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레이는 필립스 백작령에 돌아가기 전에 황제를 알현했다.
아프텔과 통신 가능한 팔찌를 미리 루나에게 맡긴 레이는 거의 맨몸으로 이런저런 검사를 받은 후에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레이가 포이보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가 잠시 허가를 받고 고개를 들었을 때, 황좌 옆에 꽂혀 있는 모로스를 확인할 수 있었다.
본래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간 모로스를 보고 레이는 배가 아프기보단 감회가 새로웠다.
워낙 상징성이 강한 무기라 레이도 저걸 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했던 적이 많았는데, 결국 제자리를 찾아가게 됐다.
어설프게 예법을 연기하는 레이를 향해 제국의 황제, 포이보스가 입을 열었다.
포이보스는 로얄가드 소수와 에른스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레이의 공적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상찬했다.
레이의 공적을 알지 못했던 로얄가드는 황제의 상찬을 들으면서 제 귀를 의심했다.
포이보스가 레이를 바라보며 명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주저 없이 말하라."
"소인은..."
레이는 에른스트와 합의했던 보상안을 다시 입에 담았다.
레이의 공적에 비해 레이가 원한 보상은 굉장히 하찮은 수준이었다.
레이의 죄를 덮어주는 값을 고려해도 균형이 맞지 않았다.
"더 원하는 것은 없느냐?"
"황송합니다."
레이가 고개를 더욱 숙였다.
포이보스는 미리 에른스트와 논의해 준비해둔 보상을 발표한 뒤 레이에게 물러나라 명했다.
잠시 뒤, 포이보스와 에른스트가 단둘이 남았을 때.
아까 전 레이를 살폈던 황궁의 치료사가 고개를 조아린 채 알현실로 들어왔다.
포이보스가 흥미를 드러내며 명했다.
"보고하라."
"적절한 관리를 받는다면 5년에서 10년 정도 생존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신성력을 병행한 치료로도 연명은 불가한가?"
"..."
치료사가 송구스럽다는 듯 더욱 깊게 고개를 조아렸다.
신성력은 외상을 낫게 할 수는 있었지만 몸의 절대적인 내구도가 닳아서 쓸모를 다하는 것은 회복시키기 힘들었다.
그게 용혈 탓에 단명하는 황족의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이유였다.
포이보스가 중얼거렸다.
"짧군."
황제의 입장에서 철저히 계산적으로 생각한다면.
에른스트와 다음 대 소드마스터의 세대교체 시점까지는 레이가 버텨주었으면 싶었다.
더 짧게도, 더 길게도 아닌, 딱 20년 정도 말이다. 허나 치료사의 설명을 들으니 레이가 몇 번만 더 무리하면 10년은커녕 3년도 힘들 듯싶었다.
"..."
포이보스는 얼마 전 보았던 하르시아와 리실로테의 환영이 상기되어 표정을 굳히며 침묵했다.
서로 상충하는 감정이 포이보스의 머리를 복잡하게 헤집었다.
과연 무엇이 신화 속 영웅을 그리 죽게 만들었는가.
그러한 판단이 과연 대국적으로 옳았다고 여겨야만 하는가.
침묵을 이어간 포이보스가 마침내 에른스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후작의 요청은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네."
*
"후우..."
황궁을 나온 레이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번 알리모 왕국 사태는 대외적으론 제국의 황실이 사태 초기부터 개입했다고 알려졌다.
다만, 정보에 좀 더 민감한 고위층들은 이번 사태를 에른스트가 주도했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메테오가 떨어지기 전 제국의 주요 전력들을 결집시킨 게 에른스트인 만큼 그런 추측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더 나아가 '레이'의 존재까지 유추할 수 있는 세력은 극소수였다.
레이는 알리모에서의 작전 중 철저하게 신분, 얼굴, 그리고 공간검의 존재를 숨겼기에 쉽사리 신분이 드러날 리는 없었다.
다만 완전한 은폐는 불가능했다.
앞으로 황실, 프리슬란 후작가, 필립스 백작가로 이권과 자금이 흐를 테니 이쪽도 추적당할 게 분명했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레이는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모로스, 공간검, 1황자, 그리고 티티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황제와 잘 합의하게 되었으니 레이가 걱정하던 폭탄 대부분은 안전하게 처리한 셈이었다.
이제 남은 폭탄은 레아 하나였다.
물론, 이 폭탄은 합의 따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몇 시간 뒤.
레이는 구금되었다가 무사히 풀려난 울트와 만나 악수를 나누었다.
"가디 자작님, 이번엔 운 좋은 줄 알고 앞으로는 경거망동하지 마세요."
"주의할게."
"자작님이 또 사고치면 백작령 사람들 모두가 같이 책임을 묻게 될 겁니다. 저는 그 꼴을 볼 생각이 없어요."
대놓고 경고를 하는 레이에게 울트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확답을 받은 레이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티티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백작령으로 돌아가서 하시죠. 티티와 관련된 문제는 도와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 제발 돌발행동하지 마세요."
