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레이는 산맥 한가운데서 마주친 두 남자를 보며 고민했다.
상대의 신분이 정말로 제국 첩보대에 소속된 요원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국이 필립스 백작령 근방에서 첩보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면 에른스트나 황제가 언질을 주지 않았을까, 레이는 그리 생각했다.
물론 에른스트나 황제가 거기까지 신경을 못 썼을 확률도 있었다.
제국 정보국과 첩보대에서 벌이는 작전이 한두 가지겠는가.
하지만 일단 레이는 상대가 제국 소속의 전투원이 아니라고 가정해 보았다.
'그러면... 굳이 제국병으로 위장해서 이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건...'
두 남자는 루비하 왕국이 제국으로 파견한 일종의 간첩일 수 있었다.
'제국 출신으로 위장한 후 시그니 산맥을 넘다가 재수 없게 나한테 걸렸다... 그것도 아니라면...'
레이가 남자의 검을 바라봤다.
남자의 검엔 아직 완전히 굳지 않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저게 과연 짐승의 피일까?
시그니 산맥엔 위험한 짐승이나 마수가 들끓기는 했다.
하지만 레인저들의 경우 감각이 민감한 마수조차 쉽사리 기만하고 따돌릴 수 있는 기술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만약 저게 사람의 피라면, 누구를 베어내고 여기까지 온 것일까.
'마타도어... 내부 자작극... 그런 쪽인가? 아니면 다른 의도를 가지고? 누군가를 살해한 후 제국이 한 것처럼 위장해서 조사에 혼선을 주려고 했을 수도...'
떠오르는 건 많았지만 아직 무언가를 확실히 단정하기엔 정보가 부족했다.
일단 상대를 '첩자'라고 인식한 레이는 보검을 품에 넣고 평범한 철검을 뽑아들었다.
"자, 머리 그만 굴리고 빨리 덤벼 봐."
레이가 기세를 드러냈다.
레이는 상대를 제압부터 한 뒤 정보를 캐내거나 고민을 더 해볼 생각이었다.
두 첩자는 제국의 어느 부대에 소속되어 있고 무슨 목적으로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인지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가 결국 검을 뽑아냈다.
검기가 서린 검 세 자루가 어두운 숲 속에서 번쩍였다.
두 첩자가 서로 거리를 벌리더니, 동시에 레이를 향해 돌진했다.
카가각!!
세 사람의 검이 맞부딪쳤다.
레이는 고의로 검기를 약하게 생성한 후 적당히 밀려나 주었다.
첩자들은 레이와 몇 번 더 검을 맞대보더니 할 만하다는 걸 깨닫고 자신감 있게 레이를 밀어붙였다.
양쪽에서 정신 없이 휘몰아치는 검격 탓에 레이가 연거푸 뒷걸음질을 쳤다.
카강!! 카가각!!
레이는 첩자들의 공격을 받아내며 상대의 검술을 파악하기 위해 집중했다.
제국의 제식 검술 중 제국 밖에서도 유명한 게 몇 종류 있었는데, 날카롭고 직선적인 상대의 검술은 그 중 하나로 보였다.
'...근데 좀 어설픈 것 같은데.'
레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검기까지 안정적으로 뽑아낼 수 있는 실력을 지닌 것치고는, 첩자들이 구사하는 검술의 완성도가 상당히 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레이가 그 부분을 고민하느라 집중이 잠깐 흐트러진 사이.
레이의 뒤를 잡은 첩자가 어둠 속에서 입꼬리를 올리며 검을 휘둘렀다.
'잡았다...!'
첩자는 이 일격으로 레이의 어깨를 가를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다.
실제로 첩자의 검은 레이의 어깨에 닿았다.
허나, 날카로운 검기는 레이의 어깨를 덮은 망토를 단번에 베어내지 못하고 옆으로 미끄러졌다.
끄드득!
"?!"
첩자는 레이의 망토가 드래곤 가죽으로 만들어진 최상위 아티펙트란 것을 몰랐다.
아무리 검기가 깃든 검이라 해도 제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최상위 아티펙트를 단숨에 뚫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황한 첩자가 뒤늦게 검을 회수해서 다시 휘두르려 했으나, 그보다 레이가 두 번째 검을 뽑아내는 게 빨랐다.
