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로드급 마족이었던 존재의 최후라기엔 초라했지만.
억지로 합일을 이룬 마족의 몸뚱이엔 악신의 권능이 집약되어 있었다.
적어도 마족의 몸뚱이에 깃든 힘의 크기만큼은 전장에 있는 모든 존재를 압도했다.
그럼에도 제국의 기사들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마족을 향해 전진했다.
이내, 전투가 시작됐다.
만약 로드급 마족에게 오랜 세월 쌓아왔던 기술과 교활함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면 제국의 파견대 또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을 것이다. 로드급이란 그런 존재였다.
허나 자아를 잃어버린 마족은 그저 폭주하는 힘 덩어리였을 뿐이었다.
비록 시간은 약간 끌렸지만 제국의 파견대는 큰 희생 없이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파견대를 적당히 거들어주던 레이가 마족의 사체 덩어리가 산화하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레이는 지금 상황이 꽤 유쾌했지만, 제국의 파견대는 세상 심각한 표정을 쉽사리 지우지 못했다.
게이트를 넘어오자마자 마주친 게 파견대 전부가 들러붙어서 드잡이질을 해야할만큼 강대한 적이었으니, 아무리 담대한 자라도 경각심이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마족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얼마나 큰 피해가 발생했을지 다들 모르지 않았다.
어쨌든 전투는 끝났고, 레이는 제국의 파견대와 접촉했다.
아직 잃어버린 팔을 회복하지 못한 딜리드 프리슬란이 먼저 아는 척을 해왔다.
"레이."
"안녕하세요. 여기서 뵈니까 되게 반갑네요. 셰이 경도 반갑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뭐... 덕분에 목숨은 건졌네요."
가볍게 웃는 레이를 향해 로얄가드 다카우스가 다가왔다.
딜리드와 셰이가 레이에게 보여준 언행과는 별개로, 레이가 지니고 있는 박살난 무구들 중 대부분이 에른스트의 것이었기에 다카우스는 태도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어마어마한 신뢰를 쌓은 것이 아니라면 에른스트가 저런 무구들을 대량으로 해외로 반출하는 걸 허락해줄 리가 없었다
"프리슬란 후작 각하께서 보낸 첩보대원이 맞소?"
"어... 네, 그렇습니다."
"현 사태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있다면 공유해주길 요청하오."
레이는 루나와 미리 맞춰놓았던 왜곡을 덧붙여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다카우스는 대단히 믿기 힘들다는 얼굴을 했지만, 레이의 진술에 대한 진실 유무는 이곳에서 판단할 게 아니었다.
"일단 후방까지 호위해주겠소."
다카우스가 가장 우선해야 할 임무는 정보 수집이었다.
이번과 같은 사태가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하늘이 열린 경위가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이를 밝혀줄 가장 중요한 증인이 레이의 일행인 만큼 반드시 보호해야 했다.
*
길란트는 메테오의 후폭풍이 가라앉은 후 무엇을 해야 하나 고뇌했다.
상부와의 연락은 두절되어 어떠한 소통도 할 수 없어 답답함만 가중됐다.
알리모의 수도는 메테오로부터 무사했을 테고 통신 아티펙트도 정상인데 어째서 연락이 안 되는지 의문이었다.
"후우..."
연락도 되지 않는 상부를 계속 찾고 있을 수는 없었다.
현재 리오슈코의 생존자는 기사단을 제외하면 소수의 마법사와 성직자, 그리고 코멧 뿐이었다.
길란트는 일단 부상이 심각한 자는 치료를 받고 남은 자들은 생존자가 더 있는지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성과는 좋지 못했다.
메테오로부터 발생한 후폭풍의 위력을 감안하면 평범한 사람들은 아주 단단한 건축물에 숨어 있어야 무사할 수 있었는데, 리오슈코의 건축물은 그리 튼튼하지 못했다.
근방을 전부 뒤진 후에야 질렌할 백작을 비롯한 중상을 입은 사람 대여섯 명을 간신히 구출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수색 과정에서 물자를 꽤 확보할 수 있었다.
그 대부분이 무너진 지하 창고를 뒤져서 얻어낸 것이었다.
지하 창고엔 보통 시체도 몇 구씩 같이 발견됐다.
길란트는 기사단원들과 회의 끝에, 약간의 휴식을 취해 체력을 충전한 후 후방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알리모의 수도 방향으로 후퇴한다고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다들 메테오가 연속해서 떨어지진 않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길란트가 생존자들 사이에서 기사단원을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나와 함께 금지된 숲을 수색할 단원이 있나? 3명까지 자원을 받겠다."
