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마차가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에 도착했다.
마차가 요새 안으로 들어서니 스페라와 알레시아가 가장 앞서 나와 레이를 마중했다.
"무사히 다녀왔나요?"
스페라가 반가운 목소리로 묻자 레이가 마차에서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사지 멀쩡하게 돌아왔습니다."
"나의 기사여! 보고 싶었느니라!"
자비로운 알레시아는 '불륜을 저지른'이라는 문구를 빼고 레이를 환영해주었다.
레이가 알레시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답했다.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아가씨."
레이가 분위기를 맞춰주자 알레시아가 흡족하게 웃었다.
요하나는 루나와 먼저 인사를 나눈 후 슬그머니 레이에게 다가와 레이의 몸 여기저기를 주먹으로 툭툭 쳐보았다.
이곳저곳 두드려 보아도 레이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일은 없었다.
상처가 없는 걸 확인한 요하나가 썩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엔 어디 크게 안 다쳤네?"
"다행히도 말이야. 루나 덕분이지, 뭐."
"음..."
약간 복잡한 표정을 지은 요하나가 제플린에게 받은 자기 검을 내보이며 자랑했다.
"나 많이 늘었다?"
"내일이나 모레 훈련장에서 한 번 보자."
요하나의 발전은 레이도 기대하고 있던 차였다.
그때 카렌이 레이에게 다가와 덥석 안겼다.
알레시아는 카렌이 오랜만에 레이의 얼굴을 보았으니 저 정도 반가움을 표현할 수 있다고 납득하려 했지만, 이내 레이가 카렌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려 하자 화들짝 놀랐다.
"나, 남사스럽게 남들 보는 곳에서 뭐하는 것이냐...!"
알레시아가 억지로 카렌을 떼어놓았다.
레이는 가볍게 웃음을 짓고는 데런을 비롯한 다른 아이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 인사를 거의 다 끝낸 후에야 레이는 젠킨슨을 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마스터. 디디에 경도 잘 지내셨습니까?"
아직 다리가 좀 불편한 젠킨슨은 목발을 짚은 채 레이를 향해 피식 웃었다.
"종자놈아, 마스터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 아니냐?"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시기에 순서를 미뤄 봤습니다."
"그 싸가지는 왕국을 다녀와서도 여전하구나."
레이와 함께 크게 웃은 젠킨슨이 한숨을 푹 쉬었다.
"네가 가는 곳마다 아주 지랄이 나는구나."
왕국에 메테오가 떨어진 건 대외비였지만 반경 수백 킬로미터가 박살 났는데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제국에서도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고, 온갖 괴소문도 절찬리에 팔리고 있었다.
젠킨슨은 곁에 서 있던 디디에와 함께 미안함을 드러내며 물었다.
"가디 자작님은 어떻게 됐냐?"
"구출했습니다. 사고친 게 많아 지금은 구금되어 계시죠. 그래도 일이 마무리될 쯤엔 풀려나실 수 있을 겁니다."
"고맙고, 고생 많았고,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레이가 밝게 웃었다.
*
레이는 몸을 씻고 휴식을 취한 뒤 스페라와 식사 자리를 가지게 됐다.
일단은 손님 신분으로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에 방문한 레이였기에, 예의상 스페라와 먼저 식사 자리를 가져야 했다.
본래는 레이, 루나, 스페라 세 사람이서 식사할 예정이었지만 알레시아가 고집을 부린 덕에 네 명이서 식사를 진행하게 됐다.
레이는 고기를 자르며 스페라에게 물었다.
"저 없는 동안 별 문제는 없었나요?"
"아쉽게도, 없었어요. 이야깃거리가 좀 더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다행이네요. 요즘 요하나와 승률은 어떻습니까?"
"..."
스페라의 표정이 대번에 나빠졌다.
결과가 썩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레이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 요하나와 만났을 때만 해도 검을 나눌 수 있는 또래 친구와 사귀게 되었다며 기뻐했던 스페라다.
