거림에 브랜딜은 답하지 않았다.
여기서 브랜딜이 자기 의견을 내세우기엔 매우 부적절했다.
브랜딜은 국경 앞에 도달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레이에게 물었다.
"더 들어가서 단장 얼굴 좀 보고 갈 거야? 아니면 이만 돌아갈래?"
"단장도 날 알고 있나?"
"그래. 옛날 너랑 만났을 때는 부단장이었지."
"그럼 잠깐 이야기 좀 나눠보지, 뭐."
*
레인저의 작전 기지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준비된 막사 안에서.
제2특수작전단, 속칭 레인저의 단장 로베리가 브랜딜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브랜딜의 곁에는 레이와 루나가 서 있었다.
브랜딜은 레이를 이곳으로 '초대'해왔다고 했다.
물론 브랜딜에게 제국의 인사를 왕국의 국경 안으로 멋대로 들일 권리가 있을 리가 없었다.
로베리는 일단 레이에게 물었다.
"습격자와 제국은 관계가 없다고?"
"쟤들은 우리 사람 아니라니까."
"증명할 수 있나?"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사람 아닌 걸 여기서 뭐 어떻게 더 증명하겠는가.
로베리 또한 알면서 물어본 것이었다.
로베리가 한숨을 내쉬는 사이, 곁에 있던 옥스가 검을 뽑아들며 광분했다.
"빌어먹을 제국놈이 여기까지 기어들어와서 우리를 농락하려 해?!!"
지나치게 흥분해 혈압이 높아진 탓인지 옥스의 허리에 감겨 있는 붕대 위로 피가 더 번져 나왔다.
눈을 시뻘겋게 뜬 채 고함치는 옥스의 모습은 누가 봐도 진실해 보였다.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발겨서 제국에 돌려보내 주겠다!!!"
"하..."
레이는, 드디어 '그 대사'를 쓸만한 상황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레이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꼬았다.
"너무 강한 말은 쓰지 마."
레이의 입 꼬리가 옥스를 향해 자연스레 비틀렸다.
"약해보이니까."
루나가 묘하게 떫은 표정으로 레이를 돌아보았다.
약한 개가 크게 짖는다 같은 관용구를 돌려 말한 것 같은데, 어째 묘하게 손발이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물론 옥스는 레이의 도발을 듣고 더욱 광분했다.
옥스는 연거푸 고함을 내지르며, 내심 레이의 도발에 반응한 레인저들이 같이 레이에게 검을 겨눠주기를 바랐다.
본디 레인저들은 투쟁심과 자존심이 강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지 않았던가.
허나 레이의 도발에도 레인저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고참 레인저들이 레이와 1황자의 전투를 눈앞에서 경험한 이들이었다.
자존심 좀 지키겠다고 함부로 마주 으르렁댈 만큼 레이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로베리는 도리어 옥스를 천막에서 쫓아냈다.
부상이 심각해 무리하지 말라는 게 그 이유였다.
옥스는 끝까지 꽥꽥 소리를 지르며 울분을 토해내다 끌려갔다.
"..."
잠깐 정적이 찾아온 천막 속에서.
로베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네가 잡아온 자들은 심문해 보겠다."
"알아서 해. 근데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군."
진실을 토해낼지도 의문이었고, 진실을 토해낸다 해도 그게 가치가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레이를 향해 로베리가 권유했다.
"잠시 같이 걷지."
*
"네 말을 신뢰하는 건 아니다."
로베리가 산길을 걸으며 혀를 찼다.
"이번 일이 제국의 기만이자 이간질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 또한 그럴 듯한 추측이었다.
로베리는 혼란스러웠다.
친국왕파의 인물들이 이번 습격을 사주한 것이 아닌가 의심되었지만.
그렇다고 제국의 특무대인 레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도 바보짓이었다.
레이가 자기 턱을 매만졌다.
레이 또한 자신이 넘긴 첩자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답할 수는 없었다.
레이는 권능을 통해 첩자들을 비롯해 레인저들을 하나씩 살폈지만, 그들에게서 악마를 숭배한 직접적인 흔적 같은 건 확인할 수 없었다.
'마족이 모습이라도 숨기고 있었다면 그냥 칼질을 했겠지만...'
레이는 조금 아쉬웠으나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 모든 문제가 악마 숭배자들 탓에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설령 악마 숭배자들이 원인이 되었다고 해도, 판이 커지는 건 대개 인간의 욕심 탓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여러 이해관계가 뒤섞여 발생하는 사건 사고를 어찌 선 한두 개를 쭉쭉 그어 쉽사리 판별할 수 있겠는가.
혼란스러운 게 당연했다.
