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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09화 (209/446)

209화

햇살이 따스해져 가는 오후.

레이가 알레시아의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

레이는 주기적으로 지금처럼 알레시아와 단둘이서 담화를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흐뭇하게 다과를 입에 넣는 알레시아를 바라보다 레이가 입을 열었다.

"알레시아 님."

"음!"

"슬슬 백작령으로 돌아가 볼까 하는데요."

"필립스 백작령으로 말이냐?"

"네, 제 사정 때문에 알레시아 님도 여기에 너무 오래 묶여 계셨잖아요?"

"근데 돌아가도 되는 것이냐?"

지금처럼 혼란한 때에 공간검의 계승자가 감시하기 힘든 변방으로 떠나는 게 에른스트나 황제에게 달가울 리 없었다.

누가 설명해주진 않았지만 알레시아도 그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레이가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뭐어... 높으신 분들 요청 때문에 백작령에 돌아갔다가 한두 달 만에 다시 움직이어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백작령에 얼굴은 비출 생각이에요. 그 정도 요청은 들어주겠죠."

"음..."

알레시아가 약간 음울한 기색을 내비쳤다.

레이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알레시아의 반응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가는 건데, 알레시아 님은 내키지 않으세요?"

"으음... 그러니까..."

알레시아가 입에 넣었던 다과를 우물우물 씹어 삼키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곳에는 백작령에선 구경하기 힘든 귀하고 값비싼 다과와 찻잎이 많도다!"

진짜 엄청나게 값비싼 물건을 제외하면 알레시아는 먹을거리를 달라는 대로 얻어먹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요새 안의 손님용 잠자리도 훌륭했고, 화려하고 예쁜 드레스도 빌려서 입어볼 수 있었다.

알레시아는 이미 물질적인 풍요에 한껏 찌들어 있었다. 고향 생각이 별로 안 날 만큼 말이다.

"으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레이가 돌아간다면 나도 같이 돌아갈 것이니라.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아..."

필립스 백작이 들었다면 엉엉 울었을 소리를 알레시아는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았다.

레이가 '우리 아가씨는 언제 철이 들까' 따위의 감정이 깃든 눈빛으로 쳐다보자 알레시아는 뒤늦게 자기 발언을 수습했다.

"농담이니라! 나도 고향이 그립구나!"

"..."

자리에서 일어선 레이가 알레시아의 옆으로 다가갔다.

알레시아가 눈을 깜박이는 찰나 레이가 뱃살이 있는 알레시아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푹 찔렀다.

손가락이 썩 부드럽게 살을 파고들었다.

알레시아가 기겁하며 레이를 와다다 때리자 레이가 낄낄거리며 감탄했다.

"그래도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요? 예전보다 손가락이 덜 들어가네요?"

"음! 요즘 검술을 연습하는 시간을 늘렸느니라!"

"지금처럼만 하세요. 건강도 미리미리 챙겨놔야 나중에 고생을 안 하죠."

"옳은 말이지만, 노인들이 할 것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레이가 피식 웃고는 알레시아가 입에 넣으려던 다과를 뺏어 들었다.

"일단 아가씨의 의중은 알겠습니다."

*

에른스트가 요새를 찾아왔다.

에른스트는 간단히 가문 사람들의 인사를 받은 뒤 레이를 집무실로 불렀다.

미리 부름을 예상하고 있던 레이는 차림을 정갈히 하고 에른스트와의 독대를 위해 집무실을 찾았다.

에른스트는 레이가 집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절대권역을 펼쳤다.

일대의 마나가 모두 그의 통제 아래 들어왔다.

이곳에서의 대화를 다른 사람이 절대 듣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절대권역 아래서, 레이는 얼굴에 서렸던 긴장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에른스트의 맞은 편에 앉았다.

"알리모에서 발생한 사태가 잘 수습되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답해주겠다. 넌 그걸 들을 자격이 있으니."

에른스트는 꽤 상세히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제국은 한동안 알리모 왕국에서 군사 작전을 펼쳤으며, 아직까지 진행 중이었다.

알리모의 고위층들은 제국의 독단적인 군사 작전에 항의를 표했다.

그들이 특히 크게 항의한 것은 메테오의 충돌에 관한 사안이었다.

