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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07화 (207/446)

207화

"..."

레이의 눈동자가 루나의 눈치를 보느라 빙글빙글 돌았다.

한참을 눈치를 보던 레이가 어렵사리 루나에게 입을 열었다.

"저... 루나야."

"왜."

"강령술 계열의 마법은 금기인데 그냥 다른 연구하면 안 되겠니?"

"군소리 말고 식사나 차려."

차가운 루나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 떤 레이가 고민 끝에 용기를 내서 루나를 설득하려 했다.

"그, 그래도 이러다가 또 제국 추격대한테 들키면..."

"아이, 씻팔."

쾅- 책상을 내려친 루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메테오 맛 좀 볼래?"

레이가 겁 먹은 얼굴로 뒷걸음질치자 루나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레이에게 경고했다.

"이렇게 자꾸 기어오르면 네 집은 아공간이 되는 거야. 처신 잘하라고."

"윽, 으윽...! 아, 안 돼...!"

"..."

악몽을 꾸던 레이를 지켜보던 루나가 결국 보다 못해 레이의 뺨을 찰싹찰싹 쳤다.

레이가 헉 소리를 내며 꿈에서 깼다.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 내부에 마련된 손님방 안에서.

잠이 완전히 깬 레이는 평소와 같이 잔잔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나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뭐 이런 이상한 꿈을..."

우리 루나가 얼마나 착한데 그럴 리가 없지. 아이 씻팔이 뭐냐 아이 씻팔이.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린 레이가 다시 루나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은색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자니 절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루나, 아직도 네 방으로 안 돌아가고 여기 있었어? 그만 가서 쉬어. 너도 많이 무리했잖아."

루나는 잠시 침묵하다 조금은 뜬금없어 보이는 질문을 던졌다.

"...레이가 해야 하는 일, 다 끝났어요?"

레이가 무리해가며 움직이어야 할 만큼 중요한 일들이 다 마무리 됐냐는 의미였다.

이제 그만 다치는 일 없이 마음 편하게 일상을 구가할 수 있냐는 물음이었다.

레이가 잠시 고민하다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우리 가디 자작님 소원 들어주려면 한 번은 더 고생해야 하지 않을까?"

찰싹!

"아야."

레이의 뺨을 한 번 더 찰싹 때린 루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쉴게요."

레이의 말마따나 루나도 휴식을 좀 취해야 했다.

아무리 루나라 해도 오버히트된 서클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레이는 방문을 나서는 루나에게 손을 흔들어준 후 다시 머리를 베개에 파묻었다.

루나가 가볍게 치고 간 뺨을 매만지던 레이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티티 쪽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해결하고... 그 뒤로는 제국 정세 좀 지켜보면서 애들 뒤치다꺼리만 조금 하면 되려나.'

레이는, 그 정도만 해도 정말 할 만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밖에 또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는가.

"...하나 더 있네."

드래곤 하트 조각의 확보.

그것도 황족이 사용 가능한 황실에서 전해 내려오는 물건이 필요했다.

'에른스트에게 입을 좀 잘못 턴 거 같기도 하고...'

워프게이트 사건 직후 에른스트에게 입을 놀릴 때는 충분히 고민할 여유가 없었던 탓에 '황실의 드래곤 하트가 있어야 레이 본인의 수명을 조금이나마 늘릴 수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허나 레이의 수명이 늘어난다는 게 황제에게 그렇게 매력적인 선택은 아닐 터다.

약간 더 신중해야 했다고 레이는 아쉬워하면서도 지금까지 세운 공로를 감안하면 작은 조각 하나쯤은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했다.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선 고민을 좀 더 해 보고...'

사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드래곤하트를 구해다준다고 해도 레아가 평생 출신 성분을 안 들키고 잘 지낼 수 있을까 불안하긴 했다.

그래도 앞으로 20년 정도만 지나면 루나나 요하나를 비롯한 아이들이 나름의 일가를 이루어 힘과 권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라면 벨라와 레아를 믿고 맡길 수 있으리라고 되뇐 레이가 다시 눈을 감았다.

아직 해가 뜰 때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는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부터 스페라는 땀에 푹 젖은 훈련복을 갈아입으며 호흡을 정돈했다.

"후우..."

메테오가 떨어진 탓에 세상이 혼란스러웠지만 스페라에겐 크게 와 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스페라는 여전히 검술 단련과 귀족으로서 배워야 할 것을 학습하는데 대부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처럼 세상이 혼란스럽든 말든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데 오롯이 집중 가능한 환경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 가진 자의 특권이었다.

