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실리아 백작.
황제의 대리인 신분으로 이 자리에 선 실리아 백작은 담담하게 자기 역할을 다했다.
"폐하를 대신하여 나에게 부여된 권한으로 그대에게 명하노라..."
명예, 헌신, 충성에 관한 이야기를 실리아 백작은 꽤 오랜 시간 늘어놓았다.
이래저래 덧붙인 게 많았으나 결국엔 귀족이 행해야 할 책임과 책무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미와 매튜의 눈동자가 초점을 잡지 못하고 계속 빙글빙글 돌았다.
실리아 백작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바보라도 이게 '작위'에 관한 내용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지미와 매튜의 두뇌가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상황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실리아 백작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지미를 내려다보며 선언했다.
"헬름의 성을 내린다."
레이는 퐁퐁이 아니어서 아쉽게 되었다고 중얼거렸다.
퐁퐁 말고 다른 성을 고민해볼 걸 그랬나. 예컨대 지미에게 디시, 매튜에겐 워시 성을 내린다든가...
레이가 그런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실리아 백작이 칙서를 기사에게 건네고는 황제가 내린 보검을 받아서 지미에게 겨누었다.
툭툭
지미의 양 어깨를 보검으로 두드린 실리아 백작이 목함을 지미에게 건넸다.
그후 매튜에게도 같은 절차가 진행됐다.
했던 말을 반복한 실리아 백작이 매튜를 내려다보며 선언했다.
"벨모어의 성을 내린다."
역시나 목함을 건네준 후 수여식이 종료됐다.
아무리 약식이라 해도 상당히 날치기로 끝낸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레이가 바라던 바였다.
이제 지미는 지미 헬름, 혹은 짐 헬름 자작이 되었고 매튜는 매튜 벨모어 자작이 되어 제국의 귀족 사회에 편입됐다.
작위 수여의 경위는 두 사람이 제국 방위에 큰 공적을 세웠다... 정도로 퉁쳤는데 디테일한 부분은 황실과 프리슬란 가문이 보강해줄 예정이었다.
지미는 멍한 얼굴로 받은 목함을 열어보았다.
황실에서 내린 인장반지가 그 안에 들어있었다.
앞으로 헬름 가문을 상징하게 될 방패 문양이 인장반지에 새겨져 있었다.
수여식이 끝나자 기사들과 실리아 백작은 곧장 물러나 황도로 귀환할 준비를 했다.
필립스 백작령에서 며칠 동안 지내며 여유를 부리기엔 다들 바쁜 몸이었다.
필립스 백작은 떠날 준비를 하는 그들과 정중히 인사를 나눈 뒤 지미와 매튜에게 다가갔다.
작위 수여식의 몇 없는 참관인 노릇을 하게 된 필립스 백작이 웃음을 머금은 채 악수를 건넸다.
"축하하오."
"아, 그..."
지미는 악수를 하면서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평민 입장에서야 귀족이 다 비슷해 보였지만 귀족 사이에서도 분명한 급이 존재했다.
평민이 작위를 얻는다고 해봐야 기껏해야 힘 있는 귀족의 가신 가문 같은 걸로 편입되어 잠깐 귀족 흉내 좀 내다 죽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허나 지미와 매튜에게 수여된 것은 계승 가능한 작위였다.
그것도 황제, 정확히는 황제의 대리인이 직접 하사한 작위였다.
중죄를 지어 황제가 직접 작위의 박탈을 명하지 않는 한, 지미와 매튜의 작위는 누구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영원불멸한 상징성과 권위를 지니게 될 것이다.
지미와 매튜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 세계의 모든 비루한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란 벽 앞에 절망하고 무기력해져야만 했다.
그렇기에 아무리 성인을 자처하는 이라고 해도, 귀족이란 신분을 향한 강렬하고 근원적인 갈망만은 버리지 못했다.
"하아..."
뒤늦게 작위를 얻었다는 현실이 피부로 다가왔다.
감정이 복받쳐 오른 지미와 매튜가 서로를 포옹했다.
눈시울이 붉어져 물기가 차오름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낮은 신음을 흘리는 두 사람에게 레이가 다가갔다.