상식적으로, 적이 구현한 메테오의 궤적을 뒤틀어 타격점을 변경하는 것보다 마법의 발현 자체를 붕괴시키는 게 난도가 훨씬 낮았다.

그럼에도 제국은 메테오의 궤적을 뒤틀어 적의 수뇌부를 역으로 타격했다.

작전이 성공해 적의 수뇌부를 섬멸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그 여파로 알리모 왕국은 큰 피해를 입었다.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은 알리모의 고위층들은 메테오가 떨어진 경위를 듣고 입에 거품을 물며 발작했다.

알리모의 고위층들이 당장 피해를 보상하라고 주장하자 제국은 짧게 답변했다.

뒤지기 싫으면 아가리 여물어라.

애초에 알리모의 국왕부터가 제국에 파천했다가 반강제로 발이 묶였는데 알리모 왕국의 발언권이 강할 수가 없었다.

제국은 레이, 루나, 울트, 그리고 은십자 기사단들의 증언을 확보했고 그 증언을 뒷받침하고 신빙성을 높여줄 여러 물증 또한 황무지가 된 금지된 숲에서 확보했다.

물론 제국이 장기간의 군사 작전을 통해 지하도시를 모조리 파헤쳐서 증거를 수집했다면 악마 숭배자가 메테오를 준비했다는 레이와 루나의 증언에 의혹을 가졌을 것이다.

허나 금지된 숲에선 장기간의 군사 작전이 불가능했다.

그곳이 이제 숲이 아닌 황무지라 해도 오염되고 타락한 땅임은 여전했다.

마경 밖에서 로드 급 전력을 발할 수 있는 악마 숭배자는 기껏해야 완전히 개화한 사도 중에서도 극소수만 가능했으나, 역으로 마경 안에서라면 어마어마한 전력을 발할 수 있는 악마숭배자들이 많았다.

금지된 숲은 마경에 가까운 장소였고, 그 불리한 장소에선 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장기간 군사 작전은 불가능했다.

덕분에 레이와 루나의 진술은 크게 의심받지 않을 수 있었다.

제국은 사건 조사 결과를 토대로, 금지된 숲의 악마숭배자들과 암암리에 거래를 이어갔던 모든 집단들에게 징벌금을 부여했다.

징벌금을 못 내겠다고 개긴다? 정말로 개박살이 났다.

제국이 징벌금을 부여한 집단 중엔 제국 아래 속해 있는 세력들도 많았지만 얄짤 없이 지출해야 했다.

사실 금지된 숲과 엮여 있는 세력이 너무 많아서 징벌금 선에서 그친 것이었다.

"...금지된 숲에서 군사 작전 중 붕괴된 지하도시들 아래에서 이용 가능한 드래곤하트 조각이 몇 개 발견되었다."

"아, 그렇습니까?"

제국이 보낸 파견대도 그거 파내느라 정신없었겠군.

레이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고 있는데 에른스트가 말을 덧붙였다.

"황제 폐하께서 그중 일부를 사용해 아티펙트를 제작하거나 개조해 네게 하사할 것이라고 약조하셨다."

"어..."

레이가 어찌 반응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의 은덕에 감사드리나 그걸 제가 받아도 될지..."

"굳이 겸양 떨 것 없다. 네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을 뿐이니. 가디 자작의 경우 곧 풀려날 테지만, 한동안은 경거망동을 삼가라고 전해라."

에른스트가 정식 절차를 밟아 알리모로 파견한 레이와 달리.

울트는 황제가 내린 영지를 방치하고 밀입국을 해 남의 국가 유물을 털거나 용병질까지 하고 다녔다.

세운 공적이 있다 해도 에른스트가 비호해주지 않았다면 처벌을 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에른스트는 대략적인 정세를 설명해준 후 본제를 꺼냈다.

"혹시 네가 세운 공적의 보상으로 황가의 드래곤 하트를 요구할 생각이라면..."

"..."

"일단 기다려라. 내가 황제 폐하께 직접 말씀드려 보겠다."

황가의 드래곤하트를 달라고 잘못 입을 놀렸다간 반역 혐의를 뒤집어쓸 수 있었다.

에른스트의 경고에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네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반드시 황가의 드래곤 하트가 필요하느냐?"

