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시간이 흘렀다.
한 달 정도 지나자 루나는 웬만한 마법은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서클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 정도만 되어도 루나는 어지간한 고위 마법사 여럿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레이는, 오늘 밤쯤에 루나와 함께 시그니 산맥으로 진입하기로 결정 내렸다.
레이는 필립스 백작에게는 미리 시그니 산맥의 탐색 허가를 받아놓았다.
사실 시그니 산맥으로 진입해 레인저와 접촉하는 게 마냥 현명한 판단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괜히 가만히 있던 레인저를 자극하면 벌집을 쑤시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시그니 산맥 국경선 가까이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레인저에게 명분을 주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레인저 측과 접촉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제국 정보국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최전선이자 오지에 위치한 레인저의 내부 사정까지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가만히 앉아서 평화를 바라느니 위험을 조금 감수하고라도 두 눈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레이는 얼마 뒤 이지스로 떠나 필립스 백작령에서 몇 달은 자리를 비워야 했기에 더욱 그리 생각했다.
"일단 제국 윗선에도 허가는 받았고..."
레이는 에른스트에게도 미리 시그니 산맥을 탐색하려 한다는 사실을 전했다.
에른스트로부터 온 답신에는 시그니 산맥으로 진입하는 건 허가할 수 있지만 무력 충돌, 특히 레인저의 사살은 불허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제국 입장에서야 당연한 요구였다.
레이도 상황이 좀 꼬였다 싶으면 칼을 휘두르지 않고 곧장 도주할 생각이었다.
벌집을 잘못 쑤시면 골치 아픈 건 결국 필립스 백작령이었다.
거리를 걸으며 생각을 정리한 레이는, 과거엔 과일장수였으며 이제는 유통업에 종사하는 잭의 가게에 들렀다.
레이가 가게 앞에 전시해놓은 사과를 씹어먹고 있자 잭이 가게에서 나왔다.
레이는 잭의 얼굴을 확인한 후 제국 금화 하나를 선반 위로 미끄러뜨렸다.
잭이 미끄러져 오는 금화를 붙잡더니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냥 예전처럼 공짜로 달라고 하지?"
"머리 굵어서 그렇게 행동하면 애들이 따라 배워요."
레이가 사과를 우물거리다 피식 웃었다.
"옛날에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지는 과수원을 마련해주겠다고 했는데... 필요해요?"
잭이 레이를 따라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지금도 충분히 만족하며 살고 있다."
"하긴, 유통업이 돈이 좀 되긴 해요? 목에 힘도 좀 주고 다닐 수 있고."
"그래. 그리고 과수원 그거 이 근방에는 못 만들 거 아니야?"
필립스 백작령이 위치한 지역은 기후 탓에 대규모 과수원을 세우기엔 이래저래 부적합했다.
잭이 그 부분을 지적하며 늘어만 가는 이맛살을 매만졌다.
"이 나이 먹고 내가 여길 떠나면 어딜 가겠냐."
"그건 그렇네요."
레이가 낄낄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잭과 이러고 있자니 괜히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길지도 않았던 시간을 참 빡빡하게 살았다고 되뇐 레이가 잭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좀 바빠서, 그만 가볼게요. 음... 고마웠어요, 그동안."
새삼스러운 인사였다.
잭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래. 나도 영광이었다, 꼬맹아. 앞으로도 시간 날 때 가끔 들러."
지미와 매튜의 작위를 레이가 물어다 줬다는 소문이 필립스 백작령에 파다했다.
잭은, 레이 정도의 인재가 필립스 백작령에서 탄생했다는 것에 많은 자부심을 느꼈다.
또한 잭은 레이가 어린 시절부터 이어가던 행보에 잠시 잠깐 동참했음을 자랑스럽게 느꼈다.
레이가 뿌듯해하는 잭에게 한소리 했다.
"이제 꼬맹이 아니거든요?"
"너 나보다 키 작잖아."
"..."
잭의 키는 185 cm였다.
레이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
시그니 산맥으로의 진입을 야밤에 진행하기로 한 건 레인저의 추적 능력을 의식해서 였다.
대낮에 시그니 산맥으로 들어갔다간 제국 특무대라도 레인저에게 바로 뒷덜미를 잡힐 게 분명했다.
물론 레인저는 밤눈도 밝았지만, 그래도 낮보다야 못했다.
해가 지자 레이는 시그니 산맥에 진입하기 전 장비를 점검하기 위해 혼자 사는 집에 들렀다.
헌데 집 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레이는 잠깐 도둑이 들었나 싶었지만, 이내 발걸음 소리로 상대의 정체를 유추하고 집 문을 열었다.
"카렌."