허나 이제는 경쟁심을 활활 불태우는 기사만 남아 있었다.
스페라는 뒤늦게 표정을 관리하며 화제를 돌렸다.
"제가 그동안 생각해봤는데요."
"무엇을 말입니까?"
"레이와 제가 혼약 관계를 맺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음... 그렇긴 하네요."
소드마스터 둘이 부부 관계를 맺는다?
이러면 힘의 균형이 어그러질 수밖에 없다.
제국을 갈아엎을 생각이 아니라면 정치적으로도 절대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견제가 미친듯이 쏟아질 테니 말이다.
설령 소드마스터, 혹은 소드마스터 유망주끼리 눈이 맞았다고 해도 식은 다른 사람과 올리는 게 나았다.
에른스트가 레이를 보고 눈돌아가서 혼약을 강요하긴 했지만 말이다.
스페라의 설명을 들은 알레시아가 의기양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역시 나의 기사 곁엔 나밖에 없구나!"
알레시아는 기반과 재능이 하찮았던 덕분에 스페라를 재낄 수 있었다고 좋아했다.
그때 스페라가 찬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레이를 제국 변방으로 돌리는 것도 황제 폐하께는 껄끄러울 테니... 어쩌면 레이가 황실과 연을 맺게 될 수도 있겠네요."
"..."
알레시아가 입을 쩍 벌리더니, 이내 흐물흐물하게 변해 울상을 지었다.
"어, 어찌... 이, 이런 일이..."
스페라가 탈락했다고 좋아했더니 이번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황녀가 저울에 올라왔다.
이건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나의 기사가아... 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오..."
질질 짜는 알레시아를 레이가 달랬다.
"아가씨, 걱정 말고 식사나 하세요."
"으우으..."
알레시아는 흐물흐물해진 채로 고기를 입에 넣고 씹었다.
그래도 곧 기운을 차린 알레시아가 레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진짜로 메테오가 떨어졌느냐?"
"네, 뭐, 진짜로 떨어지더라고요..."
"혹시 가까이서 봤느냐? 진짜로 이야기책에 쓰인 것처럼 빛이 번쩍이고 먼지 기둥이 하늘까지 올라가고 엄청난 바람이 불어닥쳤느냐?"
알레시아가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해맑게 물었다.
레이는 그 모습이 왠지 좀 꼬왔다.
얼마 전 수소 폭탄을 가까운 거리에서 맞고 온 사람한테 버섯 구름 모양에 대해 흥민진진하게 질문하면 조금 꼬운 감정이 들 수도 있는 법이었다.
"..."
레이의 눈가가 좁아지자 알레시아는 괜히 한 대 쥐어박힐까 봐 슬그머니 의자를 움직여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린 레이가 두 손으로 먼지 기둥의 형태를 허공에 그려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와...! 무시무시하더라고요. 저도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먼지 구름이 그렇게 컸느냐?"
"끝이 보이지도 않던데요? 그러니까 어땠냐면..."
알레시아와 스페라가 고기를 썰던 나이프도 탁자에 내려놓고 거리를 좁혔다.
한동안 요새에서 색다른 자극이 없어 무료했던 알레시아와 스페라였기에, 흥미진진하게 레이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서 루나만 조용히 식사를 이어갔다.
*
검게 물든 비가 내리는 하늘 아래.
악취가 자욱한 대지를 한 여인이 걸었다.
여인이 지나가는 길에는 무수한 사체가 헝클어져 있었다.
갈라진 지면, 붕괴된 산, 밀려나간 구름으로 이루어진 풍경 사이로.
여인은 강처럼 흐르는 끈적한 진물을 밟아가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나아간 끝에, 여인은 한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 남자는 더럽고 거친 바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남자의 곁엔 찢겨나간 수많은 살점들과 함께, 거대하고 흉측하기 짝이 없는 무언가의 사체가 쓰러져 있었다.
여인이 손을 휘젓자 검게 변색된 사체는 저 멀리 날아가 땅을 나뒹굴었다.
