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이건 참.... 곤란하군."
포이보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후작의 헌신, 공로, 영향력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네만... 공적만 보면 근래 이만한 공로를 세운 자가 제국에 있었나 싶군."
"근 수백 년의 기록을 찾아봐도 몇 존재하지 않겠지요."
난세 속에서 평생을 노력해도 레이와 비견되는 공적을 쌓기는 힘들었다.
허나 레이는 이제 열아홉 살이었다.
동화책에서도 이렇게 주인공의 업적을 부풀리진 않았다.
"..."
포이보스는 고민했다.
레이가 세운 공적의 대부분은 정상적인 명령 체계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폄하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폄하 가능했다.
더군다나 1황자의 척살 건은 보는 시각에 따라 중죄가 될 수 있었다.
보통 중죄도 아니고 가문 단위로 몰살시킬 수 있는 중죄였다.
노회한 권력자들이 절차와 명분에 목숨을 거는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적합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일을 진행하면 공을 세웠다 해도 말장난 한 번에 얼마든지 목이 잘릴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러나 포이보스가 레이를 쳐내려 해도 에른스트가 협조하지 않을 것이다.
황위에 오르자마자 제국의 소드마스터와 척을 지는 건 굉장히 위험한 판단이었다.
사냥개를 삶는 게 포이보스에게도 썩 내키는 행위는 아니었고 말이다.
허나, 레이의 공적을 온전히 인정하고 보상하자니 걸리는 게 많았다.
'...쉽지 않군.'
일단 에른스트와 레이의 관계를 떨어뜨려 놓아야 할 필요성이 컸다.
두 사람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의 세력을 이뤄버리면 그 힘이 너무 비대해졌다.
이 부분에 대해선 에른스트 또한 포이보스의 입장을 이해해줄 것이다.
하지만 제국의 가장 변방에 데려다 놓는다 해도 레이는 자연스레 거대한 세력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10년만 지나도 제국 역사상 최연소 소드마스터에 제국을 구한 영웅으로 칭송받을 텐데...'
황실 입장에선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포이보스의 속이 좁은 게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였다.
레이가 황실에 진심으로 충성하며 고분고분 말을 듣는다 해도 안심할 수 없었다.
소드마스터는 150년 가까이를 정정하게 살았다.
레이처럼 어린 나이에 드높은 경지에 오른다면 그 수명은 더욱 길어질 것이다.
15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개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길지 누가 예측할 수 있단 말인가.
고민하던 포이보스가 다시 물었다.
"...그 아이가 공간검을 계승했다고?"
"그렇습니다."
공간검은 영웅의 전통성을 상징한다.
황실의 정통성을 상징하진 않는다 해도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할 게 분명했다.
'차라리... 황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곧 태어날 황녀, 혹은 정통성이 좀 떨어지는 황족의 아이와 혼약을 맺게 한다면.
당장은 상황을 주도하기 편하겠지만 역시나 수명이 문제였다.
황족의 수명은 기껏해야 60 내외였다. 소드마스터는 그 두 배하고도 반을 더 살았고 말이다.
잘못하면 일백 년 뒤쯤엔 황실이 레이의 영향력에 먹혀버릴 수도 있었다.
그게 황실이 이제까지 로드급 인물을 황실의 일원으로 되도록 받지 않았던 이유였다.
"흠..."
여러모로 골이 아픈 상황이었다.
로드급 무인들은 항상 군주의 머리를 아프게 했기에 자리에 앉아 고뇌한다고 당장 좋은 답이 나올 리는 없었다.
일단 레이와 만남을 가져볼까 포이보스가 고민하고 있는데 에른스트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무엇을 심려하시는지 모르지 않습니다만... 그 아이는 본인의 작위도, 명예도, 재물도 탐하지 않을 겁니다."
"...후작답지 않은 순진한 이야기로군. 설령 시골 변방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 해도 한 번 권력과 재물을 맛 보면 쉬이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게 순리이고 이치 아니던가?"
"폐하께서도 과거에 공간검을 계승시키기 위한 시도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낳았는지 알고 계실 겁니다."
"물론 알고 있다."
"그 아이는 공간검의 부작용을 극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의 신체 또한 공간검이 가하는 부하 탓에 계속 망가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 뜻은..."
"단명할 것입니다. 알리모에서 또다시 무리를 했으니... 남은 수명은 10년 이하겠지요. 그 아이도 본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예기치 못했던 이야기에 포이보스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10년도 남지 않았다고?"
"예, 그 아이가 귀환한다면... 황궁의 성직자와 치료사를 불러 폐하께서도 확인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수명을 연장시킬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가?"
에른스트는 잠시 침묵했다가 곧 입을 열었다.
"약간이나마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고 들었습니다."
*
레이는 일행들과 함께 프루아 인근에 무사히 도착했다.
왕국의 수뇌부가 사라진데다 제국의 군대까지 파병된 탓에 분위기가 꽤 혼란스러웠다.
혼란이 수습되고 질서가 어느 정도 잡히기까진 시간이 좀 필요할 것으로 보였다.
한편, 레이와 함께 알리모로 동행했었던 뱅과 제트는 제국이 내린 게이트 근방을 순찰하라는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다 레이의 일행을 발견했다.
뱅과 제트는 레이를 알아보고 곧장 다가갔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리 말하며 뱅과 제트는 레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끝까지 곁을 보좌하지 못해 죄송하다 사죄하는 뱅과 제트를 레이가 곤란해하며 일으켜 세웠다.
"보는 눈도 많은데 너무 그러진 말고..."
"알겠습니다. 게이트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는 되도록 빠르게 제국으로 귀환하고 싶었다.
