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10화 (210/446)

210화

레이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혹시 요하나를 인질 잡으십니까?"

레이는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애초에 레이는 요하나를 필립스 백작령 안에 묶어둘 생각이 없었다.

잠재력을 개화하고 계속해서 발전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환경과 지원이 필요했다.

시골 구속에서 홀로 검을 휘둘러 높은 경지를 이루는 것은 망상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레이는 필립스 백작령에 돌아간다 해도 몇 달만 머물렀다가 요하나가 다시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할 생각이었다.

근데 에른스트가 이리 나오니 반감이 없잖아 생겼다.

에른스트는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는 레이를 향해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그리 오해할 소지가 충분하다고 나 또한 생각한다만, 다른 이유가 있다."

에른스트가 설명을 시작했다.

현재 요하나는 빠르게 발전하는 중이었다.

검술에 대한 이해가 상승하며 본격적으로 가속이 붙은 상태였기에 지금 타이밍에 갑자기 몇 개월간의 휴식기를 가져버리면 손해가 굉장히 컸다.

그 부분에 대해선 레이 또한 동의할 수 있었으나, 에른스트가 요하나를 붙잡는 주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 아이가 지닌 잠재적 가치가 너무 크다."

세간에서 '소드마스터'란 지고의 경지에 닿을 가능성이 약간이라도 있다고 여겨지는 인재는 몇 명 있었다.

호적상 레이의 고모인 세리아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허나 소드마스터 유망주들이 정말로 소드마스터란 경지에 닿을 수 있을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천재 중 천재라 떠받들어지는 자들도 결국엔 고꾸라지는 벽이 소드마스터였다.

전력 면에서도, 소드마스터는 그래듀에이트와 비교해서도 전혀 다른 존재였다.

기사는 '준비된 마법사'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열세할 수밖에 없다는 그 당연한 전제가 뒤집히는 특이점이 바로 소드마스터였다.

소드마스터의 영향력은 한 국가에 준하거나, 때로는 그보다 더 거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소드마스터란 경지에 반드시 닿을 것이라 여겨지는 인재는, 레이를 제외하면 단 두 명이었다.

스페라 프리슬란과 요하나.

스페라 프리슬란이야 에른스트가 아끼는 증손녀로 원래 유명했다.

그리고 요하나는, 현재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스페라와 몇 달째 부대끼며 검을 나눴던 탓이 컸다.

예전부터 다른 세력들의 집중적인 관심과 관찰을 받는 스페라와 함께하다 보니 정보가 안 샐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에른스트는 프리슬란 가문이 초빙한 유명한 검술가들에게 요하나가 검술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는 등, 요하나를 숨기려고 크게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현재 황실은 요하나의 존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스페라와 요하나. 두 사람이 한 가문에 속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정치라는 게 본디 균형이 중요한 법이었다.

지나친 힘의 편중은 짧은 시간 효율을 끌어올릴 수 있겠지만, 추후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장기간 안정적으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선 적절한 힘의 균형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소드마스터가 한 가문에 속하는 것은 대국적으로 보았을 때 피하는 게 현명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요하나를 이지스의 생도로 입학시키길 원하신다."

에른스트가 과욕을 부려 요하나를 내주지 않으려 했다면 이야기가 복잡해졌겠지만.

에른스트는 제국에 충성했다.

훗날 스페라 프리슬란이 에른스트를 이어 '제국의 소드마스터'라고 불리게 되었을 때.

요하나는 '황제의 소드마스터' 혹은 '황실의 소드마스터'라고 불리게 되기를 황제는 원했다.

요하나가 이지스에 입학한다고 해서 과거의 인연이 끊어지거나 황실과 프리슬란 가문이 척을 지게 되는 건 아니었다.

프리슬란 후작가는 앞으로도 제국을 대표하고 황제에게 충성하는 가문으로 남을 것이고.

요하나는 앞으로도 필립스 백작가와 프리슬란 후작가에게 받은 것을 잊지 않고 가까운 관계를 이어갈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었지만 정치라는 건 항상 겉보기가 중요했다.

"요하나는 대외적으로 이지스에서 황실이 발굴한 인재로 포장될 것이다."

물론 황실도 요하나를 넘겨받고 입을 싹 닦을 수는 없었다.

그에 대한 대가를 빙빙 돌려서라도 하사해야만 했다.

"..."

에른스트의 설명을 들은 레이가 미간을 문질렀다.

상황 돌아가는 꼴을 보니 전생에 프로 스포츠에서 볼 수 있었던 '드래프트'나 '트레이드' 개념이 생각났다.

구단 간의 파워게임 탓에 선수 본인의 선택지가 날아가는 게 얼추 비슷했다.