"알았어."
"좋아요."
이제 진짜 떠날 때가 됐다.
레이는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로 돌아가 요하나와 데런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후 워프게이트 앞에 섰다.
에리다누스와 전투에서 파괴되었던 워프게이트는 몇 개월 사이에 완전히 복구되어 있었다.
레이의 일행은 워프게이트를 활용해 서쪽으로 이동해 필립스 백작령까지 가는 거리를 크게 줄일 예정이었다.
레이가 에른스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했습니다."
"잘 다녀오거라."
워프게이트가 작동된다.
레이가 일행과 함께 워프게이트 너머로 발을 디뎠다.
오랜만에 필립스 백작령을 찾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
필립스 백작령.
그곳에서 지미는, 레이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숨부터 뱉었다.
그 뺀질뺀질한 얼굴을 다시 볼 생각을 하니 두통이 생겼다.
매튜가 지미의 표정을 보고 혼자 신나서 낄낄거렸다.
"대장, 장성한 아들이 돌아온다는데 왜 한숨을 쉬고 그래?"
"..."
지미의 발작버튼을 제대로 누른 매튜는 참 오랜만에 지미에게 얻어맞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 레이가 돌아온다고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다.
지미는 평소 사용하던 집무실에 홀로 남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다.
명상을 한답시고 가만히 눈을 감으니 어두운 시야 속에서 레이의 얼굴이 여러 개 떠올라 빙글빙글 돌았다.
괜히 더 심란해진 지미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몇 달 전 레이가 필립스 백작령을 떠났을 때 지미는 매우 기뻐했다.
허나 기쁨도 잠시, 황도로 향했던 레이가 대체 무슨 사고를 친 것인지 필립스 백작령에 외부인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고위 귀족이 보낸 듯한 외부인들은 결코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으나 필립스 백작령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돌아다니곤 했다.
그 탓에 지미는 외부인들 눈치를 보며 아랫것들 입단속을 하느라 꽤나 고생해야 했다.
뭐, 이러나저러나.
지미의 슬로우라이프에 레이가 쥐꼬리만큼도 도움이 안 된다는 건 이미 검증된 사실이었다.
근데 그 빌어먹을 놈이 오랜만에 필립스 백작령으로 다시 돌아온다니...
어쨌든 꼬왔다.
"..."
지미는 심마를 다스릴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검을 휘둘러도 가슴의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고 눈을 감고 명상을 해봤자 그놈 얼굴만 떠올라 빙글빙글 돌았다.
결국 지미는 마음을 비우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집무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먼저 버릴 물건을 따로 정리해 밖으로 치웠다.
그후 지미는 물을 가득 채운 양동이와 천조각을 들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젖은 천조각으로 열심히 창문과 책상을 닦은 후 양동이에 있던 물로 헹구기를 반복하고 있자니.
저 멀리서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
지미는 섬뜩함을 느꼈다.
말은 집무실 건물 앞에서 멈추었고, 얼마 못 가 노크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똑똑!
"아빠."
'시발.'
지미를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딱 두 명이었다.
그중 굵은 목소리를 가진 놈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빠, 문 열어요!"
"아, 아빠 없다! 아빠는 여기 없어!"
지미가 애원했지만 레이가 지미의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잠겨 있는 문을 힘으로 뜯어 열어버린 레이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빠!"
"..."
레이의 얼굴을 확인한 지미는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지미는 제자리서 비틀거리며 길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오늘 레이가 돌아온다고 듣긴 했지만, 얼굴을 보는 건 당연히 다음날이 될 줄 알았다.
오랫동안 영지를 떠나 있던 레이였으니 필립스 백작과 하루 정도는 대화를 나누어야 하지 않겠는가.
헌데 레이는 그런 지미의 예상을 깨고 당일날 집무실까지 쳐들어와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레이가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지미에게 물었다.
"아빠, 아들 마중도 안 나오고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요?"
"집무실 청소하다가..."
지미가 물에 젖은 천조각을 들어 올리더니 양동이를 아래에 두고 비틀었다.
배배 꼬인 천조각으로부터 구정물이 양동이를 향해 주르륵 떨어졌다.
"걸레 빨고 있었다."
"..."
레이는 눈앞의 새끼가 지금 항의의 뜻을 담은 고도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래도 몇 달 만에 얼굴을 봤는데 만나자마자 지랄을 하긴 뭐했으므로 레이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인 후 계단을 가리켰다.
"빨리 나와요. 지미 때문에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뭐? 날 누가 기다려?"
"하아, 일단 나와봐요. 영주성으로 가봐야 하니."
나오라니까 또 나가보긴 해야 했다.
지미는 몇 시간 전보다 한참 쭈글쭈글해진 얼굴로 레이의 뒤를 따라갔다.
밖으로 나온 레이가 데리고 왔던 말 위에 올라타자 지미 또한 필립스 백작에게 선물 받았던 군마 위에 올라탔다.