스페라는 조금 전 요하나와의 대련을 복기했다.

결과는 아슬아슬하게 무승부.

승부를 이어가는 동안 요하나가 전반적으로 우세를 점했던 것은 부정 못할 사실이었다.

요하나의 검은 굉장히 자유롭고 변칙적이며, 또한 정교했다.

무거운 대검으로 요하나의 검술에 대항하기엔 그다지 상성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스페라가 요하나를 밀어붙이기 위해선 일격일격에 극도의 정교함을 담아내야만 했다.

스페라가 열심히 대련을 복기하며 복도를 걸어가다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알레시아와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로구나!"

알레시아가 인사를 하며 스페라를 향해 히죽 웃었다.

그 웃음으로부터 느껴지는 묘한 불쾌함에 스페라는 불쑥 아니꼬움이 올라왔다.

잠시 고민하던 스페라가 물었다.

"알레시아 님, 차 한잔하실래요?"

"오, 그러도록 하자꾸나!"

스페라와 함께 차를 마시면 시종이 굉장히 값비싼 찻잎을 활용해 차를 우려내주었다.

그렇기에 알레시아는 희희낙락하며 스페라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이내 스페라는 차와 다과를 앞에 두고 맞은 편에 앉은 알레시아를 넌지시 바라봤다.

알레시아는 보기보다는 이런 자리에서 예법을 꽤나 충실히 지켰다. 형식이 조금 낡긴 했지만 말이다.

스페라와 눈이 마주친 알레시아가 차를 마시다 말고 또다시 히죽였다.

간을 보던 스페라가 결국 참지 못하고 대놓고 물었다.

"알레시아 님,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알레시아가 눈치를 보다 답했다.

"아니... 뭐어... 아쉽게 되었구나 싶어서어...."

"아쉽게 돼요?"

"레이와 혼약을 맺지 못하게 되어 스페라도 많이 아쉽겠구나 싶어서어..."

그리 말하는 알레시아의 입꼬리가 웃음을 참기 위해 잘게 떨렸다.

결국 스페라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혼약에 관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깊은 관계를 이어갈 수 있으니까요."

"푸흡...!"

차를 마시다 사레에 들린 알레시아가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혼약은 힘들겠지만, 남녀 간에 정을 통하는 것까지는 누가 간섭할 수 있겠어요."

"어, 어찌 그런 문란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알레시아가 경악했으나 스페라는 덤덤했다.

귀족들, 특히 중앙 귀족들에겐 혼약은 가문 간에 계약에 가까웠다.

배우자가 지나치게 문란한 건 분명 문제가 되겠지만, 그와 별개로 상호 간의 합의 아래 서로 정인을 두는 경우는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스페라가 머금고 있던 찻물을 삼키고는 은은한 웃음을 내비쳤다.

"같이 검을 나누다 보면 마음도 통할 수 있는 법 아니겠어요?"

"아, 아니 된다! 첩이라면 모를까, 정인은 내가 허락하지 못한다! 나는 정인을 둘 생각이 없단 말이다. 레이 한 명이면 충분하도다!"

"과연 레이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

충격을 받아 입을 쩍 벌리는 알레시아를 향해 스페라가 말을 이었다.

"레이가 알레시아 님과 혼약을 맺는다 해도... 알레시아 님의 그 지방만 가득 낀 몸으로 소드마스터의 체력을 감당하실 수 있을까요?"

"지, 지방만 가득 끼지 않았느니라!"

"실례. '대체로 지방의 비율이 높은 안타까운 몸'으로 소드마스터의 체력을 밤에 견디시겠어요?"

연거푸 언어폭력에 노출된 알레시아가 반쯤 혼이 나간 채 의자에 앉아 비틀거렸다.

그런 알레시아를 향해 스페라가 쐐기를 박았다.

"남편에게 사랑 받으시려면 노력을 많이 하셔야겠어요."

차를 다 마시고 컵을 내려놓은 스페라가 따뜻한 웃음을 유지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먼저 일어나볼게요. 알레시아 님은 천천히 차와 다과를 즐기시고 일어나셔요."

"..."

괜히 먼저 시비를 걸었다가 영혼까지 털린 알레시아가 흐물흐물하게 변해 탁자 위에 이마를 콩 박았다.