몸을 빙글 돌려 망토를 넓게 펼친 레이가 두 번째 검을 사선으로 올려 베었다.
촥-!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첩자의 어깨 위에서 피가 튀었다.
망토로 인해 시야가 제한되어 회피가 늦었던 첩자가 다급히 땅을 굴렀다.
레이는 땅을 구르는 첩자는 내버려둔 채 정면에서 짓쳐들어오는 첩자를 향해 마주 가속했다.
카가가가각!!
레이가 본격적으로 두 자루의 검을 동시에 사용하기 시작하자 첩자는 삽시간에 기세를 잃고 연거푸 뒷걸음질쳤다.
금방이라도 목이 날아갈 것 같은 압박이 휘몰아치자 첩자도 익숙지 않은 검술을 계속 고집할 수만은 없었다.
레이가 한 발자국 더 거리를 좁히며 검을 교차해서 휘두르는 순간 첩자의 검술 형태가 변화했다.
레이가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지.'
카각!!
직선적이고 날카롭기만 했던 첩자의 검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다 급소로 흘러들어 왔다.
첩자는 진짜 실력을 드러낸 이상 자신이 다시 레이를 압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허나 레이는 더는 첩자들과 놀아줄 생각이 없었다.
콰각!!!
레이는 검기를 강화해 첩자의 검을 짓이길 것처럼 무자비하게 찍어눌렀다.
첩자가 당황해서 헛숨을 토하는 순간 레이가 다리를 휘둘러 첩자의 관자놀이를 걷어찼다.
쩍- 소리와 함께 옆으로 날아간 첩자가 나무를 부러뜨리며 나뒹굴었다.
그 찰나, 어깨를 베였던 첩자가 다시 한 번 레이의 후방을 노리고 덤벼들었으나 무모한 짓이었다.
아직 하늘에 있던 루나가 서클을 활성화시켰다.
으드득!!
주변의 마나가 요동치더니 흙더미가 여기저기서 치솟았다.
서로 뭉쳐 배배 꼬인 흙더미는 그대로 첩자를 휘어 감고 땅 위에 처박았다.
쿠웅!!
"큭...!"
땅에 처박힌 채 온몸이 속박된 첩자가 억지로 체내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마나를 방출해 구속을 풀어버릴 생각이었으나 제대로 시도도 하기 전에 몸 위로 막대한 마나의 압박이 가해졌다.
저항하던 첩자는 이내 피를 왈칵 토하며 혼절했다.
레이가 땅에 내려앉는 루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 루나."
자, 이제 어찌해야 할까.
잠시 고민한 레이는 혹시 손님이 찾아올까 싶어 일단 이 자리에서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레이의 바람대로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레이는 아주 옅은 기척을 느끼며 울창한 숲 너머를 바라봤다.
레이의 시선을 눈치챈 레인저가 모습을 드러내며 물었다.
"넌 누구냐?"
"제국 특무대."
레이가 뻔뻔하게 답했다.
*
제국 특무대라는 소리에 레인저의 미간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레이는 모습을 드러낸 레인저를 빤히 바라보다 기절시킨 남자를 발로 툭툭 쳤다.
"아, 나는 제국 특무대 소속이고, 얘들이랑은 모르는 사이야. 어설프게 제국병 흉내를 내고 있길래 첩자인 것 같아서 방금 제압했지. 혹시 너희 친구인가?"
"..."
레인저는 다시 한 번 상황을 살폈다.
레인저들이 추적하고 있던 표적은 이미 제압되어 있었고, 남녀 한 쌍이 자신들을 제국 특무대라 소개하고 있었다.
레인저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는 없었다.
상대의 진술이 사실일 수도 있었고, 또 다른 기만 행위일 수도 있었다.
다만 레인저는 지금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는 명백히 인지하고 있었다.
"...네놈 말의 진위는, 시간을 들여 가려내면 되겠지."
일단 제압해서 끌고 가겠다... 그런 뜻이 담긴 발언이었다.
모습을 숨기고 있던 주변의 레인저들도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이는 어떻게 대처할까 고민하다 납검했던 검을 다시 뽑아냈다.
"두 가지만 부탁하지."
레이가 검기를 발현하더니 손에 쥔 검을 한 바퀴 빙글 돌렸다.
"여기는 제국령이야."