위풍당당한 군마와 쭈글쭈글한 지미의 조합이 겉으로 보기엔 참 안 어울렸다.
지미가 레이의 곁에서 말을 몰고 가며 물었다.
"벨라와 레아는 만났냐?"
"네, 인사하고 오는 길입니다."
"네가 선물 사온다고 약속했다며 레아가 잔뜩 기대하고 마중 나가던데."
"예쁜 자갈을 쥐여주니까 빽빽 울던데요."
"...진짜 자갈 하나 주워왔냐?"
이 놈이라면 진짜 자갈 하나만 주워오고도 남을 놈이란 걸 아는 지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레이가 낄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애들 그림 그리는 데 쓰는 도구도 잔뜩 사왔어요. 먹을 것도 몇 개 가져왔고."
레아가 워낙 시끄럽게 울어댄 탓에 레이는 곧바로 가져온 선물을 전부 넘겨줘야 했다.
레아는 가느다란 팔로 레이가 준 선물을 껴안고는 뒤뚱뒤뚱 걸어가며 기뻐했었다.
지미는 이야기를 듣다가 레이를 한 번 돌아보고는 피식 웃었다.
"이번엔 어째 안 다치고 멀쩡하게 돌아왔네."
"루나 덕 좀 봤죠."
"그... 뭐냐, 메테오가 떨어졌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냐?"
"아, 그거 제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바람에 저도 죽을 뻔했어요."
"..."
지미는 메테오에 관해 더는 질문 않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메테오가 떨어진 경위가 궁금하긴 했지만 자세히 알아봤자 신상에 좋을 것 같지가 않았다.
레이와 지미가 말 위에서 간단히 그동안의 안부를 묻는 동안 영주성에 거의 도착했다.
지미는 영주성을 바라보다 눈가를 좁혔다.
영주성 안뜰에 화려한 카펫 같은 게 길게 깔려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번쩍번쩍한 갑주를 입은 출신불명의 기사들도 도열해 있었는데, 그들 중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갑주를 입은 자도 있었다.
"...저거 제국 황실에서 쓰는 문양 아니냐?"
"네, 맞아요."
"어느 기사단이기에 황실 문양을 갑주에 새겨넣어?"
"로얄가드요."
지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평생 마주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로얄가드를 직접 보니 그냥 헛웃음이 계속 나왔다.
"로얄가드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시냐?"
언뜻 담담해 보이는 지미의 목소리엔 약간의 불안이 섞여 있었다.
레이가 계속해서 말을 몰며 답했다.
"원래 당사자를 황궁으로 불러야 한다는데 귀찮은 절차가 너무 많아 그냥 약식으로 해달라고 했습니다."
정식으로 작위 수여식을 진행하면 날짜를 잡는 것부터 참관인을 추리는 것까지 굉장히 까다로웠다.
"일단 약식으로 끝내고, 나중에 당사자가 원하면 황궁에서 정식으로 진행할 수 있다고도 하네요."
"뭐?"
지미는 레이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의아함을 표했지만.
레이는 끝까지 자기 할 말만 했다.
"하사할 성을 제가 선택해도 된다기에 고민을 해봤거든요."
좀 몽글몽글한 느낌의 성도 고민해 보았다.
예컨대 퐁퐁 같은...
지미 퐁퐁 자작. 들리기야 그럴싸하지 않은가.
근데 후손에게까지 전해질 성에 장난질하기는 레이도 뭐했던 탓에 그냥 황실이 정해주는 대로 받기로 했다.
"뭐, 여튼."
레이가 카펫 끝에 서 있는 노인을 가리키며 조언했다.
"저기 서 계신 분은 궁내부 소속의 고위 관료라고 하니 언행 조심하고요."
"...?"
지미는 상황을 이해 못 하면서도 레이를 따라 말을 몰았다.
영주성에 도착하니 매튜 또한 상황 파악이 안 된 채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레이가 말에서 내리자 로얄가드가 다가와 물었다.
"이분들입니까?"
로얄가드의 태도가 지나치게 정중해 주변 사람들이 흠칫 놀랐으나 레이는 태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쪽이 매튜고, 이쪽이 지미입니다."
레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펫의 양옆에 도열해 있던 기사들이 일시에 검을 뽑아 검 자루를 가슴에 붙였다.
지미와 매튜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레이가 두 사람을 앞으로 밀며 설명을 덧붙였다.
"카펫 밟고 쭉 걸어가서, 저 끝에 가서 무릎을 꿇으면 됩니다."
지미와 매튜는 상황을 전혀 이해 못 한 채 레이에게 떠밀려 기사들이 도열한 카펫 사이로 발을 들였다.
긴장을 끌어올린 채 기사들의 눈치를 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카펫의 끄트머리에 이르렀다.
그 끝에서, 궁내부의 고위 관료이자 백작위를 하사받은 제국의 귀족이며 황제의 대리인 신분으로 이 자리에 선 실리아 백작이 황제의 칙서를 펼쳤다.
"예를 갖추고 황명을 받드시오."
단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