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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14화 (214/446)

214화

로필렌은 필립스 백작령에 마법 연구를 위한 공방을 하나 갖춰놓았다.

대단히 전문적인 작업이 가능한 공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구색은 그럴듯했다.

루나는 그곳에서 박살난 아티펙트, '발레리우스'를 살피고 있었다.

본래 울트의 아티펙트였으며 블링크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발레리우스는 루나의 무리한 사용에 의해 완전히 기능이 정지되어 버렸다.

츠즉!

루나가 발레리우스의 구조 해석을 시작했다.

루나는 꽤 오랜 시간 제자리서 가만히 앉아 발레리우스의 구조를 살피는 데 집중했다.

"..."

마도 공학은, 과거부터 계속 발전되어 왔다.

중간중간 소실되는 기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기술력은 우상향을 그려왔다.

그 발전의 역사가 대부분 오벨리스크에 기록되어 있었기에, 리실로테의 안배를 이어받은 루나는 기술 발전의 과정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발레리우스는 수백 년 전에 제작되었다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진보된 아티펙트였으며 또한 세련됐다.

독특한 조합의 기술적 융합을 추구한 아티펙트이기에 배울 점도 있었다.

허나 마도 공학적인 측면에서 이 아티펙트는 전반적인 기술이 낡아 있었다.

결국 현시대의 정상급 아티펙트보단 뒤떨어진다는 뜻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리우스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블링크'를 실현시켰다.

이건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수치화나 물질화가 불가능한 무언가가 이 아티펙트에 작용하고 있었다.

이건, 그러니까... 드래곤이 지닌 '의지'의 발현이었다.

의지가 뚜렷한 논리와 매개 없이 현상을 일으키는 것. 세간에서는 그걸 권능이라 칭하고는 했다.

자연 발생한 생물체가 이런 권능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종족 단위로 말이다.

결국 드래곤이란 생물체는...

"..."

루나가 고민하다 고개를 돌렸다. 공방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발걸음 소리를 들으니 레이의 것이었고, 굳이 발걸음 소리를 듣지 않아도 영혼에 맺은 계약 각인 덕분에 레이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루나가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로필렌이 레이를 맞이해주었다.

"아, 오셨습니까?"

"오랜만이야, 로필렌."

공방으로 안내받아 자리를 찾아 앉은 레이가 그동안 별일 없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로필렌은 외부인들이 자꾸 드나들어 결계를 신경 쓰느라 고생했다고 투덜댔다.

로필렌의 스트레스가 이해갔기에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지금은 감시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던데."

"하르... 아니, 레이 님이 돌아오실 때쯤 외부인들이 대부분 철수했습니다."

"그랬겠지."

필립스 백작령의 조사도 그럭저럭 끝났을 테고, 레이가 돌아온 뒤에도 감시 인원을 철수시키지 않는다는 건 대놓고 레이와 날을 세우자는 의미밖에 되지 않았다.

아직까지 외부인이 목에 힘주고 돌아다니고 있었다면 레이가 항의 차원에서라도 제대로 털었을 것이다.

"나 없는 동안 고생했어, 로필렌."

"근데 황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로필렌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어차피 알 거 다 아는 로필렌이었기에 레이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적당히 축약해 설명해 주었다.

로필렌은 이야기를 듣다가 '크흡... 그 자리에 제가 있었어야 했는데...' 따위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오열하는 시늉을 하곤 했다.

그러다 메테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로필렌이 되물었다.

"메테오의 방향을 틀었다고요?"

"그래."

"정말로... 메테오의 방향만 트신 게 맞습니까?"

"..."

레이가 떫은 표정으로 로필렌을 바라보다 한숨 쉬었다.

"다 알면서 뭘 자꾸 꼬치꼬치 캐물어?"

"어호흐흐흐..."

대단히 음침한 웃음을 흘린 로필렌이 레이를 떠나 루나에게 가깝게 의자를 옮겨 앉았다.

레이가 아니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로필렌은 개의치 않았다.

로필렌은 마법사답게 계산이 빨랐다.

필립스 백작령의 권력 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루나가 1위, 레이가 2위, 필립스 백작은 3위에 불과하다... 따위의 결론을 속으로 내린 로필렌은 앞으로는 레이가 아닌 루나 곁에 딱 붙어 있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히 하르시아고 나발이고 한 10년만 지나면 레이는 루나의 애착 인형 신세로 전락할 게 로필렌 눈에는 빤히 보였다.

레이가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는 아프텔이 깃든 팔찌를 내놓았다.

"로필렌, 네가 도와줘야 할 게 있어."

레이는 황실의 드래곤 하트를 얻기 위해 가짜 이론이 필요하다는 걸 로필렌에게도 설명했다.

당연히 본인이 시한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로필렌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를 도와서 빠르게 완성해 보겠습니다. 오래 걸릴 일은 아니지요."

