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레아가 놀란 감정을 진정시킬 때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레아는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나서도 레이의 등 위에 업힌 채 훌쩍였다.
계속해서 훌쩍이던 레아가 앙증맞은 주먹으로 레이의 등 위를 툭툭 두드렸다.
"오빠 미워!"
"오빠가 잘못했어. 미안해. 화 풀어."
레이가 드물게 자기 잘못을 순순히 인정했다.
참 오랜만에 레이의 사과를 들은 레아가 깜짝 놀라더니 묘하게 기세등등해졌다.
오늘은 떼를 써도 되는 날이구나!
그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레아가 다시 소리쳤다.
"오빠 미워!"
나의 화는 쉽사리 풀리지 않을 것이다, 나의 용서를 바란다면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라, 그러지 않으면 엄마한테 오빠가 때렸다고 일러바칠 것이다!
뭐, 그런 의미가 담긴 외침이었다.
레아가 약삭빠른 계산을 끝내고 계속해서 등을 두드리자 레이는 레아를 업고 밖으로 나갔다.
레이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레아가 평소 좋아하던 음식을 사주었다.
고기 꼬치를 받은 레아가 해맑게 웃으며 고기를 우물거렸다.
금세 꼬치 하나를 먹어 치운 레아가 레이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씩씩대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내 화는 풀리지 않는다! 라는 항의였다.
아직 몸집도 작은 주제에 식탐이 꽤 있는 레아였다.
레이는 다시 레아를 업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레아가 원하는 먹을거리를 다 사서 먹였다.
"저것도 사 줘!"
"오냐."
레이는 레아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었고, 이내 레아의 위장도 한계를 맞이했다.
배가 부를 대로 부른 레아는 자기가 토라져 있다는 것도 잊고 레이의 등 뒤에서 세상 행복하게 웃었다.
배가 부르니 자연히 정신이 나른해진다.
얼마 못 가 레아는 레이에게 업힌 채 침을 질질 흘리며 졸기 시작했다.
레이는 어깨가 젖어오기 시작하는 걸 느끼며 제자리서 멈춰 섰다.
레아를 상대하는 동안 억지로 풀어놨던 표정이 다시 얼음처럼 차갑게 굳었다.
"..."
레아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용혈에 기반한 힘을 제대로 발현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그마한 파편이라 해도, 레아의 심장에 이식된 드래곤하트가 용혈 일부를 가두고 억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레아는 용혈로부터 힘을 끌어내 화염을 토해냈다.
"..."
황족이 지닌 용혈의 농도는 개인마다 편차가 크다.
용혈의 농도 또한 재능이라 본다면, 레아는 황족 중에서도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편이었다.
레이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결과였다.
레이는 레아가 좋은 재능을 타고나길 바라지 않았다.
범재, 혹은 그보다도 모자라는 재능을 타고나 평범하게 살다 평범하게 죽기를 바랐다.
만약 레아가 충분히 하찮은 재능을 타고났다면 드래곤하트 또한 더 필요하지 않을 터였다.
허나 레아는 레이의 기대를 배반했다.
레아의 재능은 레이로부터 선택지를 앗아갔다.
레아가 지닌 용혈의 농도를 감안하면 성년 이후의 생존을 위해선 드래곤하트의 조각이 반드시 더 필요했다.
"..."
레이가 제자리서 숨을 몰아쉬는데 레아가 잠결에 손을 뻗어왔다.
레아는 작은 손으로 레이의 뺨을 움켜쥐고 쪼물대며 중얼거렸다.
"오빠는 바보야..."
그래, 이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레이는 속으로 되뇌었다.
레아를 살리는 건 바보 같은 판단이었다.
처음 레아가 태어났을 때 아이를 바꿔치기해서라도 레아를 죽였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바보 같은 선택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리 생각할 것이다.
허나 레이는 이미 한참 전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기만 뿐이었던 벨라의 삶을 또다시 기만하며 평생을 거짓 속에 살아가게 만들 수는 없었기에.
레이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믿었다.
레이는 그리 되뇌며 다시 걸음을 걸었다.
흔들리는 레이의 어깨 위에 착 달라붙은 레아가 편안한 얼굴로 침을 흘렸다.
