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지미는 남아 있던 술기운이 확 깼다.
지미가 아직 두통이 계속되는 머리를 매만지고는 혹시나 해서 되물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제 수명이 3년 정도 남았을 거라고요."
"하... 뭐 그리 재미없는 농담을..."
지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레이는 침묵했고, 이내 정적이 흘렀다.
지미는 레이가 이렇게 무게를 잡고 개소리를 한 전적이 있는가 고민했다.
아니면 내가 아직 술이 덜 깬 건가, 지미는 그리 중얼거리다 다시 헛웃음을 흘렸다.
"레이, 너는 제국 역사상 최연소 소드마스터가 될 거잖아. 하르시아보다 더 위대한 영웅이 될 거라고... 그랬잖아."
"미안해요, 지미. 거짓말이었어요."
지미는 짜증이 났다.
"술맛 떨어지는데 이 재미 없는 농담 좀 그만 끝내면 안 되겠..."
"지미, 세상 대부분의 일에... 인과 없는 기적은 존재하지 않아요."
다시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쳐오는 지미를 향해 레이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뭐든지 대가가 따르는 법이에요."
레이는, 지금 레아의 나이보다 더 어릴 때부터 몸을 혹사했다.
마나란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에너지원이었기에.
이 세상의 기사들은 말보다도 더욱 빠르게 더욱 오래 질주할 수 있었고.
매우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자들은 순간적으로 몸을 가속시켜 음속을 돌파하거나 강철로 된 요새조차 일격에 베어낼 수 있었으며.
불가해한 재능을 타고난 누군가는 단신으로 하늘을 열어 지역 일부를 통째로 소멸시킬 수 있었다.
그렇기에 레이는 다른 아이들은 어설프게 뛰어다닐 나이에, 마나라는 에너지원으로 육체를 혹사해 성인들과 투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레이는 이미 미래를 갉아먹고 있었다.
"기적에도 대가가 따르죠. 이게 나의 운명이고, 내가 선택한 길이었어요."
"아, 레이, 그러니까..."
마른 세수를 한 지미가 더는 참지 못하고 짜증을 드러냈다.
"요즘 어디 아프냐? 그렇다고 왜 자꾸 그리... 재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그, 그, 귀족님들... 정 안 되면 황제 폐하께 부탁 좀 드려. 치료 좀 해달라고. 네가 세운 공적이 얼마인데 그 정도 부탁을 안 들어주시겠냐?"
제국에 이름 높은 치료사와 신관이 얼마나 많던가.
제국 황실의 창고 안에 감히 가격을 붙이기도 어려운 귀한 약재들이 얼마나 많을 텐가.
지미는 레이가 주접을 부린다고 억지로 웃으며 타박했다.
그러나 레이의 표정은 여전히 시리도록 담담했다.
지미는 그게 두렵게 다가왔다.
"다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하르시아가 사망한 후 공간검을 익히려다 죽어간 제국의 기재가 수백 명이에요. 저 또한 그 부작용을 극복하진 못했고요."
"레이...! 여기서 이렇게 떠들지 말고 그리 불안하면 치료사에게 가서...!"
"프리슬란 후작님께서 부른 치료사도, 황실에서 폐하의 안위를 살피는 위대한 성직자도, 제 수명 문제는 해결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어요."
신성력으로 노화와 노환을 해결할 수 없듯.
지나치게 혹사되어 속에서부터 너덜너덜해진 레이의 몸뚱이는, 신성력으로도 해결 불가능했다.
무한히 회복되는 게 아니라 일정 이상 혹사하면 스스로 자멸하도록, 애초에 사람의 몸뚱이는 유전자 단계부터 그리 설계되었다.
그렇기에 레이의 수명은 신성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지미는 그제야 깨달았다.
레이는 이미 충분히 수명에 관한 해결법을 알아보았고, 연명은 불가하다고 결론 내렸다고.
그 사실을 드디어 이해하게 된 지미가 레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레이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담담했다.
지미는 그제야 레이가 지금까지 다른 이들에게 보였던... 묘한 거리감을 이해했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던 레이의 방어 기제였음을.
지미는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레이...!!"
지미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레이는, 그 무수했던 맹목적인 희생과 헌신을 고작 '운명' 따위로 치부하며 폄하하고 있었다.