물론 드래프트나 트레이드도 레이 입장에선 좋게 표현한 편이었다.

'하... 설마...?'

레이는 미간을 문지르다 말고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레이가 자신이 시한부 신세라는 걸 에른스트에게 알리기 전.

에른스트는 계속해서 레이와 스페라의 혼약을 진행시키려 했다.

첫만남 때야 불세출처럼 보이는 레이의 재능에 눈 돌아가서 그랬다고 쳐도...

그후에도 에른스트는 혼약 제안을 철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라의 말대로 황실과 정면에서 날을 세울 게 아니라면 레이를 가문 안으로 들이는 건 매우 부적절했다.

그럼에도 어째서 에른스트는 당시에 혼약을 강행하려 했는가?

요하나에게 답이 있었다.

에른스트는 레이를 데려오는 대신 요하나를 황실에 넘기고 이것저것 조건을 더 걸어 어떻게든 상황을 정리시키려 한 것이다.

레이는 에른스트가 과거에 거기까지 상황을 설계했으리라고 생각이 닿자 잠깐 머리가 띵 했다.

이런 정치적 사안에 대한 감각은 여전히 중앙 핵심 귀족들에게 레이는 상대가 안 됐다.

머리를 쓸어올린 레이가 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프리슬란 후작님께선 계획이 다 있으셨군요."

명백하게 비꼬는 소리였다.

에른스트는 헛웃음을 흘렸으나 불쾌해하지 않았다.

레이는 이리 건방을 떨 자격이 있는 자였다.

에른스트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려 보이며 말했다.

"요하나가 이지스에 입학하기 전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최소한 기본적인 예법 같은 건 익히고 들어가야 했다.

귀족들 예법이란 게 차 마시는 법부터 손수건 접는 법까지 유난을 떨어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련하시겠습니까. 레이가 그런 중얼거림을 삼키며 물었다.

"이지스 입학 시기가 언제입니까."

"입학시험까지 고려하면 늦어도 가을 이전이다."

"시험을 쳐요? 프리슬란 가문 이름으로 꽂아주는 것 아니었습니까?"

"대외적으로는, 요하나가 프리슬란 가문 사람이어선 안 된다."

"아, 그렇긴 하겠네요."

레이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검술 훈련을 진행하며 몇 달 안에 기초 예법까지 배우려면 에른스트의 말마따나 고향을 밟을 시간이 없긴 했다.

상황을 정확히 이해한 레이가 고민 끝에 답했다.

"말씀은 알겠습니다. 요하나의 의중을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에른스트의 제안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었다.

기실 출신 성분이 천한 요하나가 밟을 수 있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에른스트와 황실이 제안한 것이었다.

결국엔 요하나가 가야 할 길이었지만.

그렇다고 요하나의 의견을 완전히 묵살하고 강압적으로 밀어 넣기를 레이는 바라지 않았다.

"트레이드 비용, 아니아니, 여튼 사람 빼가신 비용은 치러주시길 바랍니다."

필립스 백작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에른스트가 충분히 고려하겠다고 답하고 말을 이었다.

"요하나가 걱정된다면 이지스에 같이 입학해서 몇 달 정도 곁에서 지켜보아도 된다."

"제가 그 애들 노는 곳을 왜 들어..."

레이는 말을 하다말고 침묵했다.

일단 이지스는 애들 노는 곳이 아니었다.

기사 학부 기준으로 입학 시 검기는 다룰 줄 알아야 했다.

10대에 엑스퍼트의 경지에 들 수 있는 천재는 극소수였고 30대는 이지스에 입학 자체가 불가능했으니 이지스 생도들은 대개 20대였다.

또한 이지스 생도들은 귀족, 혹은 출신 가문이 굉장히 좋은 젠트리 계층이 대다수였다.

그 정도 수준의 배경이 아니라면 아무리 뛰어난 천재성을 타고나도 기초를 갈고닦는 게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요하나가 처음엔 고생 좀 하겠는데.'

요하나는 대외적으론 배경 없는 평민 신분으로 입학해야 하니 괴롭힘을 당하거나 질 나쁜 무리들과 엮일 수 있었다.

그밖에 떠올릴 수 있는 문제들도 많았고 말이다.

물론 레이는 요하나가 잘 해낼 것이라 믿었고 요하나를 평생 싸고 돌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허나 그렇다고 요하나를 이지스에 홀로 던져놓고 못 본 척하기엔, 레이의 마음이 불편했다.

'몇 달 정도만 곁에서 지켜봐 주다가 요하나가 환경에 적응했다 싶으면 난 그만두면 되니까...'

