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13화 (213/446)

213화

레이는 울트와 함께 보육원을 찾아갔다.

보육원은 예전보다 돌보는 고아들의 수가 줄어 있었다.

필립스 백작과 지미의 노력 덕분에 전반적인 백작령의 생활 환경이 많이 개선되어 고아의 숫자가 줄어든 덕분이었다.

아이를 책임감 없이 버리는 부모들을 추적해서 많이 족쳤고 말이다.

보육원이 직접 돌보는 아이들은 감소한 대신, 보육원은 백작령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기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교육기관으로써도 보육원은 긍정적인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들어가는 예산을 고려하면 필립스 백작가에 이득이 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필립스 백작은 여러 이유로 현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레이가 자금을 잔뜩 끌고 와준 덕분에 보육원은 계속해서 존속할 수 있게 되었다.

보육원에 도착한 레이와 울트가 아이들이 웃는 얼굴로 돌아다니는 보육원의 안뜰에 발을 들였다.

인사를 해오는 아이들에게 적당히 손을 흔들어준 레이가 보육원 안뜰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 어려 보이는 엘프 하나가 멍한 눈빛으로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티티."

레이가 몇 번이나 부름을 반복한 끝에 엘프가 고개를 돌렸다.

그 엘프를 향해 울트가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울트가 힘겹게 다가가 앞에 서자, 멍하니 있던 엘프가 손을 뻗어 울트의 손가락을 쥐었다.

엘프는 말없이 울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엘프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이 반가움인지 호기심인지 혹은 그 어떤 것도 아니었는지 레이와 울트는 알 수가 없었다.

무너지듯 무릎을 꿇은 울트가 끓는 듯한 울음소리를 집어삼켰다.

레이는 한참을 제자리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

"그래서..."

티티와의 만남 후.

레이가 보육원 안뜰에 배치된 의자에 울트와 나란히 앉은 채 입을 열었다.

"저주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관련된 정보라는 게 뭡니까?"

울트는 분명 티티, 과거엔 레시나라 불렸던 영웅의 저주를 해결할 힌트를 지하도시에서 찾았다고 했다.

한숨을 길게 쉰 울트가 저주로 인해 기능을 거의 잃은 게네시스를 꺼내 보였다.

"세계수의 저주는 저주를 위한 저주가 아니야. 거기서 그걸 알게 되었어."

"무슨 말씀이에요?"

"세계수가 세상에 끼치는 영향은 알고 있지?"

"네, 대충은 알고 있죠."

멀고 먼 과거에도 세계수는 대지를 지키는 수호신에 가까운 존재였겠지만.

현 시점에서 세계수의 역할은 더욱 분명해지고 중대해졌다.

세계수는 마경의 침식을 억제시켜 그 범위를 제한시키는데 교단과 함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완전히 마경화된 지역은 장기적인 방위 자체가 불가능해지기에 세계수의 소실은 결국 세상의 멸망과 직결됐다.

"세계수의 힘은 무한하지 않아."

세계수의 힘이 무한했다면 진즉 마경화된 대지마저 완전히 정화했을 것이다.

허나 세계수의 힘은 무한하지 않았기에, 현 상태를 유지하는데도 굉장히 많은 부하가 걸렸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해. 비록 이미 마경이 된 땅을 정화할 수는 없었지만, 세계수의 힘으로도 충분히 마경의 확장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해."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금지된 숲'의 존재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수가 대부분의 힘을 소모하고도 마경이 조금씩 확장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저주는... 세계수가 대지를 정화하며 감수해야 하는 반동... 아니면 부하라고 해야 할까? 그런 걸 대신 받아주는 계약이라고 설명할 수 있어."

"세계수가 감수해야 할 부담을 나눈다?"

"그래. 과거처럼 세계수가 홀로 현상 유지를 하는 게 불가능해졌으니, 죄를 지은 엘프에게 그 부담을 전이한 거야. 그게 세계수가 레시나에게 내린 저주의 정체지."

"아무리 대단한 영웅이라 해도 그런 부담을 견디기는 한계가 있을 테고, 실제로도 그런 것 같은데 레시나 죽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레시나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이라 해봐야 앞으로 3년에서 5년이었다.

울트가 답했다.

"다른 누군가를 희생양 삼거나, 아니면 마경의 확장이 가속되겠지."

"음..."

레이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레시나나 게네시스도 결국은 세계수가 지닌 힘의 일부였다.