지미는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속에서 뒤엉킨 시커먼 감정 덩어리가 자꾸만 구역질을 일으켰다.
"배, 백작님은... 벨라는... 아이들은... 알고 있는 거야?"
"모르죠."
지미가 결국 분노를 터뜨렸다.
"그걸 왜 지금까지 숨겨!!"
"떠들고 다닐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이별은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레이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시간이 지나면 아픔도 옅어지잖아요. 문득문득 생각은 나겠지만 결국엔 하나의 추억으로 기억되겠죠."
굳이 이별하리란 미래를 시끄럽게 떠들고 다니며 오래 마음 아파할 필요는 없었다.
그 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레이를 향해 지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소리쳤다.
"레이!!!"
쾅, 탁자를 내려친 지미가 주먹을 떨었다.
"지금 그 따위 개소리를 말이라고 지껄이는...!!!!"
시간이 지나면 이별의 아픔도 희석된다. 정론이었다.
허나 지미가 보기에 레이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결코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가, 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사랑을 받는 존재인지...!!"
"지미, 어쨌든 간에."
지미의 말을 끊은 레이가 다시 물었다.
"이별을 미리부터 슬퍼해서 대체 얻을 게 뭐가 있죠? 그건 너무 소모적인 일이에요."
레이의 개소리에 지미는 하하 크게 웃었다.
하하, 정말 웃긴 개소리를 들었다고 크게 웃던 지미가 다시 한 번 탁자를 내려쳤다.
"네놈은 그렇게 죽으면 안 돼!!!"
지미는 울분을 토해내며 윽박질렀다.
"네가 벌여놓은 일에 책임을 져야지!!! 너 하나... 너 하나만을 의지하고 따르고 동경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인 줄 알아?"
지미는 따져 묻고 싶었다.
어찌 그렇게 가볍게 이별을 입에 담을 수 있냐고.
그동안 네가 쌓아왔던 인연을 어찌 그리 가볍게 정리할 수 있으리라 여기냐고.
허나 레이의 눈동자를 바라보았을 때.
그 눈빛에 깃든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느꼈기에.
지미는 결국 고함을 더 내지르지 못하고 꽉 막힌 신음을 흘렸다.
"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미."
"..."
"지미는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한 어른이었어요."
"..."
"그러니까... 그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지미에게 짐처럼 느껴졌다면 미안해요."
"레이...!"
"기쁜 날 이런 이야기를 해서 더 미안해요."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이는 해야 할 말을 고르기 위해 입을 우물거리다, 결국엔 어색하게 웃었다.
"3년 동안 더 노력해 볼게요.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남은 사람들이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면목없지만 그 뒤는... 지미에게 부탁할게요."
그때가 왔을 때 모두가 너무 방황하지 않도록.
"지미가 잘 잡아주세요."
이게 무리한 부탁인 걸 레이도 알았다.
허나 그게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지미 또한 알았다.
둘은 끔찍한 정적 아래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어둑해진 하늘 아래.
레이는 필립스 백작령 한편에 있는 작은 언덕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봤다.
밤하늘에는 별빛이 가득했다.
레이가 전생에서 천문학을 공부했다면 지금 밤하늘을 보며 떠들 게 많았을 것이다.
이곳의 별자리는 어떻게 다르고 어떤 별이 밝게 빛나고 있는지...
꽤 흥미롭게 연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레이는 천문학에 관심이 없었다.
레이가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이 행성에도 위성이 존재하고 그 크기는 지구의 달보다 작다는 것이었다.
달의 크기는 작았지만 그 아름다운 존재감이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었다.
이리 달빛이 환한 날.
반투명한 나뭇잎들은 밤하늘 아래 달빛을 머금고 은은하게 빛났다.
달빛이 강한 날 멀리서 숲을 바라보고 있자면, 숲은 하나의 빛무리가 되어 바다처럼 너울지며 시선을 앗아가곤 했다.
"..."
레이는 이 세상을 증오했다.
오직 벨라 한 명을 위해 검을 들었지만 스스로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는 거의 없었다.
과거의 레이는 죽음을 기꺼워했고, 그렇기에 수명 따위는 쉽사리 깎아내며 몸을 혹사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지고 유대가 쌓여갔다.