"단장!!"
레오니가 짜증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를 토해냈다.
"진짜 미쳤어요?!"
"수색 기간은 하루다. 하루 안에 성과를 얻지 못하면 바로 귀환할 거다."
"아니 하루고 이틀이고 거길 또 왜 들어가요?!!"
레오니는 그리 따졌지만, 얼마 안 가 은십자 기사단원 세 명이 수색 작전에 자원했다.
기사단원 모두가 '레온'에게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길란트가 혹시나 해서 코멧을 돌아봤다.
"당신은 어찌할 계획이오? 다른 자들과 같이 프루아 쪽으로 이동하겠소?"
"시발..."
코멧은 허탈한 심정이 담긴 욕설을 중얼거렸다.
레온이 왕국이 무너질 수 있니 뭐니 그따위 말을 면전에서 지껄일 때만 해도 개소리라 치부했다.
악마 숭배자들 탓에 좀 위험한 상황이 연출될 수는 있겠지만, 레온이 금지된 숲의 위험성을 너무 과장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병신이었군.'
안이함에 빠져 상황을 병신 같이 판단한 건 코멧 자신이었다.
코멧은 헛웃음을 질질 흘리더니 길란트를 마주봤다.
"같이 갑시다. 운이 지랄 맞게 좋다면... 살아있는 레온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
코멧은 지금의 결정이 다분히 충동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철회하지 않았다.
당장은 뭐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후 휴식이 끝나고 이동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을 때, 레오니는 다시 한 번 꽥꽥거리며 길란트에게 짜증을 토해냈다.
"그냥 돌아가자니까요!! 간신히 살아나왔더니 죽고 싶어 환장했어요?!!"
"해야하는 일이다."
"단장!! 아이씨, 그럴 거면 나도 가요!!"
"...허가하지 않겠다. 이런 소규모 작전에 참여하기엔 레오니 경의 역량이 충분치 않다."
레오니가 부단장 직함을 단 것을 무력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물론 레오니의 역량이 충분했다고 해도 길란트는 레오니를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레오니가 달려들 것처럼 길란트를 향해 씩씩거리며 발을 내딛는 순간.
길란트가 저 멀리서 기척을 느끼고 팔을 들어올렸다.
기사단원들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카가강!
"..."
모두가 침묵한 채 대기하는 사이.
일련의 무리가 공기 중의 분진을 헤치며 리오슈코로 다가왔다.
그들 중 다수가 제국과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갑주를 입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얼굴을 다시 위장한 레이가 길란트에게 아는 척을 했다.
"아, 여기서 다시 보는군, 기사단장. 다행히 포위되기 전에 금지된 숲을 빠져나갔던 모양이야."
"레온...?"
레이는 손을 흔들어준 후 박살난 리오슈코를 바라보았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레이는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떠한 표정을 지으며 살아가는지 경험했었다.
하지만 지금 리오슈코엔 먼지 냄새, 타는 냄새, 그리고 피 냄새만이 자욱했다.
레이는 미간을 한 번 찌푸렸다 펴는 것으로 잡다한 감정을 덜어낸 후 코멧에게 고개를 돌렸다.
코멧은 변장을 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이는 인상을 보니 누구인지 알아볼만 했다.
"그쪽도 용케 살아 있었군."
"하...!"
코멧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메테오가 떨어진 지역에서 살아 돌아오다 못해 제국의 최정예 전력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온 꼴을 보니 이젠 그냥 실소만 나왔다.
저런 놈한테 첫만남 때 개겼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배어나올 지경이었다.
한편 길란트는 제국의 파견대를 주시하며 다카우스에게 물었다.
"전하께서 제국의 군사작전에 동의하셨소?"
참 융통성 없는 소리를 한다 싶었지만, 왕국의 기사 입장에서는 반드시 확인해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다카우스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은 채 담담하게 답해주었다.
"알리모의 국왕께서는 메테오의 존재를 확인하신 후 게이트를 통해 제국으로 대피하셨소."
그 한 문장에 응축된 내용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졌고, 길란트 또한 더는 따지고 들지 못했다.
수뇌부가 몰살당하는 상황만은 피해야하는 게 맞았기에 국왕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주장할 수는 없었으나 아랫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또 별개였다.
다카우스는 공기 중에 흐르는 마나의 기운을 확인하고는 레이를 돌아봤다.
"안전 지대에 진입했으니 우리는 남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되돌아가겠소."
"감사했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프루아 근방에 있는 게이트로 향하시오. 현재 제국군이 수호하고 있을 테니."