레이의 검에 서렸던 검기가 훅 사라졌다.
"여기까지 왜 기어들어왔느냐고 안 따질 테니까, 태도라도 정중하게 갖춰. 팔다리를 잘라내기 전에."
검기가 사라지자 레인저들은 잠시 긴장을 내려놓았으나, 그 찰나 허공이 찢어졌다.
콰강!!
가장 먼저 얼굴을 드러냈던 레인저의 코앞에 검기가 떨어져 내렸다.
레인저는 자기 발밑이 깊게 파이는 광경을 보며 덜컥 굳었다.
'공간검...?'
꽤 오래전 있었던 사건이 기억난 레인저가 핏기가 가신 얼굴로 레이를 다시 보았다.
그 당시의 레이는 지금보다 덩치가 훨씬 작았다.
허나 덩치 따위는... 착각하게 만들 수단이 얼마든지 있었다.
레인저들도 눈앞에서 벗겨보지 않고는 알아채기 힘든 교묘한 위장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덩치가 다르다고 무조건 동일인이 아니라고는 단언하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레인저는 레이의 눈을 바라봤다.
그 스산함이 일렁이는 레이의 눈동자 속에서, 레인저는 과거를 보았다.
"넌... 그때..."
"아, 마침 날 아는 친구가 있군."
레이가 레인저에게 천천히 마주 다가갔다.
이대로 부딪치면 괴멸이라는 걸 깨달은 레인저가 침을 꿀꺽 삼켰다.
레이가 가득 긴장한 레인저를 향해 입 꼬리를 올리며 부탁했다.
"두 번째 부탁인데, 말 좀 통할 것 같은 윗사람 좀 불러줄래? 친구들을 더 불러서 한 번 붙어봐도 되고."
여기는 제국령 안쪽이었다.
그렇기에 레이는 굳이 저자세를 취할 생각이 없었다,
난색을 표하던 레인저가 결국 물러서서 수하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이내 숨어있던 레인저 중 한 명이 길쭉한 무언가를 품에서 꺼내 입으로 훅 불었다.
레이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흔히 가청주파수라고 칭해지는 영역대 밖의 주파수를 활용한 레인저들의 연락책이었다.
얼마 안 가 레이는 꽤 인연이 있는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
제2특수작전단. 속칭, 레인저.
몇 년 전 사건으로 당시의 단장이 사망한 이후 현재까지 레인저의 단장직을 유지하고 있는 로베리가 회의실에서 신음을 흘렸다.
로베리의 우측에선 군수부대장 직을 맡고 있는 옥스 자작이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대체 이 사태를 어찌 책임질 생각이오?!"
옥스는 허리에 큰 자상을 입어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레인저들의 기지에 침입자가 들어와 몇몇 주요 인물을 암습했고, 그 타겟 중 한 명이 옥스였기 때문이었다.
몇 cm만 베인 위치가 달랐어도 바로 즉사했을 부상을 입었지만, 옥스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물론 모두가 옥스처럼 운이 좋지는 못했다.
이번 습격에 사망자가 여럿 발생했으며 사망자 중엔 왕실이 보낸 감찰관도 있었다.
"대체 기지 경비를 어떻게 했길래...!!"
기지 방위와 병력 배치는 대부분 단장의 지휘와 결정 아래 이루어졌다.
로베리가 책임을 피해가긴 어려웠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의혹까지 제기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산맥의 높은 곳에 위치한 레인저들의 기지는 결코 침입하기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내부 조력자가 있다고 가정하지 않고서야 이런 식의 습격이 이루어지긴 어려웠다.
로베리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을 이어가는데, 레인저 한 명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 제국놈을 잡았답니다...!"
옥스가 깜짝 놀랐고 로베리가 화색했다.
"아, 다행이군."
제국놈이라면 습격자를 가리켰다.
습격자가 제국의 검술과 병기를 사용한다는 걸 이미 특정했기 때문이다.
습격자를 추적하는데 시간이 훨씬 더 소요될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는데 아주 기분 좋게 예측이 빗나갔다.
"2소대가 아주 잘해주었나 보군."
"아, 그게... 그... 문제가 좀 있습니다."
"무슨 문제?"
"제국 특무대가 제국놈을 잡아서 인계했답니다."
"...뭐가 뭘 잡아?"
로베리가 되물었다.
음모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