그러니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세계수는 지금 자신의 일부를 희생해가며 마경의 확장을 저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레시나가 죽는다면 다른 희생양이 세계수의 부담을 대신 감당할 것이다.

허나 이 굴레가 영원히 이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저주의 해결책이 뭡니까?"

레이는 레시나의 저주를 다른 객체에게 옮기자 따위의 방법 말고 다른 해결책이 있을까 싶었다.

허나 울트는 보다 근본적이고 막연한 해결책을 입에 담았다.

"마경의 침식을 강화시킨 어떠한 원인... 그러니까 '핵'이 존재할 거야."

과거에는 세계수가 쉽사리 마경의 침식을 막았다.

허나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세계수는 마경의 침식을 막아내기 위해 저주를 내릴 희생양까지 필요로 하게 되었다.

세계수의 힘이 약화된 것은 아니었기에, 마경의 침식을 강화시킨 원인이 존재할 게 확실했다.

"그 원인... 그 핵을 제거한다면 저주의 필요성이 다해 레시나에게 내려진 저주도 사라질 거야."

"그럴듯한 가설이네요. 근데 그 '핵'이란 게 무엇인지는 모르고요?"

"...확실히는 몰라."

울트가 한숨을 쉬었다.

레이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울트에게 당부했다.

"일단 사고 치지 말고 한동안 몸 회복하는 것에만 집중해요. 자작님이 말한 부분에 대해선 폐하께 조사를 요청해 보겠습니다."

레이의 생각보다 일이 위중했다.

울트가 말한 사안에 관해 레이가 조사를 요청하다면 제국 또한 적극적으로 움직여줄 가능성이 컸다.

평시라면 씨알도 안 먹혔을 수도 있겠지만, 작금의 제국은 악마숭배자가 벌인 대형 사태에 연거푸 휘말리며 경각심이 굉장히 치솟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세계수에 관한 일은 모든 국가와 종족의 존속에 큰 영향을 끼쳤다.

결코 무시하기 어려웠다.

레이는 울트에게서 사건을 해결할 힌트가 될 정보를 마저 들은 후 에른스트와 황제에게 보낼 서한의 내용을 메모지에 정리했다.

그 사이 울트는 구석에서 손가락을 빨고 있는 티티를 보며 천천히 이를 갈았다.

"누군가는 감당해야 할 저주였다고 해도, 난 그 저주를 보며 악의를 느꼈어."

세계수의 저주는 레시나의 '정신'을 가장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다.

온전한 정신으로 자신의 영락을 지켜볼 수 있도록, 그래서 더욱 괴로워하도록...

세계수의 진정한 저의는 알 수 없었으나 울트는 거기서 끔찍한 악의를 느꼈다.

레시나는 모든 힘을 잃고 육체마저 쇠락하고 나서야 기억과 현명함을 서서히 잃어가기 시작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레시나는 비록 모든 힘을 잃었을지언정 여전히 그 정신만은 또렷하고 맑아 600년 전 영웅의 현명함을 지니고 있었다.

울트는 아직까지도... 어린 날의 자신을 재워주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던 레시나의 목소리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레이도 레시나를 바라봤다.

레시나는 정신보다 힘과 신체가 먼저 퇴화했다.

아직 기억과 현명함을 잃지 않고 울트를 돌봐주었던 과거에도 레시나의 겉모습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다.

손가락을 빨며 걸어다니는 레시나를 바라보던 레이가 전생에서 들었던 울트와 레시나의 이야기를 떠올리다 눈살을 찌푸렸다.

"자작님."

"...?"

레이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젊었을 적에 혹시 레시나 님이랑 잤습니까?"

레이와 울트가 서로를 미친놈 보듯 쳐다봤다.

*

레이가 하루 일정을 끝내고 지미와 벨라의 집을 찾아갔다.

오랜만의 귀환이라 오늘 하루는 지미와 벨라의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지미는 이미 술을 퍼마시러 나갔기에 벨라가 반갑게 레이를 맞아주었다.

"아들 왔어?"

"아, 엄마."

레이가 오자마자 당부했다.

"아까 가디 자작님 봤지? 혹시라도 레아가 가디 자작님 가까이 못 가게 미리 단단히 좀 가르쳐 놔."

그 새끼 취향이 존나 위험한 새끼였다고 레이가 중얼거리자 벨라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아들, 뭐라고 했어?"

"어, 뭐, 아니야. 이따 다시 얘기할게. 레아는 어디 있어?"