남자는 자기 얼굴 위로 새로운 그림자가 지는 것을 느끼며 마른 입술을 열었다.
"무슨... 변덕이 일어서 여기까지 행차하셨을까."
"..."
여인은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리 하찮게 죽을 거라는 걸 알았어."
"너는 내가 구덩이 속에서 홀로 쓸쓸히 뒈질 거라고 했지."
남자가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눈동자 너머로 검고 검은 풍경과 함께, 여인의 모습이 비쳤다.
"네가 틀렸네. 봐봐, 혼자는 아니잖아."
썩 우쭐해보이는 남자를 향해 여인은 물었다.
"후회하진 않아?"
"후회... 음... 후회되는 건 참 많아. 하지만... 웃음이 나오는 좋았던 기억들이 더 많은 것 같아."
남자는 숨을 아껴가며 추억을 되돌아보았다.
짧다면 짧았고 길었다면 길었던 추억들이 하나하나 스쳐 지나가며 남자를 웃음 짓게 했다.
"우리들 꽤 잘 맞았잖아. 함께했을 땐 재밌었지. 네가 혼자 좀 겉돌긴 했지만. 하아, 나는..."
남자는 마침내 여인을 똑바로 마주 보며 능글맞게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눈물을 흘릴 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남자는 그리 착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여인은 울고 있었다.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평온했지만 눈시울은 그 어느 때보다 붉어져 있었다.
여인은 고개를 내려 남자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가슴엔 구멍이 나 있었다.
심장이 사라진 자리엔 핏물이 질질 흘러나왔다.
가슴에 난 구멍을 막아도, 심장을 단숨에 복구시킬 수 있는 수단이 있다고 해도 남자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심장이 터져나간 건 다분히 부차적인 문제였다.
남자는 지금 본인이 자초한 거래의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혼과 육체가 붕괴하며, 그는 점차 소멸해가고 있었다.
그에게 일어나는 현상은 권능의 영역이었기에 여인이 당장은 간섭할 수단이 없었다.
남자가 여인의 눈치를 보다 옆에 있던 무기를 향해 턱짓했다.
"염치 없긴한데, 여기까지 와준 김에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
"저것 좀 챙겨가 줄래? 상징성이니 뭐니 말이 많은 물건이라, 네가 가져가 되돌려 주었으면 좋겠어."
"알겠어."
"너답지 않게 시원시원해서 좋네."
농지거리를 쥐어짜내는 남자의 모습은 더는 유쾌해 보이지 못했다.
여인은, 굳이 성격 나빠보이는 물음을 입에 담았다.
"...두렵지는 않아?"
"방금까진 두려웠지."
몸에서 피가 거의 다 빠져나간 탓에 남자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남자는 억지로 목소리를 다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널 보니까 한결 낫네. 넌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했지. 네 곁에 있으면 나도 안정되는 기분이었어."
냉혈하다고 수 없이 손가락질을 받은 여인이다.
허나 이성과 효율을 앞세웠을 뿐.
오랜 교류 속에서, 남자는 여인에게도 마음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비록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남자는 여인에게도 '따뜻함'이 존재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후우..."
남자의 호흡이 점점 더 느리게 흘렀다.
삶이 꺼져간다.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한다는 걸 서로가 느꼈다.
여인이 입을 달싹였다.
입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여인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당신을 사랑했다고 고백하진 않으리라.
마법사란 족속이 지닌 맹목을 담아내기엔... 사랑이란 단어는 너무나 가벼웠으니까.
그렇기에 여인은,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담지 않았다.
"그리울 거야, 하르시아."
"그립...다라."
마지막 인사를 곱씹어본 하르시아가 따뜻한 웃음을 머금었다.
하르시아는 마지막이 될 숨을 들이쉰 후, 게이트 너머로 사라져가는 여인을 향해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고마웠어, 리실로테."
트드드득!!
환영이 사그라진다.
환영이 기록되었던 구슬 또한 바스러지며 소멸했다.
제국의 황제, 포이보스는 제국의 신검을 손에 쥔 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협상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