"어, 왔어? 잠깐만!"
방 안에서 카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는 집 안으로 들어서며 옆을 돌아보았다.
선반 위가 먼지 한 톨 없이 아주 깨끗했다.
레이가 필립스 백작령을 떠난 몇 개월 동안.
레이의 집은 벨라가 간간이 들러 깔끔하게 청소해 주었다.
그리고 레이가 돌아온 지금은, 카렌이 틈틈이 찾아와 청소와 정리정돈을 도와주고 있었다.
방 안을 정리하고 있었던 카렌이 방에서 나오며 레이에게 미소 지었다.
"레이, 오늘 시그니 산맥에 간다며?"
"...누구한테 들었어?"
"루나가 말해줬어."
"아, 그래? 다른 사람한테는 이야기하지 말고."
"당연하지!"
카렌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기에 그런 당연한 당부를 하는 거냐고 살짝 토라진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도 카렌은 하얀색 치맛자락을 하늘하늘 흔들며 레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금방 돌아오는 거지?"
"어, 오래 걸릴 일 아니야. 문제가 생기면 더 빨리 돌아와야 하고."
"시그니 산맥에서 돌아왔다가... 얼마 뒤에는 이지스에 가야 한다며?"
"거기는 가면 몇 달 정도 머물다 올 것 같아."
"..."
잠시 눈치를 보던 카렌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도... 이지스에 입학해볼까?"
"음... 지금 당장은 힘들 것 같은데..."
그래도 1~2년, 길어도 3년 정도만 열심히 노력하면 카렌 또한 이지스에 입학 가능한 실력을 갖추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카렌은 요하나처럼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데런처럼 뚜렷한 향상심과 야망이 있는 타입도 아니었다.
카렌은 성격이 소탈했다.
"..."
정말로 카렌에게 소탈하다는 표현이 어울릴까?
어린 시절 카렌은 지금처럼 마냥 유순하지 않았다.
때때로 남들에 비해 굉장히 강한 독점욕과 소유욕을 내보이고는 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언제나 레이를 향해 있었다.
"..."
레이는 껄끄러운 기분이 들어 잠시 목을 매만졌다.
어쨌든, 레이는 카렌이 굳이 이지스에 입학하길 바라지는 않았다.
"이지스에 네가 꼭 얻어야 할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음, 굳이 이지스에 입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거기 재수 없는 귀족들이 많아서."
타고난 출신 성분이 주는 인식은 어지간한 실력으론 극복하기가 힘든 법이었다.
에른스트가 힘이 되어준다고 해도 은근한 멸시가 큰 스트레스로 작용할 것이다.
요하나처럼 압도적인 재능이나 데런처럼 확고한 야망이 없다면 굳이 힘겨운 길을 갈 필요는 없었다.
더군다나 카렌은 외모가 뛰어나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끌 확률이 높았다.
아름다운 외모 또한 무기로 삼고자 하면 얼마든지 강력한 무기가 되었지만, 그럴 생각이 없다면 외모를 향한 관심은 괴롭게 다가올 뿐이었다.
레이가 어물거리면서도 자기주장을 피력하자 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난 이곳에 있을게."
레이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온 카렌이 레이의 침대 위에 걸터앉으며 웃었다.
레이는 카렌이 말하는 '이곳'이 필립스 백작령인지 아니면 지금 걸터앉은 침대 위인지 잠시 헷갈렸다.
카렌이 레이의 침대보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사람들도 돕고 아이들도 가르치고..."
그렇게 나름대로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며... 언제나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
"레이, 레이는 너무너무 대단하니까 항상 우리 곁에 있어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다시 돌아올 거지?"
카렌의 말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 안에 깃든 불안함과 애절함을 읽어낸 레이는, 차마 고개를 저을 수가 없었다.
"...이곳이 내 고향인데 당연히 돌아와야지."
레이는 결국 또 허세를 부렸다.
레이의 확답을 받은 카렌은 그제야 안심하고 환하게 웃었다.
레이는 환히 웃는 카렌을 바라보다 거북함을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엇나가자 약간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잠깐 고민한 카렌이 슬그머니 옷의 앞섶을 풀어헤쳤다.
적나라하게 가슴골을 드러낸 카렌은 부끄러움을 꾸역꾸역 눌러담으며 딴소리를 했다.
"오늘 조, 조금 덥다..."
아직 밤 공기가 차가운데 무엇이 덥다는 걸까.
본능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카렌에게 눈이 간 레이가 그리 반문하려는 순간.
다시 용기를 낸 카렌이 머리카락을 묶은 끈을 풀어내며 하려던 말을 마저 전했다.
"레이, 난 이곳이 좋아. 그러니까 레이가 멀리멀리 떠나도..."