"저기 방에. 엄마는 식사 준비할 테니까 잠깐 레아랑 좀 놀아주고 있어."

"응, 알겠어."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레아의 방문을 열었다.

레아는 레이가 선물한 알록달록한 크레용으로 신나서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빠 트롤 뚜루룻뚜뚯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그림을 그리는 레아를 보고 레이가 피식 웃었다.

레아는 레이가 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림 그리는데 푹 빠져 돌아보지도 않았다.

레이가 레아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어디 보자..."

레이는 레아가 그리고 있던 그림을 살피더니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있는 무언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무슨 동물을 그린 거야?"

"엘프!"

"..."

잠시 미간을 매만진 레이가 입을 열었다.

"레아, 엘프는 네 발이 아니라 사람처럼 두 발로 걸어 다녀."

레이가 그리 조언하자 레아가 고개를 돌리더니 세상 한심한 눈으로 레이를 쳐다봤다.

"오빠 바보야?"

"..."

레이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유독 레아 앞에서만 쉽사리 바닥을 드러내는 레이의 인내심이었다.

레아는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자기주장을 펼쳤다.

"엘프는 네 발로 다녀! 내가 직접 봤어!"

"엘프를 어디서 봤는데?"

"영주성!"

'시발.'

레이는 미네르를 떠올리며 속으로 욕을 한 후, 연이어 클레멘스를 떠올렸다.

레이가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데려왔던 클레멘스는 정보를 누설할 위험이 있다고 반쯤 가둬두고 있었으나, 이제는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레이는 클레멘스의 활동 제한을 풀어줘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레아에게 다시 조언했다.

"레아, 엘프는 보통 두 발로 다녀."

"아냐!! 엘프는 이렇게 움직여!"

레아가 두 손과 두 발로 땅을 디딘 채 뽈뽈뽈 움직이며 미네르 흉내를 냈다.

레이는 여기서 더 입씨름을 했다간 한 대 쥐어박을 것 같아서 그림을 보며 화제를 돌렸다.

"어디... 여기 그려진 두 사람은 엄마랑 아빠 같고..."

"엄마 아빠 맞아!"

"그리고 여기는..."

키가 작은 여자 하나와 남자 하나가 그려진 모습을 보며 레이가 물었다.

"이 두 사람은 레아랑 나인가?"

"얘는 나 맞는데 얘는 오빠 아니야."

"그럼 얘는 누군데?"

"남자친구!"

레이의 미간이 곧장 찌푸려졌다.

"...남자친구 생겼어?"

"아직 없어. 앞으로 만들 거야. 레아도 결혼해야 되니까!"

남자 친구를 만들어야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그리 말하며 해맑게 웃는 레아를 보고 레이가 중얼거렸다.

"우리 동생, 허황된 꿈을 꾸는구나."

레아가 결혼을 해?

그러다 아이라도 낳으면? 그 뒷수습은 대체 누가 하는가?

일단 레이는 그때까지 살아있지도 못하겠지만.

설령 살아있다 해도 레이는 벨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레아의 뒤치다꺼리까지 해줄 생각은 쥐꼬리만큼도 없었다.

동생, 소리 그만 지르고 다리나 더 벌려봐... 뭐 그딴 소리를 또 입에 담을 수는 없잖은가.

"레아, 레아는 앞으로 독수공방해야 해. 결혼 못 해."

"싫어! 레아는 남자친구 만들어서 결혼할 거야!"

땡깡을 부리는 레아를 향해 레이가 한숨을 쉬었다.

"정 결혼하고 싶으면 오빠가 레아랑 결혼해줄게."

레아가 기겁했다.

"오빠랑 결혼 싫어!!"

"아니야, 레아는 오빠랑 결혼해야 해. 레아는 오빠 신부야."

"레아는 오빠랑 결혼 안 할 거야!!"

고집을 부리는 레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레이가 결국 아니꼬움을 이기지 못하고 딱밤을 날렸다.

딱- 소리와 함께 이마에 딱밤을 맞아 뒤로 넘어간 레아가 울음을 터뜨렸다.

"빼애애애애애액!!!!"

그리 세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레아가 빽빽 울면서 벨라에게 달려갔다.

"엄마아아아!!!"

"어머, 우리 딸 왜 그래?"

"오빠가 레아 때렸어!!"

레아가 일러바치는 소리를 들으며 레이가 웃음을 머금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벨라가 차려주는 오랜만의 식사가 참 먹고 싶었다.

단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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