레이는 벨라 이외의 모든 인연들과의 유대를 오랜 시간 부정해왔다.
얄팍하고 기계적이고 계산적으로 이루어졌던 유대 따위 언제든지 끊어낼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여 왔다.
그렇게 부정해 왔지만.
이제는 마음 깊이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들이 너무 많아졌다는 걸.
레이는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지금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감정이 후회에 가깝다는 걸.
레이는 굳이 직시하지 않았다.
이건 감정 없는 초인을 어설프게 흉내내던 범인의 종착점이었다.
"...레아는."
레이는 억지로 사고를 전환했다.
레이가 죽고 난 뒤 과연 레아가 무사할 수 있을까.
레이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허나 레이가 죽고 나서도, 그들이 단순 호의로 레아를 감싸주기엔 레아가 지닌 위험성이 너무 컸다.
그들이 과연 레이가 죽고 나서도 레이와 신의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그건 너무 안이한 희망이었다.
적어도, 필립스 백작령에 레아를 맡기려면 루나와 알레시아가 레아에 관한 계약 각인이라도 맺도록 해야 했다.
허나 이것도 루나를 완전히 믿을 수 있다는 전제를 필요로 했다.
물론 레이는 루나를 무한히 신뢰했다.
다만 이건... 그런 문제였다.
만약 벨라가 모종의 이유로 내일 사망한다면.
그 뒤에도 레이는, '레아를 계속 지킨다'는 선택지를 고를 것인가?
"..."
레이가 미간을 매만졌다.
아직 3년 정도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단순히 호의에 기댈 수는 없으니, 어떤 형태로든 족쇄가 필요하다는 것은 레이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그 정확한 수단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다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었다.
"레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렌이 가벼운 외출복 차림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산책을 다니다 우연히 레이를 발견했다고, 카렌이 그런 핑계를 대며 레이에게 다가왔다.
레이는 빠르게 표정을 풀고는 카렌에게 말했다.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하잖아."
"나 스스로 지킬 힘은 있거든? 레이가 가르쳐 줬잖아."
당당한 카렌의 대답에 레이가 피식 웃었다.
카렌은 은근슬쩍 레이의 옆에 엉덩이를 붙여 앉고는 레이가 바라보는 풍경을 같이 눈에 담았다.
밤하늘 아래 그리웠던 공기를 느끼며 카렌이 미소지었다.
"나는 이곳이 좋아."
카렌은 필립스 백작령이 좋았다.
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편리한 문물들을 경험했고 값비싼 옷들도 입어볼 수 있었지만.
그래도 카렌은 이곳이 좋았다.
"레이가 있는... 고향이 좋아."
카렌은 조금 쑥스러워하면서도 생긋 웃었다.
두 사람은 그리 꽤 오랫동안 가까운 거리에서 밤하늘을 바라봤다.
밤공기는 약간 차가웠지만 잔잔한 열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그때 레이가 한숨을 푹 쉬더니 카렌을 돌아봤다.
"그만 들어가 봐."
"으, 응?"
분위기를 확 깨버리는 레이의 말에 카렌이 당황했다.
레이가 손가락으로 마을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그만 들어가서 자."
"나, 나 혼자 이 시간에 돌아다니면 위험하지 않을까...?"
같이 돌아가자는 이야기였으나 레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선약이 있어."
"아, 응, 그, 그랬구나...!"
카렌이 멋쩍어하며 자기 뒷목을 매만졌다.
레이는 그대로 카렌을 보내고는 호흡을 골랐다.
차가운 밤공기가 레이를 흔들었던 감정을 다시 식혀주었다.
레이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루나, 서클을 회복하려면 앞으로 얼마 정도 걸려?"
은폐를 풀고 나타난 루나가 답했다.
"...한 달 정도면, 대부분의 마법을 쓸 수 있어요. ...무리하지 않아도 쓸 수 있어요."
완전히 회복하려면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한 달 뒤면 어지간한 마법은 서클에 부하를 주지 않는 선에서 발현할 수 있었다.
레이가 상황을 이해하고 루나에게 부탁했다.
"그때쯤 시그니 산맥에 같이 가줄 수 있을까?"
"...알겠어요."
언제나 그래 왔듯.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모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