왕국에 오래 머물러봤자 탁한 공기만 들이마시다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문제에 휘말릴 게 뻔했다.
체력도 다 떨어져서 이젠 진짜 휴식이 필요했다.
레이는 루나와 울트와 함께 몇 가지 간단한 절차만 거치고 게이트의 통과 허가를 받았다.
레이가 게이트를 건너가기 전 길란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고생 많았어, 기사단장 나으리. 분위기가 좀 혼란스럽던데 몸조심 하고."
"큰 도움을 받았소. 은혜는 잊지 않겠소."
"그 뭐냐, 부단장님 말 좀 잘 듣고. 이런 때일 수록 눈먼 칼에 안 맞도록 조심해야지. 가만히 있기 뭐하면 괜히 여기저기 참견하지 말고 차라리 왕궁이나 잘 지키고 있어. 다 도망가서 아무도 없다며. 지키는 사람은 있어야지."
"새겨듣겠소."
"뭐... 여튼 다음에 서로 웃는 얼굴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
그 외에도 다른 몇 명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레이가 루나와 울트와 함께 게이트를 넘어갔다.
츠즈즉!
게이트를 넘어가자 달라진 공기의 상쾌함과 달라진 햇살의 열기가 레이를 맞이해주었다.
레이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아직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제국으로 돌아오니 안도감이 몰려왔다.
레이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올리며 긴장을 털어내는 사이.
기다리고 있던 에른스트가 다가와 레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정말... 감사합니다. 근데 말입니다..."
레이가 곤란해하며 완전히 고철이 된 아티펙트를 하나 들어 보였다.
"빌려주신 무구들이 거의 다 이 꼴이 됐는데 뭐라 사죄드려야 할 지 모르겠네요."
겸양을 떠는 레이를 향해 에른스트가 웃어주었다.
"네 공로가 적지 않으니 질책은 않도록 하겠다."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따라 오거라."
에른스트가 앞서 걸으며 레이에게 말했다.
"선황께서 승천하셨다는 비보는 들었느냐."
"예, 뱅에게 들었습니다."
"네가 지금까지 세운 공적을 황제 폐하께 보고드렸다."
"아..."
레이는 예상하고 있었던 일임에도 몸을 움찔 떨었다.
괜히 자기 뒷목을 매만진 레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노하시진 않으셨습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공적을 인정받는다면 황제 폐하께 청하고 싶은 보상이 있느냐?"
"어... 글쎄요. 일단 고향에 들르고 싶네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을 못 본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아요."
에른스트가 레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되물었다.
"그게 끝이더냐?"
"다른 건 고민을 좀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너무 욕심부렸다가 폐하께서 불쾌히 여기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 농담 아닌 농담에 에른스트는 착잡한 감정을 내비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충분히 휴식을 취하거라."
*
상처를 치료받고 휴식을 취한 뒤.
레이의 일행은 황실에서 파견된 조사관에게 알리모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진술하게 되었다.
조사관은 취조하는 듯한 분위기가 연출되지 않게끔 주의하며 레이의 일행에게 예우를 갖췄다.
조사관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진실을 감별하기 위해 날카롭게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노련한 조사관도 루나와 레이에게서 거짓을 말하는 신호는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다.
울트의 경우엔 게네시스와 티티에 관한 정보를 조사관에게 밝히진 않았다.
다만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이상 계속 진실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에른스트를 통해 황제에게 관련된 내용을 전부 보고했다.
게네시스와 티티에 관한 문제와는 별개로.
울트는 제국의 법령을 어긴 것이 꽤나 있어 일단 형식적으론 구금 상태로 전환됐다.
죄를 지었다고 해도 세운 공로가 없지 않아 있으니 울트는 이번 사태가 마무리될 쯤엔 황제의 비호 아래 무사히 풀려날 것이라고 에른스트는 언질해 주었다.
어쨌든, 당장은 제국도 알리모에서 군사 작전을 진행하느라 바빴다.
신상필벌이니 논공행상이니 그런 문제는 현 사태가 마무리되고 나서 논의가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앞으로 두어 달은 더 기다려야 했기에, 그동안 레이와 루나는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로 되돌아가 머물기로 했다.
레이는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로 향하는 마차를 타고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웃음을 머금었다.
그때 아프텔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황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오벨리스크의 전체적인 보안을 강화했습니다.]
레이는 순간 식겁해서 허리를 세웠다.
"뭐야, 루나가 그 시스템을 사용한 걸 눈치챈 거야?"
[그건 아닙니다. 보안 강화의 주된 원인은 이번 메테오 사태로 인한 경각심 증가입니다. 다만 낮은 단계의 의심을 소수가 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루나가 그쪽 시스템을 사용 못 하게 되는 건가?"
[사용 가능합니다. 루나에게 부여된 권한은 누구도 간섭 불가합니다.]
"그럼 신경 안 써도 되겠네."
레이가 가벼운 어투로 단언하자 아프텔이 고개를 저었다.
[보안이 강화된 이상... 다음에 오벨리스크 시스템에 접속한다면 황실 마탑 관계자들에게 오벨리스크 시스템의 존재와 그곳에 접속한 자가 있음을 발각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들키면 역추적은 막을 수 없습니다.]
말인즉슨 제국 몰래 메테오를 전개 가능한 건 앞으로 한 번이 끝이라는 뜻이었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찌를 루나에게 넘겨 루나 또한 그 정보를 알 수 있게 했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가 가까워졌다.
레이는 괜히 자꾸 웃음이 나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헤실헤실 웃는 모습을 애들에게 굳이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소멸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