"두 분이 알아야 할 게 꽤 많긴 한데..."
두 사람에게 수여된 것은 이름뿐인 작위만이 아니었다.
황제가 꽤 인심을 쓴 탓에 레이가 요청한 것에 비해 딸려온 것이 많았다.
물론 레이가 세운 공적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레이가 상기된 얼굴을 한 두 사람을 향해 활짝 웃었다.
"당장은 축하만 드릴게요. 두 사람에게 많이 고마웠어요. 조금 늦었지만, 이리 보답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네요."
지미가 매튜에게서 떨어지더니 힘차게 레이를 포옹했다.
레이를 꽉 끌어안은 지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 넌 내 최고의 아들이야."
"지미, 전 다시 태어나도 아빠의 아들로 태어날 거에요."
"크아아악...!!"
지미가 결국 기쁨을 참지 못하고 각혈했다.
레이는 복잡한 생각하지 말고 당장은 기쁨을 즐기라고 지미와 매튜를 보내준 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여식을 구경하던 벨라에게 다가가 팔을 벌렸다.
벨라는 레이를 마주 안아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고생했어, 우리 아들."
레이가 얼마나 많이 노력했고 얼마나 험난한 길을 헤쳐왔는지 벨라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아들이 많이 대견했고, 또한 많이 고생했으리라는 생각은 변치 않았다.
레이를 안아주는 벨라의 곁에서 레아가 찡찡댔다.
"엄마, 집에 갈래! 나 빨리 집에 갈래!"
레아는 레이에게 받은 선물을 빨리 뜯어서 사용해보고 싶었다.
멋있는 갑주를 입은 기사들을 구경하는 것도 레아에겐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그보다 선물을 뜯어보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레이에게 있어, 레아의 찡찡댐은 도저히 용납 못 할 항거였다.
'동생 주제에... 땡깡을?'
레이가 레아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일로 와. 선물 압수야."
"...!!"
레아는 조금은 커진 스몰데이터를 통해 레이가 진짜 선물을 뺏고도 남을 오빠라는 걸 깨달았다.
위기감을 느낀 레아가 선물을 품에 안은 채 뒤뚱거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꽤나 필사적인 도주였지만, 레아는 품에 가득 안은 선물 탓에 시야가 가려져 결국 누군가와 부딪치게 됐다.
퍽!
"악!"
"어머."
리파가 뒤로 넘어지려는 레아의 몸을 잡아주었다.
레아가 뒤뚱거리면서도 허리를 숙이며 '죄송합니다'라고 외치자 리파는 레아가 귀여워서 웃음을 터뜨렸다.
"어딜 그렇게 열심히 뛰어가니?"
"나쁜 오빠가 쫓아와요!"
리파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마침 나쁜 오빠가 다가오고 있었다.
리파가 레아를 뒤로 숨겨주며 레이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몸 건강히 다녀왔나요?"
"아, 리파. 잘 지냈...?"
레이가 말을 하다말고 리파의 손가락을 보았다.
결혼 반지처럼 보이는 물건이 리파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어, 식 올렸어? 남편이 누구야?"
리파가 대답하려 할 때 가까이 서 있던 필립이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왔다.
필립의 손가락에 리파의 것과 비슷한 생김새의 반지가 끼워져 있는 것을 보고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형님!"
레이가 필립과 어깨동무를 했다.
어린 시절의 필립은 사고를 좀 치고 다녀서 레이에게 꽤 살벌한 경고도 듣긴 했지만 그건 옛날 이야기였다.
이제는 건실한 청년으로 자라 주변 평판도 좋은 필립이었기에 레이는 만족해하며 필립의 등을 두드렸다.
"아이고, 결혼 축하드립니다! 식은 언제 올렸어요?"
"두, 두 달 전에..."
필립은 레이가 불편했다.
자기 마누라인 리파의 전 짝사랑 상대가 레이라는 건... 솔직히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거기다 레이가 능력적으로 워낙 잘난 놈인지라 괜한 열등감이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잘난 레이가 형님 형님 해주며 축하해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레이가 목소리를 잠시 낮추며 필립의 주머니에 백금화 두 개를 쑤셔 넣었다.
