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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08화 (208/446)

208화

"야!!!!!"

요하나의 샤우팅과 함께 레이가 냅다 도망가기 시작했다.

악에 박쳐 레이를 뒤쫓는 요하나를 보며 데런이 이마를 짚었다.

데런에게 있어 요하나는 평소엔 참 믿음직한 누님이었는데 레이만 엮이면 저리 상태가 안 좋아졌다.

레이와 요하나 둘 다 데런에겐 우상과 같은 존재였기에 둘이 저러고 노는 꼴이 참 보기 힘들었다.

"으악!!"

얼마 못 가 따라잡힌 레이가 요하나와 함께 훈련장을 우당탕탕 굴렀다.

그 과정에서 레이는 결국 요하나의 사타구니와 다시 한 번 안면을 맞대게 됐다.

요하나는 자기가 먼저 치대놓고는 도리어 깜짝 놀라 꺅 비명을 질렀다.

레이는 요하나 밑에서 포복자세로 기어나오더니 힘이 다 빠진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댔다.

"냄새 안 나, 냄새 안 나."

체력이 후달렸던 레이가 숨을 헥헥 몰아쉬며 손을 저었다.

요하나는 그리 추한 행태를 보이고도 꿉꿉이란 오명을 벗어난 게 기뻤던지 뿌듯하게 웃었다.

데런은, '그래도 좀 짜다' 따위의 사족을 덧붙이려는 레이의 입을 황급히 막았다.

데런은 평화가 좋았다.

*

시간이 좀 더 흘러.

몸을 거의 다 회복한 레이가 훈련장에 들렀다.

훈련장에서 홀로 몸을 풀어본 레이가 검을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무구는 좀 좋은 걸로 다시 맞춰달라고 요구 드려야겠어."

알리모에서 전투를 벌였을 때 무구 덕을 참 많이 봤다.

모로스 하나만 덜렁 들었을 때보단 더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다 갈려나간 몸뚱이 좀 아끼려면 좋은 무구가 필수적이었다.

관리보관이라든가 신경 쓸건 많았지만 일단 챙겨 놓고 고민할 문제였다.

레이는 적당히 몸을 데우고 훈련장 구석에 앉았다.

"아프텔."

[예, 마스터.]

"상의할 게 있는데..."

레이는 드래곤하트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레이가 에른스트에게 드래곤하트에 대해 거짓말을 했을 때 아프텔 또한 같이 있었기에 굳이 긴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내 거짓말을 납득시킬 수 있는... 그럴 듯한 이론이 필요해."

레이가 요구하는 건 '황실이 보유한 드래곤하트의 조각으로 일반인의 심장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을 담은 이론이었다.

물론 실제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기에 적당히 그럴 듯하기만 하면 괜찮았다.

황실이 이론을 검증하겠다고 얼마 없는 드래곤하트의 조각을 소모할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심장 강화를 성공하든 실패하든 드래곤하트는 소실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이론을..."

레이가 여러 조건을 덧붙이자 아프텔이 제지했다.

[드래곤하트는 가장 중요한 전략물자로 분류되는 만큼, 반출한다 해도 집중적인 감시 아래 사용 가능할 확률이 높습니다.]

"아... 뭐, 어떻게 안 되겠어?"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어떤 준비를 갖추고 얼마나 그럴듯하게 입을 놀려야 의심받지 않고 황실을 속일 수 있을까, 레이로서는 당장은 완벽한 해답을 낼 수 없었다.

고민하는 레이를 향해 아프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조건은 확인했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창조적인 활동은 한계가 있습니다. 마스터께서 원하시는 수준까지 가짜 이론의 완성도를 높이려면 루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알았어. 루나랑 협력해서 진행해줘."

루나 또한 레아의 출신과 드래곤하트에 관해선 알고 있었다.

레이의 수명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만 숨긴 채 가짜 이론의 창작을 부탁하면 될 일이었다.

레이는 혹시나 해서 아프텔에게 당부했다.

"그... 눈치껏. 괜히 루나가 오해하지 않게."

레이가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드리자 아프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오벨리스크 시스템의 최고 관리자는 루나였지만 아프텔의 최고 명령권자는 레이였다.

레이가 명령한 이상 아프텔이 레이가 시한부 신세라는 것은 남들에게 노출할 수는 없었다.

"음..."

레이가 괜히 자기 콧잔등을 꾹꾹 누르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카렌이었다.

카렌은 훈련장 안에서 레이를 발견하고는 배시시 웃으며 다가왔다.

하나로 모아 묶어 내린 붉은 머리카락이 카렌의 발걸음을 따라 찰랑찰랑 흔들렸다.