다만, 로베리가 자신의 혼란을 레이에게 말하고 있는 시점에서.
로베리 또한 이번 일이 왕국 내 국왕파의 수작일 확률이 높다고 짐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레이의 말이 맞다면 옥스 혹은 다른 친국왕파 인사가 습격자가 기지 내부로 진입하는데 협력했을 것이다.
옥스가 진짜 범인이라면 의심을 피하기 위해 공격을 허용해 부상당했을 터.
이번 일로 인해 국왕파 측이 로베리를 쫓아내고 친국왕파를 레인저의 단장 자리에 앉히려 한다면... 추측은 확신이 될 것이다.
허나 로베리라고 순순히 자기 자리를 내려놓을 생각은 없었다.
숙청 작업에 목을 내밀고 당해줄 만큼 로베리는 순한 양이 아니었다.
그렇게 반발한 이후엔? 과연 상황이 어찌 돌아갈까?
서로 고민이 깊어지던 와중.
레이가 로베리에게 물었다.
"아예 제국의 힘을 적극적으로 빌리는 건 어때?"
"나에게 지금 매국을 종용하는가?"
"상황을 보니 너희가 얌전히 축출당하지 않으면 너희의 국왕께선 내전이라도 불사할 생각이신 것 같던데... 너도 알고 있잖아?"
"..."
이번 일이 정말 국왕파의 개수작질이라면.
국왕파는 이번 사건처럼 반국왕파를 제국의 앞잡이라 매도할 수 있는 명분을 몇 개 만든 후 반국왕파를 꺾으려 들 것이다.
물론 반국왕파의 세력도 만만치 않음으로, 작든 크든 내전으로 번질 가능성도 상당히 높았다.
"너희가 제국에 협력을 구하든 말든 제국은 왕국의 일을 가만히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제국은 확장에 관심은 없지만, 현재 악마 숭배자놈들에게 독기가 바짝 올라 있거든. 루비하 왕국의 왕실이 악마 숭배자들과 야합했다는 증거도 확보하고 있고..."
"..."
"손을 잡으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야. 제국은 지나친 난전을 피할 수 있고, 너희들은 제국의 도움을 받아 정권을 잡을 수 있겠지."
"정권은 제국이 잡겠지."
"근 수백 년간 제국이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었나?"
"..."
"국왕파에 붙은 악마 숭배자 세력만 척살하면, 제국은 너희에게 큰 신경 안 쓸 거야. 반 국왕파였던 세력들이 서로 쪼개져서 다시 내전을 벌인다고 해도, 글쎄."
레이는 그리 말하면서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이 세계의 전쟁은 지구의 현대전과 일부 유사한 면이 있었다.
워프게이트를 통한 장거리 이동.
비대칭 병기에 가까운 고급 병종들.
그에 따른 속도전.
예컨대 미국이 벌인 이라크 전쟁 때와 같이.
제국이 마음만 먹는다면 고급 병종의 우세를 활용해 왕국의 지휘부를 타격해 삽시간에 승리를 움켜쥘 수 있었다.
그건 전쟁 개시 후 단 수십 일이면 충분했다.
물론 전쟁 승리 후 점령 지역의 유지와 안정은 소수의 고급 병종으론 결코 불가능했지만, 그건 반국왕파에 맡기면 될 일이었다.
고급 병종을 운용하기 위해선 지원 부대를 전선에 배치할 필요가 있었으나 지휘부 타격 및 특정 세력 말소가 목적이라면 전쟁 준비에 시간이 많이 소모되진 않았다.
'루비하 왕국의 왕실과 악마 숭배자들의 세력이 야합한 이상 언젠가는 제국은 전쟁을 벌이겠지만...'
레이는 그 전쟁이 자신이 살아 있는 사이에 완료되길 바랐다.
루비하 왕국과 전쟁이 발생하면 필립스 백작령 또한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필립스 백작령 사람들의 안위에 대해 확실히 고려하고 대처해줄 테니...'
레이는 전쟁의 결과 자체는 제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날 것이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악마 숭배자들이 다양한 수작을 부릴 것이다.
그들 나름대로 어떤 자신이 있기에 자꾸 제국을 자극하는 것일 터다.
하지만 상대는 제국이다. 마경도 아닌 곳에서, 악마 숭배자들이 벌이는 수작 따위에 휘말려 패할 정도라면 제국은 진즉 무너지고 인류는 패망했을 것이다.
결과는 이미 확정되어 있었고 남은 것은 전쟁이 언제 끝나느냐는 거였다.
그때, 침묵하고 있던 로베리가 불쑥 입을 열었다.
"사령검이 회수되었다."
"사령검?"
기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