*
주점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지미와 매튜를 포함해 주점의 모두가 자다 깨다 하면서까지 부어라 마셔라를 반복하고 있었다.
술에 취해 완전히 곯아떨어져 회생 불가한 자들은 끌려나왔고, 그 자리를 또 다른 사람이 차지해 부어라 마셔라를 이어갔다.
그때, 레아를 집에 데려다 준 레이가 주점에 들어왔다.
자욱한 술 냄새를 느낀 레이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지미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지미랑 이야기할 게 있으니까, 다들 그만 마시고 자리 좀 비켜줘."
하루 가까이 퍼마셨으니 슬슬 자리를 파할 때도 되었다.
레이가 손짓하자 대부분 비틀거리면서도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허나 술을 너무 마셔 반쯤 인사불성이 된 지미 패밀리의 조직원 중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이, 시발, 이건 뭐 하는 새끼인데 우리 보고 나가라 말아라야!!!"
퍽!
분노하는 조직원의 뒤통수를 누군가 후려치곤 끌고 나갔다.
지미 패밀리의 권력 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 첫 번째에 레이가 있다는 건 이제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지미는 자기 앞에 레이가 의자를 끌고 와 앉자 술을 깨기 위해 전신에 마나를 돌렸다.
마나가 본디 체내의 불순물을 정화하는 작용을 하기도 해 술이 깨는데 굉장히 요긴했다.
다만 하루 가까이 술을 들이부었더니 마나를 돌려도 정신이 바로 맑아지진 않았다.
지미가 두통을 느끼며 자기 이마를 툭툭 치더니 레이 앞에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어... 레이... 그래서... 무슨 일이야?"
"지미, 슬슬 엄마랑 헤어지고 다른 여자 찾아볼 준비 하세요."
"푸흡...!"
술을 재차 들이켜려던 지미가 사레가 들려 끅끅댔다.
"...가, 갑자기 왜?"
"황제 폐하께서 지미에게 하사한 작위와 영지가... 제가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좀 많이 좋아요."
지미에게 이번에 하사된 영지는 본래 황실에서 관리하던 직할령에 가까운 지역이었다.
땅덩어리는 작았지만 황도 인근에 위치해 있어 그 작은 땅에서 거둬들이는 세수가 필립스 백작령에 비해 크게 모자라지 않았다.
지미가 당장에라도 중앙 귀족 행세하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는 수준이었다.
"굳이 그런 지역을 내준 것을 보면 제 측근을 용이하게 통제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는 것 같은데... 물론 지미 입장에서 나쁜 일을 아니고요."
용병일을 하던 지미에게 어쭙잖은 영지를 내려줘 봤자 사기당하거나 날려 먹기 쉬웠다.
물론 지미가 그리 만만한 자는 결코 아니었으나, 태생이 태생이다 보니 불안 요소가 많았다.
하지만 황실 직할령이었던 지역을 하사해준다면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지미의 영지는 황실에서 파견한 행정관들이 오랫동안 관리해 왔고 앞으로도 관리해줄 테니... 배울 것 좀 배우며 천천히 장악해나가면 될 거예요. 행정관들도 황실 눈치 보여서 함부로 수작을 못 부릴 거고요."
"아니...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지미, 애초에 말이죠, 작위를 하사 받고 귀족이 되었으니 지미는 새로운 신분을 얻은 거예요. 그 이전에 했던 결혼 관계는 성립하지 않아요."
그 때문에 평민이 신분 상승을 이루면 전 배우자는 그대로 쫓겨나는 게 일반적이었다.
굉장히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 자라면 배우자에게 돈을 잔뜩 쥐여주고 좋게좋게 헤어졌지만 드문 경우였다.
레이도 지미가 벨라에게 돈이나 잔뜩 쥐여주고 헤어질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허나 지미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갑자기... 왜 그런 얘길 하는 거야?"
"원래 그럴 생각이었어요."
만약 레이가 귀족이 된 지미와 벨라를 재결합시킬 계획이었다면 '성'을 가지고 장난을 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미에게 퐁퐁 성을 내린 뒤 재결합 해버리면 레이도 레이 퐁퐁 레아도 레아 퐁퐁이 되어 버리는데 레이가 미쳤다고 그런 장난질을 치려고 했겠는가.