레이가 벽에 걸어놓았던 겉옷을 바닥에 깔아주자 카렌은 굳이 사양하지 않고 그 위에 앉았다.

그후 두런두런 대화가 이어졌다.

레이는 카렌이 알면 위험할 수 있는 정보만 배제한 채 알리모에서 있었던 일을 천천히 이야기해주었다.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사실 카렌은 레이가 해주는 여정 이야기가 썩 즐겁지만은 않았다.

범인은 도저히 이루지 못할 업적을 쌓아가는 레이의 여정을 듣다보면 레이가 완전히 다른 곳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져 답답한 마음이 들고는 했다.

그래도 웃음을 머금은 채 레이의 이야기를 듣던 카렌이 숨겼던 사실을 슬그머니 고백했다.

"나, 레이가 없는 동안 성직자님들께 신학을 잠시 수학했어."

"어... 정말?"

레이는 약간 떨떠름한 얼굴을 했지만 카렌을 타박하진 않았다.

교단이 안고 있는 문제야 몇 가지 있었지만 성직자들은 대개 좋은 사람들이었다.

카렌은 레이의 눈치를 보다 양손을 마주보게 펼쳤다.

이내 미약하지만 따스한 기운을 지닌 백색 빛무리가 양손 사이에서 떠올랐다.

"오..."

레이는 작게 감탄했다.

신성력이라는 건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던 마나가 축복에 의해 변질된 것이다.

성직자는 기도와 수행 같은 행위를 통해 엘-람의 축복을 내려받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얻어낸 신성력은 그 특징에 있어 개인마다 편차가 좀 컸다.

예컨대 단단한 의지가 신성력에 영향을 끼친 경우.

성직자는 정제된 신성력을 활용해 기사와 비슷한 검기를 구현할 수 있게 되며 성기사라고 칭해지고는 했다.

카렌의 신성력은 날카롭거나 단단하진 않았지만 따스했다.

카렌이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빛을 허공에 띄워 보이며 미소 지었다.

"짧은 시간만에 이만한 신성력을 얻기는 힘든 일이라고, 성직자님들께 재능이 있다고 칭찬받았어. 정식으로 귀의하는 것은 어떻겠냐는 제의도 받아봤고..."

카렌은 말을 하다 말고 괜히 쑥스러워져서 입을 우물거렸다.

물론 카렌이 성직에 재능이 있는 편이긴 했지만 엄청난 천재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다재다능하지만 어딘가 대단히 뛰어나지 못하다는 건 결국 바뀌지 않았다.

카렌은 시무룩해하다가 억지로 기운을 차리고 레이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래도... 이제 레이가 다치면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뻐."

카렌의 손가락이, 예전에 흉터가 있었던 레이의 콧잔등 주변을 훑었다.

레이는 가느다란 손가락의 감촉을 느끼다 천천히 카렌과 거리를 좁혔다.

서로의 입술이 맞닿는다.

카렌은 달뜬 숨을 내뱉다가 레이의 위로 올라타서 몸을 밀착시켰다.

레이는 이곳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훈련장이라는 걸 알았지만 장소를 옮기지 않았다.

괜히 장소를 바꿨다가 그대로 일선을 넘게 될까, 그게 조금 두려웠다.

레이와 카렌은 그 자리에서 꽤 오랜 시간 혀를 섞었다.

*

레이와 카렌이 혀를 섞기 시작했을 때쯤.

알레시아는 식탁에 홀로 앉아 차를 홀짝이며 아쉽다는 표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차와 다과를 함께 곁들이면 그리 즐거울 수가 없을 테지만, 살을 빼야 했기 때문에 다과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놈의 살 때문에 알레시아는 요즘 훈련장에도 자주 찾아가 검을 휘두르곤 했다.

사실 알레시아가 살이 굉장히 쪄서 몸매가 망가지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허나 탄탄한 스페라에 비해 몸에 지방 덩어리가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저번에 스페라에게 들었던 언어 폭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알레시아는 체형을 가꾸는데 나름 열심이었다.

스페라보다 단단한 엉덩이를 만들고 말 것이다.

그리 되뇌며 차를 홀짝이던 알레시아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의 육감, '알레시아 센서'가 마구 경고를 울리고 있었다.

"나의 기사가 또 불륜을 저지르려 하는구나!"

알레시아는 자기의 육감을 믿어 의심치 않고 곧장 '알레시아 센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헌데 쪼르르 달려가던 알레시아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루나였다.