"드래곤 하트마다 그 근원적인 성질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리실로테 님이 연구하시던 게 황가의 드래곤하트이니, 황가의 드래곤하트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레이는 아쉬운 감정이 담긴 표정으로 덧붙였다.

"다음에 리실로테 님이 남긴 이론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직은 거짓 이론을 창작 중이라 불쑥 내밀 수가 없었다.

에른스트는 의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이를 바라보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세운 공적에 대해 어찌 보상할지 폐하께서도 고심 중이시다."

작위, 영토, 훈장, 재물. 논하자면 끝이 없다.

레이가 담담하게 답했다.

"일단 고향에 좀 들르고 싶습니다. 제 사람들이 다 거기 있거든요. 얼굴은 보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진정 야망 있는 자들은 10년, 20년 쯤은 고향 따위는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뛰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허나 레이는 그런 성격도 아니었고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에른스트의 표정이 좀 더 굳어졌다.

"알겠다. 그밖에 원하는 것이 있느냐."

"대외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네가 세운 공적의 절반만 있어도 역사서에 이름이 새겨져 수백 년 동안 회자될 거다. 그런데 이름을 알리고 싶지 않아?"

"공간검을 계승해서 신화적인 업적을 이룬 영웅이 5년도 못 가서 비명횡사하면 황제 폐하께서도 곤란하시지 않겠습니까?"

뒷말이 분명 나올 거다.

음모론도 많이 떠돌 테고, 힘겨운 시기를 이겨내야 하는 제국군의 사기에 그리 도움이 되지도 않을 터다.

레이의 주장이 그릇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도 굳이 존재를 감출 필요는 없었다.

"거기까지 배려할 필요는 없다. 또한 네가 일찍 죽더라도 네가 받은 것을 네가 원하는 후계에게 물려주면 되는 노릇이다."

"그리되면 제 작위와 재물을 물려받은 후계는 과한 관심과 견제에 시달리게 되겠지요. 원치 않습니다."

받은 땅과 재물을 사후 필립스 백작과 알레시아에게 대부분 넘긴다?

레이가 생각하기에 그건 너무 과분한 짐덩이를 넘기는 꼴이었다.

필립스 백작이 어찌저찌 잘 해내서 중앙 정치계의 거물로 자리 잡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권력 투쟁이 필립스 백작과 알레시아의 성향에 어울리는 짓은 아니었다.

에른스트가 다시 물었다.

"그럼 무엇을 원하느냐?"

레이는 생각을 다시 한번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제가 어릴 적에 큰 은혜를 입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변방 작은 땅덩어리라도 상관없으니, 계승 가능한 작위와 영지를 수여해주십시오."

"어렵지 않다."

"필립스 백작가엔 발판을 마련해 주십시오. 변방에서 세력을 키우든, 중앙 정치계로 진출하든,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발판을 마련해 주십시오."

"그 또한 어렵지 않다."

"600년 전 영락한 영웅, 레시나의 저주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제국이 협조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건 확답할 수 없으나, 노력해보마."

"세상을 위해 희생했고 인간을 사랑했으며 영웅이라 불릴 만큼 강대했던 엘프입니다. 뭐... 엘프들의 자세한 사정은 알아봐야겠지만, 그녀를 구하고 은혜를 입힐 수 있다면 제국에도 이익이 될 겁니다."

"...원하는 것이 더 없느냐?"

"글쎄요, 뭐 자잘한 건 더 있습니다만..."

레이가 피식 웃었다.

"일일이 조잘조잘 떠들기보단 후작님께서 말씀하신 '신의'를 믿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의미가 함축된 문장이었다.

약간 왜곡을 담아 해석하면 '눈치껏 잘해줘라.' 정도의 뜻이었다.

건방을 떤다고 여길 수도 있었지만, 레이의 공적을 고려하면 어지간히 시건방을 떨어도 눈을 감아줄 만했다.

에른스트는 착잡한 감정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네가 황제 폐하를 알현한 후 고향에 다녀올 수 있도록 조치해주마. 워프게이트를 활용할 수 있을 거다. 다만, 요하나는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

눈을 깜박인 레이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혹시 요하나를 인질 잡으십니까?"

굉장히 노골적이고 무례한 질문에 에른스트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그리 오해할 소지가 충분하다고 나 또한 생각한다만, 다른 이유가 있다."

협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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