마법 이론이란 게 실증하고 검증하는데 시간과 비용이 대부분 깨지기 때문에 그럴듯한 가짜 이론을 만드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루나라는 천재와 오벨리스트의 방대한 참고 자료까지 있었으니 훨씬 더 완성도 높은 가짜 이론을 만들 수 있었다.

레이가 루나에게 한 번 더 당부했다.

"루나, 그럼 잘 부탁할게."

"..."

루나가 감정을 알아보기 힘든 은색 눈동자로 레이를 빤히 쳐다봤다.

레이는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애썼다.

루나가 한참의 침묵 끝에 레이가 건네준 팔찌를 손에 쥐었다.

"...알겠어요."

"응, 고마워."

레이가 담담하게 웃었다.

*

로필렌과 대화를 마친 후.

레이는 공방을 떠나 영주성으로 가는 도중 문득 지미가 생각나 지미 패밀리가 운영하는 술집에 들렀다.

지미 패밀리가 운영하는 주점에는 술에 떡이 된 남자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저녁에 마시기 시작한 술자리를 아침까지 이어간 모양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있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놈들 중엔 젠킨슨도 섞여 있었다.

술에 떡이 된 남자들을 밟고 지나간 레이가 탁자에 머리를 박고 있는 지미를 툭툭 쳤다.

지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을 감고 실실 웃다가 갑자기 자기 혼자 꺽꺽대기 시작했다.

"커걱, 컥...! 나, 나는... 네 애비가 아니다...!!!"

악몽을 꾸는 모양이었다.

레이가 지랄났다고 중얼거리고는 주점을 나왔다.

꼴을 보아하니 저러다 일어나서 한 잔 더 마실 게 분명했는데, 그냥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놔둘 생각이었다.

레이는 그 이후 영주성에 들러 클레멘스를 찾아갔다.

레이가 복도를 걷는데 마침 반대쪽에서 사과를 물고 있는 엘프가 네 발로 기어오고 있었다.

미네르는 기어오다 말고 레이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입에 물었던 사과를 툭 떨어뜨렸다.

"..."

굳어 있던 미네르가 뒤늦게 사족보행으로 백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미간을 꾹꾹 누른 레이가 미네르를 향해 손짓했다.

"야, 일로 와."

"..."

"일로 안 와?"

미네르가 어설프게 두 발로 서서 레이를 향해 미적미적 걸어왔다.

미네르가 눈치를 보며 레이 앞에 서자 레이가 하나 남은 미네르의 귀를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길쭉한 귀가 배배 꼬인 미네르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자꾸 네 발로 기어 다니면 양쪽 다 잘라버린다고 했지?"

"잘못! 잘못! 잘못했어요옷...!!"

"하아..."

미네르의 귀를 충분히 비틀어 짠 레이가 한숨을 푹 쉬며 다시 클레멘스가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클레멘스가 반갑게 레이를 맞아주었다.

레이는 의자에서 일어서려는 클레멘스에게 그냥 앉아 있으라고 말하고는 바로 본제를 꺼냈다.

"네 활동 제한을 풀어줘도 될 것 같아. 그래도 신분이 밖으로 드러나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 몸은 적당히 사리고."

"아, 감사합니다."

"백작령의 가용 예산이 크게 늘 거야. 백작님 좀 잘 도와드려. 당장은 이 영지에 너만큼 금전감각이 좋은 사람은 없으니까."

"예,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고."

레이가 그동안 잘 지냈냐고 뒤늦게 클레멘스의 안부를 물어본 뒤 옆으로 눈을 돌렸다.

클레멘스의 그림 몇 장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사과를 손에 쥔 아름다운 엘프의 그림이 레이의 눈에도 꽤나 인상 깊었다.

"...쟤가 걔냐?"

"...네, 쟤가 걔일 겁니다."

엘프 형상을 한 바퀴벌레가 모델이라기엔 그림이 참 아름다웠다.

레이는 다음에 황도로 올라갈 때 클레멘스의 그림을 몇 점 챙겨가 평가 좀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아... 그리고, 미네르 보고 두 발로 걸어 다니라고 말 좀 해놔. 내 동생은 엘프가 다 미네르처럼 기어 다니는 줄 알잖아."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몸 관리 잘하고."

레이는 슬슬 일어나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레이의 동생, 레아가 영주성 안으로 신나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쟤는 여기 무슨 일이야?"

*

영주성 내부의 훈련장에서.

디디에가 모하메드와 검을 나누다가 호흡을 골랐다.

디디에는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에서 머물 때 에른스트의 허가 아래 여러 실력 있는 검사와 검을 섞어본 덕분에 실력이 한 층 더 향상되어 있었다.

모하메드가 흡족한 표정으로 검을 꽂아넣었다.

발전 속도와 나이를 보았을 때 디디에는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무난하게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들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모하메드가 자랑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디디에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다 잘 풀려 가는 것 같다고 모하메드는 내심 안도했다.