다카우스는 그리 조언한 후 파견대의 전력을 약간 쪼개 레이의 일행을 호위하라 명했다.
레이의 일행은 리오슈코의 생존자들과 함께 게이트를 향해 출발했다.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감을 느낀 레이가 업고 있던 루나에게 속삭였다.
"고생 많았어, 루나. 참... 너무 오래 나돌아 다녔던 것 같아.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네."
*
메테오의 충돌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제국 또한 비상이 걸렸는데, 그 와중 에른스트는 포이보스에게 독대를 청했다.
포이보스는 독대 요청을 수락하고 에른스트를 잠시 기다리던 중에 헛웃음을 흘렸다.
얼마 전, 에른스트는 첩보대원 한 명의 구출을 위해 제국이 왕국을 압박해주길 포이보스에게 요청했다.
왕국을 압박할 대외적인 명분은 '지하 도시 존재의 은폐'.
포이보스는 이를 수락했고, 게이트 근처에 제국의 고위 전력을 다수 집결시켰다.
그건 알리모 왕국을 압박하기 위한 보여주기 식 제스쳐에 가까웠다.
알리모 왕국이 꼬리를 내리면 포이보스는 금지된 숲에 왕국군이나 제국군을 추가로 파병할 수 있도록 조치할 예정이었다.
'프리슬란 후작에게 빚이나 지워두자고 진행한 일이었는데...'
헌데 갑자기 왕국에 메테오가 떨어졌다.
에른스트의 요청에 의해 게이트 근처에 제국의 고위 전력들이 집결되어 있었기에, 포이보스는 단시간만에 최정예로 구성된 부대로 군사 작전을 개시할 수 있었다.
에른스트의 요청이 아니었다면 제국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 파견대를 편성하는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했을 것이다.
'이래서는 프리슬란 후작에게 빚을 지웠다고 여기기도 어렵겠군.'
포이보스는 약간의 아쉬움을 곱씹었다.
허나 에른스트를 독대한 후에는 그런 잡생각이 전부 날아갔다.
"...하하."
포이보스는 에른스트가 바친 은백색 검을 살피다가 실소를 터뜨렸다.
황제로서 위엄을 지켜야 했으나 웃음이 멋대로 흘러나왔다.
"선황께선 후작을 경계했고, 경계하는 만큼 무한히 신뢰하셨네. 그 마음을 알 것 같군."
에른스트는 자신이 원하는 이익을 위해 꾀를 부리는 걸 마다하지 않았지만 더불어 황제와 제국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항시 조심했다.
에른스트는 언제나 황제와 제국을 우선해서 행동했다.
2황자 시해 사건을 제외하면 말이다.
"제국의 신검인가..."
포이보스가 모로스에 마나를 조금 불어넣자 찬란히 빛나던 검신이 더욱 밝아졌다.
다른 귀족이 제국의 신검을 소유하고 있다는 걸 바로 밝히지 않았다면 용납 불가한 중죄였지만.
소드마스터에겐 소드마스터의 기준을 적용시킬 필요가 있었다.
시간이 조금 걸렸다고는 하나 에른스트는 포이보스가 가장 정통성이 필요한 시점에 모로스를 반환했다.
이로써 포이보스는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을 상쇄하고 제국을 이끄는 동력원을 얻을 수 있었다.
에른스트는 결코 먼저 입에 담지 않았지만.
모로스가 진품이기만 하다면 이 빚은 굉장히 비쌌다.
그래도 이뿐이었다면 포이보스는 기분 좋게 웃고 넘어갈 수 있었다.
허나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포이보스는 자기 앞에 놓여진 보고서를 읽고는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에른스트를 응시했다.
"이게... 과장이..."
"제 가문과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과장이나 왜곡을 담지 않았습니다."
로커스트 토벌전 참전.
사도가 되어 변절한 1황자를 단독으로 척살.
루비하 왕국의 악마숭배자 세력 확장을 저지했으며.
만약 성공했다면 제국을 반으로 가를 뻔했던 에리다누스와 반역도의 워프게이트 탈환 시도를 저지한 '알베미나 워프 게이트 전투'의 최고 공로자.
그리고,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번엔 알리모 왕국 중앙에 메테오가 충돌하는 걸 저지하고 알리모 왕국을 집어삼킬 뻔했던 악마 숭배자의 세력을 역으로 섬멸했다.
마지막으로.
보고서에 적힌 당사자의 나이.
열아홉 살.
애들 읽는 이야기책도 이딴 식으로 쓰면 욕을 처먹으리라.
보고서의 내용을 처음부터 다시 읽은 포이보스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건 참.... 곤란하군."
소멸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