"형님, 이거 받으시고, 필요한 일에 쓰세요."
"어, 네, 넵..."
"에이, 말은 편하게 하시고. 여튼 리파 잘 부탁드립니다."
"으응..."
필립의 등을 두드려준 레이가 하늘을 돌아보았다.
태양 가까이 흐르는 구름 위에서.
리파를 보며 따뜻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칼이 레이를 향해 엄지를 한 번 치켜들어주곤 등을 돌렸다.
하늘 위를 걷는 칼의 뒷모습이 점점 더 멀어져가며 흐릿해졌다.
딸이 무사히 시집까지 간 것을 확인한 칼은, 이제 그만 만족하고 가야 할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레이가 멀어져가는 칼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날 줄 아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칼을 가지고 참 많이도 우려먹었기에 레이도 이제 그만 칼을 보내줄 때가 되었다고 납득했다.
레이가 하늘을 향해 손을 작게 흔들고 있는데, 누군가 레이의 등을 콕콕 찔렀다.
뒤를 돌아보니 알레시아가 서 있었다.
"아버지께서 의논할 게 있다고 하시는구나!"
"아, 뭐, 알겠습니다."
당장 필립스 백작과 해야 할 이야기도 꽤 남아 있었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곤 기다리고 있는 필립스 백작에게 다가갔다.
*
필립스 백작의 집무실에 들어간 레이는 그간에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다만 메테오에 관해서는 레이도 필립스 백작에게 솔직히 밝힐 수가 없었다. 이건 정말 레이와 루나만 알고 있어야 할 사안이었다.
레이가 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보며 말했다.
"이건 명목상으로는 트레이드 비용..."
"트레이드...?"
"어, 그러니까 명목상으로는 요하나라는 인재를 영입한? 아니면 빼내간 대가를 프리슬란 가문이 지불한 겁니다."
서류에는 프리슬란 가문에 속한 지역 일부의 조세권을 '100년 동안 양도'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서류에 적힌 지역의 세수만 해도 필립스 백작령에서 거둘 수 있는 세수의 5배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라 서류엔 해당 지역의 유지관리 책임이 프리슬란 후작가에 있으며 관리 소홀로 인한 세수 감소 시 배상 책임까지 명시하고 있었다.
더해서 서류에는 프리슬란 가문의 핵심 권력자들의 서명과 제국의 국새까지 찍혀 있었다.
제국이 망하지 않는 한, 2~30년이 지난다 해서 딴소리가 나올 여지가 전혀 없었다.
말인즉슨 필립스 백작가는 100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해도 필립스 백작령 세수의 5배에 달하는 자금을 챙길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 자금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필립스 백작, 그리고 알레시아의 선택이었다.
변방에서 천천히 가문의 힘을 키워도 되었고 중앙 정계에 진출하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필립스 백작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 정도면 가문은 재건하기에 충분한 기반이었다.
그건 정말 기쁜 일이었으나 필립스 백작은 레이의 의중이 솔직히 이해가 안 갔다.
만약 레이의 의도가 '이거 먹고 떨어져라' 였다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과거에는 마냥 소드마스터 노래를 부르며 레이를 욕심냈지만.
본격적으로 판이 커지니 필립스 백작가는 도저히 레이를 욕심낼 깜냥이 안 된다는 걸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허나 레이가 자기 성과를 자꾸 숨기는 것을 보면 그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레이는 필립스 백작의 기색을 읽고 잠시 고민하다 말을 아꼈다.
수명에 관한 문제를 필립스 백작에게도 밝힐 때가 되었다는 걸 느꼈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루나가 근처에 있는 탓에 함부로 수명 문제를 입에 올리기가 부담스러웠다.
필립스 백작은 레이가 입을 다물고 있자 일단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맙네. 그대에게 많은 은혜를 입는군."
"제가 백작님께 입은 은혜만 하겠습니까."
레이가 겸양을 떨었다.
그리 애매한 분위기로 필립스 백작과의 독대를 끝내고 나온 레이가 밖에서 기다리던 울트에게 다가가 물었다.
"레시나 님을 뵈러 같이 가시겠습니까?"
"..."
울트가 심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단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