그때 레아가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 피코르의 안내를 받아 훈련장으로 깡총깡총 뛰어들어왔다.

레아는 최근 몇 달 동안 외부의 감시자들 때문에 갇혀 지내다시피 해야했다.

그러다 오랜만에 자유를 되찾았으니 신이 안 날 수가 없었다.

훈련장에 있던 기사들이 활짝 웃으며 레아를 맞이해 주었다.

원래 영주성 내부의 훈련장에 아무나 들여서는 안 되기는 했다.

허나 레아가 지미의 자식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레아가 하는 행동이 귀여워서 기사들조차 절로 마음의 경계가 느슨해졌다.

"나도 대련! 대련해볼래요!"

레아가 훈련용 목검을 들고는 대련을 하겠다고 까불어 댔다.

피코르가 활짝 웃으며 앞으로 나서더니 마찬가지로 목검을 들어 올렸다.

레아가 피코르를 향해 어설프게 목검을 겨누며 기합을 넣었다.

"흐으~압!"

앙증 맞은 기합이었다.

피코르가 녹아내리는 표정을 가리지 못한 채 레아가 휘두르는 목검을 톡톡 막아주었다.

그러다가 레아가 목검을 횡으로 힘껏 휘두르자, 피코르는 정강이를 일부러 내주고는 과장된 몸짓과 함께 비명을 질렀다.

"으악!"

허공에서 빙글빙글 돈 피코르가 바닥을 굴렀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피코르를 보며 레아가 해맑게 웃으며 좋아했다.

그리 좋아하는 레아를 보며 훈련장에 있던 기사들이 다들 아빠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 광경을 세상 아니꼬운 표정으로 지켜보는 자가 있었으니.

레이가 훈련장 문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콱 찌푸렸다.

레이는, 기사를 이겼다고 기세등등해하는 레아의 모습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레이가 목검을 쥐고 훈련장으로 걸어들어왔다.

"우리 동생, 세상의 혹독함과 쓰라림을 맛봐야겠구나..."

"...!!"

레이를 보고 화들짝 놀란 레아가 황급히 피코르의 뒤로 와다다 달려가서 숨었다.

"피코르 님! 나쁜 오빠를 혼내주세요!"

"내가...?"

피코르가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으며 레이를 보았다.

"..."

상대가 될 리 없지.

피코르는 빠르게 저항을 포기한 후 슬그머니 자리를 비켰다.

방패를 잃은 레아가 충격에 빠져 입을 크게 벌리는데 레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디... 우리 동생 실력 좀 볼까?"

구석에 몰린 레아가 우물쭈물하다 결국 목검을 들어 올렸다.

나는 기사님들도 이겼어! 레아는 속으로 그리 외치며 자신감을 되찾았다.

레이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용기백배한 레아가 목검을 힘껏 휘둘렀다.

"이얏!"

탁!

목검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레이는 적당히 방어 자세만 취하며 레아의 휘두르기를 받아주었다.

앙증맞은 레아의 휘두르기는 레이의 예상보다 조금 더 날카로웠다.

레이가 계속해서 레아의 휘두르기를 막아만 내자 지켜보던 기사들도 레이가 동생과 참 잘 놀아준다고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 레아의 목검을 흘려낸 레이가 레아의 정수리를 딱-! 때렸다.

살아생전 목검에 머리를 처음 타격 당한 레아가 금세 울먹울먹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레이는 차가운 얼굴로 경고했다.

"울어도 안 봐줄 거야."

"..."

레아는 울먹울먹하면서도 레이에게 성난 감정을 담아 목검을 휙휙 휘둘렀다.

그러나 레이는 레아의 검에 맞아주기는커녕 도리어 목검으로 레아의 어깨와 허벅지를 연달아 타격했다.

지켜보는 기사들도 저건 좀 심하지 않나...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레이가 레아의 종아리를 꽤 강하게 후려쳤다.

퍽!

"왁!"

레아가 종아리를 얻어맞고 철푸덕 넘어졌다.

엄청 아팠다. 레아는 그야말로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이었으나 레이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목검을 까닥였다.

"빨리 안 일어나면 또 맞는다?"

결국 레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레아가 레이를 향한 원망스러운 감정을 담아 목검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오빠 미워!!!"

감정의 폭발과 함께 용혈이 발현됐다.

레아로부터 뻗어나온 강렬한 불길이 레아가 손에 쥐고 있던 목검을 집어삼키더니 레이에게까지 닿았다.

처음부터 해독의 권능을 활용하고 있던 레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불길을 진압했다.

레이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지만, 자기가 발현한 불길에 자기가 엄청나게 놀란 레아가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레이가 빽빽 우는 레아를 안아주었다.

레아는 오빠 품에 꼭 안긴 채 계속해서 빽빽 울어제꼈다.

레이는 레아를 조금씩 흔들며 달래주면서도, 표정에 내려앉은 냉기를 지우지 않았다.

고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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