카렌은 얼굴이 너무나 화끈거렸지만.
그럼에도 레이를 향한 감정을 가득 담아 황홀하게 빛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레이를 마주 봤다.
"난 여기서 레이를 기다리고 있을게."
다음 순간.
레이는 말 없이 침대에 다가가 카렌과 입술을 마주쳤다.
*
루나는 레이의 집 밖에서 레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안 가 짐을 챙긴 레이가 밖으로 나오자 루나가 덤덤하게 물었다.
"...벌써 끝났어요?"
"...굉장한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질문인 것 같은데..."
약간 격렬하긴 했지만, 입술만 좀 맞추고 나오는 길이었다.
근데 벌써 끝났냐고 물으니 기분이 좀 그랬다.
레이는 루나에게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타박한 뒤 콧잔등을 매만졌다.
마음이 이래저래 복잡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분명 이성을 단단히 붙들어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카렌 앞에 서면 본능이 툭 튀어나와 이성을 후려패고 짓밟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레이는 달아오른 열기를 차가운 밤공기로 식히며 루나를 재촉했다.
"그만 출발하자."
준비는 다 갖춰 놓았다.
장비도 확실히 챙겼고, 가디 자작과 로필렌, 그리고 필립스 백작령의 기사들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잠에 들지 않고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루나가 레이의 요청에 따라 고위 정령, 칼가를 실체화시켰다.
시그니 산맥에는 비행해서 접근할 계획이었다.
레인저 측도 마법 결계 등으로 방공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비행해서 접근하면 역추적을 당할 확률은 없앨 수 있었다.
이내 레이는 루나와 함께 칼가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센 바람이 불어오며 루나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레이는 잠시 동안 바람을 맞으며 잡다한 걱정을 잊고 자유로움을 느꼈다.
얼마 안 가, 길게 뻗어있는 산맥이 레이와 루나의 시야에 펼쳐졌다.
레이와 루나는 일단 산맥을 크게 돌며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빽빽하게 자리를 차지한 나무들 사이에서 짐승이나 마수들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쳤다.
과거에 비해 어딘가가 크게 달라진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슬슬 산맥 안쪽으로 향하자고 말하려던 순간, 레이는 무언가 이상한 풍경을 포착했다.
깊숙한 산맥 한 곳에서 무언가의 그림자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짐승이나 마수의 그림자일 수도 있었지만, 레이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저게 짐승이나 마수의 그림자였다면 빠르게 이동함에 따라 나뭇잎 같은 게 같이 흔들렸을 것이다.
허나 레이가 바라보는 그림자는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야말로 실체 없는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저런 움직임이 가능한 자들은 보통 레인저였다.
레인저들은 간간이 국경까지 넘어와서 시그니 산맥을 순찰하고는 한다.
그렇기에 레인저들이 제국 국경 안쪽에서 발견되는 건 특이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저 레인저는 필립스 백작령에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뭐... 얼굴 좀 볼까?"
제국 국경 안에서라면 레이 또한 좀 더 과격하게 나설 수 있었다.
레이는 겸사겸사하는 마음으로 루나에게 고도를 낮춰줄 것을 부탁했다.
잠시 뒤.
은밀하고 빠르게 산맥을 타고 움직이던 두 남자 앞에, 레이가 쿵- 하고 떨어졌다.
"?!"
갑자기 레이가 땅에 떨어지자 두 남자가 깜짝 놀랐다.
안전하게 착지한 레이는 가볍게 무릎을 풀고는 상대를 바라봤다.
"음...?"
레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레이는 이들이 분명 '레인저'일 것이라 추측했다.
허나 두 남자의 차림새는 레인저들의 무장과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그때 남자 하나가 레이에게 거친 기세를 드러내며 물었다.
"너 누구야?"
"너희들은 누군데? 혹시 레인저야?"
두 남자가 서로를 돌아보더니 품에서 검을 뽑았다.
두 남자가 패용한 검집에 제국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음을 레이는 확인할 수 있었다.
남자 하나가 피가 묻은 검을 겨누며 경고했다.
"우린 제국에서 왔다. 험한 꼴 보기 싫으면 꺼져."
"야, 너두?"
"?"
레이가 환히 웃으며 답했다.
"나도 제국에서 왔어!"
레이가 품에서 검 한 자루를 내보였다.
황제가 직접 레이에게 하사했으며, 어둠 속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보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 황제 폐하께서 보내셨는데, 넌 어느 부대 출신이니?"
당황해서 어물거리는 두 남자를 향해 레이가 손을 휘저었다.
"아, 말 안 해도 알 것 같으니 굳이 머리 굴리지 않아도 돼."
음모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