레이가 술잔을 찰랑이며 말을 이었다.
"레아 때문에 그래요. 레아는 남들 눈에 띄면 안 되잖아요. 남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신흥 귀족의 자식이 아니라, 변방의 땅에서 평민으로 조용히 살아가야 안전할 거예요."
"..."
지미는 잠시 고민하다 되물었다.
"의심받지 않겠냐? 벨라는... 널 키워준 사람이야. 네가 벨라를 얼마나 아끼는지... 높으신 분들도 조사해봤으니 이제는 알겠지."
"네, 그 부분은 저도 거슬리긴 하는데, 입을 잘 놀려야죠."
부귀영화를 거절하고 자기 뿌리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황금으로 된 의자가 아닌 흙냄새 나는 고향 땅 위에서 더욱 큰 행복을 느끼는 부류도 분명 존재했다.
"제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죠.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 생각이에요. 지미가 엄마에게 다시 혼약하자 권했지만, 엄마가 거절한 거죠. 고향 땅에서 삶을 영위하고 싶다는 이유로."
"아니, 그..."
지미는 뭐라 항변하고 싶었지만 남아있는 술기운 탓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입을 우물거렸다.
레이는 지미가 따라준 술을 맛보더니 씁쓸히 웃었다.
"앞으로 한 3년 정도만 더 엄마 곁을 지켜주세요. 그때까지 드래곤하트 파편을 구해볼게요."
그 후에는.
벨라는 변방의 고향 땅에서 레아와 함께 삶을 이어갈 것이다.
필립스 백작이 벨라를 보호해줄 것이고 루나 또한 벨라를 신경 써줄 것이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을 쯔음엔, 다른 아이들도 필립스 백작과 벨라의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지미와 매튜 또한 작위를 얻고 새로운 가정을 차리고 나서도 간간이 백작령에 들려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줄 테고 말이다.
레이 입장에서 유일하게 거슬리는 건 루비하 왕국이었다.
사실 루비하 왕국이 미치지 않고서야 제국을 먼저 도발할 리도 없고 필립스 백작령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대해지겠지만.
근래 루비하 왕국이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데다 내부에 악마 숭배 조직까지 존재하니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제국 쪽에서도 정보는 수집하고 있겠지만... 필립스 백작령을 떠나기 전에 한 번 시그니 산맥의 레인저들과 접촉해볼까...'
레이가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지미가 손을 휘저었다.
"잠깐, 잠깐만..."
지미가 마침내 레이와 대화하는 내내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고 물었다.
"레이, 너도... 아니... 너는 황제 폐하께 작위와 영토를 하사받지 않은 거냐...? 그냥... 네가 하사받은 영토 안에 네 사람들을 모아서... 아, 물론 눈치는 좀 보이겠지만... 아니면 그냥 알레시아 님과 혼약하고 여기서 지내는 것도..."
지미는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확실히 레아라는 존재가 골치를 굉장히 아프게 만들었다.
지미의 어쭙잖은 지식으로 생각해봐도 레아는 레이의 발목을 강하게 붙든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허나 그것과는 별개로, 레이는 미래에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전혀 얘기하고 있지 않았다.
"3년 뒤에는... 그때쯤이면 너도 혼약을 할 텐데, 어떻게 할 생각이야? 말해 봐. 그걸 알아야... 나도 널 돕지."
레이가 잠시 고민했다.
티티에 관한 일도 남아 있었고, 드래곤하트를 요구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몇 번은 더 전투에 참여해 공적을 세워야 했다.
그걸 감안하면...
"..."
레이는 입을 열기 전에 서클에 새겨진 계약 각인으로 루나의 위치를 확인했다.
루나는 찾아야 할 도구가 있다고 디나르로 떠나 있었다.
루나와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음을 확인한 레이가 착잡한 목소리로 답했다.
"3년 뒤쯤엔 제 수명이 다할 겁니다. 죽겠죠, 아마도."
지미는 남아 있던 술기운이 확 깼다.
고백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