알레시아는 당연히 루나를 피하기 위해 몸을 틀었지만 루나도 같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알레시아가 이리저리 방향을 꺾을 때마다 루나도 좌우로 움직여 길을 막았다.

다급해진 알레시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비, 비키거라!"

"..."

잠시 고민한 루나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루나의 항명에 충격을 받은 알레시아가 헉 소리를 내며 한발 물러서더니 이내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

"흠, 비키지 않으면 힘으로라도 뚫고 지나갈 것이니라!"

후우욱!

알레시아의 뒤에 바람 정령이 소환됐다.

그 모습을 보고 루나가 눈썹을 살짝 실룩이더니 마찬가지로 바람 정령을 소환했다.

알레시아의 정령보다 더 크고 더 강대한 바람 정령이 우수수 실체화됐다.

뒤를 돌아본 알레시아가 쫄아있는 자기 정령들을 확인하더니, 이내 울분에 차서 소리쳤다.

"왜 다들 나만 괴롭히느냐아!!"

꽥꽥 거리는 알레시아를 루나가 식당으로 데려가 차를 우려서 나눠주며 달랬다.

꽤 비싼 찻잎이었기에 알레시아도 일단은 만족하며 차를 홀짝였다.

*

시간이 더 흘러 봄 날씨가 찾아왔다.

레이는 프리슬란 가문 요새의 성벽 근처에서 필립스 백작이 보낸 편지를 확인했다.

내용 자체는 별거 없었다.

백작 나름의 고마움과 안부 인사가 담긴 내용이었다.

이제는 잘 걸을 수 있게 된 젠킨슨이 레이 곁에 서서 물었다.

"네가 작위를 수여받게 되면, 한동안은 백작령으로 귀환하기 힘들어질 거다."

"떼를 써서라도 다녀올 겁니다. 이 고생을 하는 이유가 뭔데요. 그리고 작위는... 잘 모르겠네요."

작위를 받는 등 대놓고 공적과 존재가 들어나 봤자 행동에 제약만 생겼다.

레이는 본인의 작위와 명예 따위엔 정말 조금도 관심이 없었기에 작위를 보상으로 받을 바엔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싶었다.

황제도 레이가 이름을 알리는 것이 마냥 편할 리는 없을 테니 잘만 조율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레이는 땅 위의 자갈을 툭툭 차다가 이내 두 손으로 자갈밭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젠킨슨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지금 뭐하는 거냐?"

"예쁜 돌멩이가 있나 찾아보고 있어요."

"돌멩이는 왜?"

"방금 생각났는데, 레아랑 약속했거든요. 여행 갔다 돌아오는 길에 선물을 꼭 챙겨오기로. 까먹기 전에 미리 챙겨둬야죠."

"..."

젠킨슨은 잠시 레이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 혹시나 해서 되물었다.

"거기 있는 돌멩이를 레아에게 선물이랍시고 가져다주겠다고?"

"어허, 마스터. 그냥 돌멩이 말고 '예쁜' 돌멩이요."

미친 새끼.

속으로 욕설을 삼킨 젠킨슨이 종자를 설득했다.

"그러지 말고 예쁜 인형이나 필기구를 하나 사서 선물하는 게 어떻겠냐?"

"...굳이?"

젠킨슨은 자꾸만 올라가는 주먹을 애써 내리며 레이를 거듭 설득했다.

레이는 세상 귀찮은 얼굴로 일단 알겠다고 답했다.

젠킨슨은 올라오는 짜증을 억누르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작위 말고 황제 폐하께 청하고 싶은 보상이라도 있는 거냐?"

"몇 개 있네요."

드래곤하트에 관한 것은 일단 제쳐놓더라도.

일이 이렇게 된 김에 황제에게 공적의 보상으로 얹어달라고 요구할 게 몇 개 더 있긴 했다.

"어... 옛날에 공수표를 뿌려놓은 게 있어요."

"...공수표?"

"네."

비록 소드마스터는 되지 못한다고 해도.

"투자금 넣어놓은 건 회수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죠."

툭!

레이가 본래 레아에게 선물이랍시고 주려고 했던 예쁜 자갈을 내려놓으며 허리를 폈다.

레이의 말을 이해 못 한 젠킨슨이 다시 질문하려 하는데 스페라가 저 멀리서 다가왔다.

"레이, 여기 있었군요."

"아, 스페라 님. 무슨 일이십니까?"

"전해줄 소식이 있어서요. 증조부님께서 곧 요새를 방문한다고 하시네요."

"아... 그렇습니까?"

알리모 왕국 쪽 일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는 뜻이었다.

담판을 지을 때가 왔음을 느낀 레이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협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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