*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에서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해 체력을 좀 회복한 레이가 훈련장으로 나갔다.

훈련장엔 요하나와 데런을 비롯해 필립스 백작령 출신의 아이들이 모여 검을 나누고 있었는데, 레이는 일단 구석에 앉아 가만히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몇 달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들이 검을 다루는 실력이 전체적으로 많이 향상되어 있었다.

특히 엑스퍼트의 경지에 진입한 지 얼마 안 된 데런은 한동안 검에 미쳐 살았는지 짧은 시간 무척이나 많은 발전을 이룬 것처럼 보였다.

허나 그렇다 해도 요하나에겐 전혀 상대가 안 됐다.

퍼억!!

"아으...!"

요하나와 대련을 하다 뒤로 튕겨져나가 땅을 구른 데런이 크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재능의 격차라는 게 본래 이런 법이었다.

레이가 데런의 등을 두드려주고는 검을 두 자루 뽑았다.

요하나가 숨을 고른 후 레이를 향해 먼저 돌진했다.

카가각!!!

검이 맞부딪친다.

요하나는 최선을 다해 검기를 불어넣은 검을 휘둘렀다.

허나 레이는 발을 디디고 있던 자리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수월하게 요하나의 공격을 받아냈다.

레이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5년... 아니, 10년은 걸리려나. 그래도 나 죽을 때까지는 요하나에게 안 따라잡히고 버틸 수 있겠네.'

레이의 머릿속엔 하르시아가 창조한 검술이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그렇기에 레이는 경지가 상승함에 따라 검술이 발전하는 게 아니라, 완성에 가까운 검술이 경지를 잡아 끌어올려 주는 상태에 가까웠다.

물론 이것도 레이가 타고난 재능이 받쳐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요하나에게 레이는 예나 지금이나 단단하고도 의지되는 벽과 같은 존재였다.

콰앙!!

검면에서 폭발이 일며 요하나의 검을 가속시켰다.

오버드라이브를 어레인지한 요하나의 기술은 과거에 비해 많이 정교해져 있었다.

레이는 요하나가 그려내는 유려한 검의 움직임을 보며 감탄했다.

'요하나도 요하나지만... 제플린 그 양반도 진짜 장인이긴 하네.'

제플린은 요하나가 기술을 사용할 때도 검을 섬세하고 용이하게 다룰 수 있도록 가장 적합하고 균형 잡힌 디자인의 검을 제작해주었다.

레이는 요하나의 검을 받아내 주다가 슬슬 숨이 차는 걸 느끼고 양손의 검을 스치듯이 겹쳐 베었다.

그 틈 사이로 공간의 왜곡이 발생해 요하나가 휘두른 검의 궤적이 살짝 어긋났다.

요하나는 곧장 궤적을 수정했지만 결국 파고드는 레이를 막지 못했다.

터업!

검날이 서로에게 향하는 순간 레이와 요하나가 검을 역수로 돌려 잡고 몸을 부딪쳤다.

껴안는 모양새가 된 탓에 후끈하게 달아오른 몸의 열기가 잠시 서로의 피부를 데웠다.

레이가 제자리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힘들다아..."

아직 휴식이 불충분해서 체력이 좀 후달렸다.

"이러다 죽겠네에..."

대자로 누운 레이가 엄살을 떨며 요하나의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칭찬해주는 사이.

요하나가 누워있는 레이의 머리 양옆에 발을 디디고는 레이를 위에서 내려봤다.

그러다보니 레이의 시야에선 요하나의 얼굴과 가랑이 사이가 특히 강조되어 보였는데, 별로 좋은 기억이 있는 각도가 아니었다.

약간 PTSD 증상 같은 걸 느낀 레이가 조심스레 부탁했다.

"요하나, 옆으로 두 발만 움직여 줄래?"

레이의 표정을 확인한 요하나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나 요즘 스페라 님께 부탁해서 훈련복도 자주 빨고 자주 갈아입어."

"어... 그래, 다행이네."

"그러니까 이제 내 훈련복에서 냄새 안 나."

"근데 그걸 굳이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을까?"

"..."

요하나가 부끄러움 탓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면서도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

부끄러움을 버텨야 레이의 머릿속에서 꿉꿉이 따위의 오명을 지울 수가 있었다.

요하나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왜? 혹시 쫄려?"

"어. 존나 쫄리는데?"

"야!!!!!"

요하나가 빽 소리쳤다.

협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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