레이의 생각을 표정으로부터 읽어낸 에른스트가 입을 열었다.

"고향에서 휴식을 좀 취하다가 여름이 끝나기 전에 돌아오도록 해라. 사람을 보내주겠다."

"..."

레이가 다시 뚱한 표정을 지었다.

돌고 돌아 요하나가 인질에 가까운 위치가 되어버린 건 변함이 없었다.

레이가 눈으로 욕을 하자 에른스트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

요하나를 제외하면.

요새에 머물고 있는 아이들 중 당장 이지스에 입학 가능한 실력을 지닌 아이는 데런 정도였다.

물론 실력이 좋다고 이지스에 입학이 무조건 가능한 건 아니었다.

이지스는 황실의 기관인 만큼 출신 성분을 검증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데런의 경우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고아였기에 자기 출신을 증명할 수단이 없어 본래 이지스 입학이 불가능했다.

허나 이 부분은 에른스트가 해결해주기로 했다.

레이는 요하나, 데런, 그리고 스페라를 한 자리에 불러놓고 에른스트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략적인 설명을 마친 레이가 요하나를 돌아보았다.

"요하나, 네가 이지스에 입학하길 선택하고, 또 열심히 노력한다면... 20년 뒤쯤엔 황제의 소드마스터라고 불릴 수 있을 거야. 역사에... 네 이름을 남길 수 있겠지."

"..."

"물론 마냥 쉽지는 않겠지. 제국 권력의 중추와 맞닿게 되면 검만 잘 휘두른다고 살아남을 수 없어. 정치와 정무적 감각을 잘 쌓아야 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거야. 항상 신중해야 되고."

레이는 그리 말하면서도 요하나가 잘 하리라 믿었다.

레이가 아는 요하나는 결코 멍청한 아이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황제가 밀어준다면 웬만한 위기는 수월히 헤쳐나갈 수 있을 터였다.

"요하나, 그래도 꾸준히 노력한다면... 높은 작위도 수여받고 네 가문도 세울 수 있을 거야. 스페라 님과 함께 시대를 풍미한 두 여기사 중 한 명으로 기록되어 전해지겠지."

요하나와 스페라의 미래를 그려본 레이가 웃음을 머금었다.

"한 200년 뒤 태어난 아이들은 요하나와 스페라 님 중 누가 더 강했을까 같은 걸 따지면서 싸우지 않을까?"

"..."

요하나는 레이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이제는 요하나도, 자신의 운명이 평범하기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빤히 알고 있음에도 어린 아이처럼 레이에게 몇 번이나 징징거리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요하나는 물었다.

"그럼 레이는...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는 거야?"

레이는 잠깐 굳었다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불현듯, 어린 시절 마주쳤던 한 남자가 내뱉었던 말이 생각났다.

꼬맹아, 훗날 쓰여질 네 서사시에 반드시 한 줄 적어놓도록 해. 바로 이 미르테르 가의 댄에게, 아직 꽃 피지도 못했던 어린 영웅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남자는 그리 말했었다.

레이가 이제는 추억이 된 그날의 기억을 곱씹어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내가 워낙 잘나서."

자신만만한 레이의 태도에 요하나가 입을 삐죽이다 마침내 답했다.

"이지스에 입학할게. 거기서 열심히 해보도록 할게."

"잘 생각했어. 입학하고 처음 몇 달은 내가 같이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굳이? 너 없어도 상관없는데?"

요하나는 새침하게 되물으면서도 은근히 상기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익숙치 않은 장소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굉장히 의지되는 일이었다.

레이가 요하나에게 웃어준 후 데런에게 고개를 돌렸다.

"넌 어쩔래?"

"해보겠습니다, 형님."

"그래,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지. 이런 기회가 두 번은 찾아오지 않을 거야. 각오를 다지고, 놓치지 않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명심해. 네가 그 기회를 얻기까지 누구에게 은혜를 입었는지... 잊지 마."

"예, 형님. 명심할게요."

레이는 필립스 백작가와 에른스트 후작에 대한 은혜를 말하고 있었다.

데런 또한 그를 모르진 않았지만, 데런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가장 많은 은혜를 입은 상대는 바로 레이였다.

레이는 스페라와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눈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요하나, 데런. 준비 잘하고 있어."

레이는 요하나와 데런과 돌아가면서 한 번씩 포옹했다.

몇 달 뒤에 다시 볼 예정이긴 했지만, 헤어짐이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다.

레이 품에 안긴 요하나가 잠시 망설이다 레이의 등을 감은 팔에 힘을 꽉 주었다.

레이는 허리가 아프다며 엄살을 떨어볼까 하다가 요하나의 표정을 보고 그냥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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