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03화 (203/446)

203화

레이가 루나의 손에 이끌려 공간의 틈새에 진입했다.

레이는 공간의 틈새에 들어가고 나서야 울트가 이전에 했던 말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이곳은 아공간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장소였다.

블링크가 발현되는 과정에서 눌어붙은, 혹은 중첩된 공간의 통로에서 발생한... 무언가의 틈이었다.

레이로서는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든 개념이었기에 딱 그 정도의 묘사가 레이의 한계였다.

묘한 부유감이 있는 공간의 틈을 떠다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루나가 레이와 울트를 밖으로 이끌었다.

후욱!

메테오로 인해 발생했던 열기가 공기 중에 남아 레이를 맞이해주었다.

지면 또한 지진의 여파 탓에 아직까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분진이 시야를 흐리는 와중, 레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장이 무너졌던 지하 도시는 운석 충돌로 인해 완전히 붕괴되어 형태를 잃어버렸다.

땅이라도 헤집지 않으면 지하 도시가 존재했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레이가 서 있던 '지하 도시'와, 로드 급 마족이 지키고 있던 '2 km 아래의 지하 요새'는 거리가 좀 있었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이 정도 피해를 끼쳤다는 건...'

반경 일백 킬로미터 이상이 초토화 됐으리라.

최소 수백 킬로미터는 메테오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말이다.

레이가 복잡한 표정을 짓던 중 루나가 울컥 피를 토했다.

"흐읍...!"

"루나!"

루나는 너무 무리했다.

서클이 한계 이상의 성능을 발하기 위해 오버히트 되며 일부 손상됐다.

손상된 서클은 스스로가 시간을 들여 회복시켜야 됐다.

그와 별개로 서클이 과부하되며 신체에 압박을 가함으로써 생긴 부상은 포션 등으로 빠르게 조치를 취해야 했다.

레이가 품에 있던 포션을 꺼내 개봉했다.

에른스트에게 얻어온 것이라 제국에서도 이것보다 더 좋은 포션은 찾기 힘들었다.

레이가 루나에게 포션을 먹이자 루나의 혈색이 조금씩이나마 좋아졌다.

레이는 루나가 진정되어 가는 것은 확인한 후 다시 주변을 살폈다.

메테오는 '겉보기'보단 살상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물론 메테오에 직격당한다면 무슨 수작을 부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 어떤 초인이나 단단한 요새라 해도 파멸을 피하지 못했다.

다만, 메테오는 전개하기 위해 고도의 마법적인 과정을 거치지만 그 결과는 순수한 질량 병기에 가까웠다.

기사나 마법사 같은 초인들에게 있어 마나가 깃들지 않은 공격은 대항하기가 꽤나 수월했다.

메테오가 만들어낸 크레이터 범위에서 꽤 벗어나 있는 이곳에서라면...

실력 있는 기사나 마법사라면 준비를 잘했다는 전제하에 목숨을 잃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다.

더군다나 마족 놈들은 평균적으로 회복력도 좋았다.

그러니 어떻게든 생존해서 몸을 뒤덮은 돌무더기를 헤집고 지상으로 기어올라올 수 있었던 것이다.

파가각!!!

레이가, 간신히 지상으로 고개를 내민 마족의 머리를 박살냈다.

레이는 혹시 몰라 터져나간 마족의 머리를 발로 짓뭉개며 공기에 깃든 마나를 느껴보았다.

본래 이곳을 잠식하고 있던 마경에 가까운 부정한 기운은 전혀 변치 않았다.

이미 타락한 땅을 '정화'하기 위해선 물리력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함은 틀림없어 보였다.

레이가 루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루나, 이것 좀 가져갈게."

팔찌를 다시 팔목에 찬 레이가 아프텔에게 명령했다.

"아프텔, 근처에 생명체 징후 탐색해줘."

[알겠습니다.]

확인해보니 악마 숭배자들이 몇 마리 더 목숨이 붙은 채 지하에 묻혀 있었다.

정신 차리기 전에 제거하는 게 나았다.

레이는 울트에게 루나의 보호를 부탁한 후 땅에 묻혀 있던 악마 숭배자들을 하나씩 찾아내서 제거했다.

잠시 뒤 일을 마친 레이가 뿌연 시야를 헤치고 루나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금지된 숲은 더 이상 숲이라 불리지 못할 것이다.

잘해봤자 금지된 황무지 정도의 이름을 얻을 것이다.

이곳이 이렇게 박살 났는데 사람들이 거주하는 도시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

메테오의 후폭풍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하나씩 세어보기도 벅찰 것이다.

"..."

이건 과연 학살인가?

아니다. 결코 그리 불려서는 안 되었다.

루나는 본래 레이가 예측했던 값보다 훨씬 작은 희생으로 사태를 종결시켰다.

훨씬 작은 희생으로 악마 숭배자들을 저지하고 섬멸했으니 루나의 판단과 행위는 영웅적이었다고 칭해야 옳았다.

누군가는 진실을 안다면 이번 사태를 학살이라 비난할 것이다.

허나 해결책을 제시 못하는 입바른 소리는 아무 가치 없는 개소리일 뿐이었다.

물론, 레이는 알고 있었다.

루나가 이번 일을 행했던 가치 판단의 기준에는 대의 같은 것보단 레이의 안위가 중점에 있었다는 것을.

레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루나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레이는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았고, 또한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이보다 더욱 끔찍한 희생을 감내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 주제에 루나를 비난하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루나가 은색 눈동자로 레이를 바라봤다.

루나는 레이의 어떤 힐난도 담담히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레이는 은색 눈동자를 마주 보며 침묵하다, 루나의 푸른 머리카락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앞으로는 이런 규모의 마법을 쓸 거면 말 좀 해주고..."

"..."

"희생은... 반드시 필요한 상황에서만 감수해야 해. 잠깐의 편의를 위해서 남들에게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돼."

"...알겠어요."

"고생 많았어. 훨씬 거대한 재앙이 되었을 사태를, 루나 덕분에 막을 수 있었어. 근데..."

레이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메테오를 우리가 떨어뜨렸다고 밝혀지면 굉장히 곤란해질 것 같은데... 숨길 수 있을까?"

"...악마 숭배자들이 일으켰다고 증언하면 돼요."

악마 숭배자들의 핵심 시설에 진입한 후, 악마 숭배자들이 알리모의 중앙에 떨어뜨리기 위해 준비하던 메테오의 낙하지점을 뒤틀었다.

루나의 주장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랬다.

물리적인 증거는 전부 소멸해버린 지금 시점에서, 다른 이들은 가장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진술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

레이와 루나는 아프텔로부터 제국의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기에, 제국 조사대의 심문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미리 파악하고 대비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레이와 루나는 공적만 따지만 전쟁 영웅이었다.

뒷배인 에른스트가 갑자기 뒤통수라도 치지 않는 이상 강압적으로 끌려갈 확률은 낮았다.

레이는 루나의 이야기를 다 듣고 울트를 돌아봤다.

"그럼 우리 가디 자작님만 입을 맞춰주시면 되겠네요."

울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알겠어. 그리할게."

강제적인 효력 같은 건 없었지만 울트는 일단 레이와 루나에게 협조하겠다고 맹세했다.

이만한 사태를 일으키고 울트 혼자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레이의 신원이 진짜 '레이'라면, 레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필립스 백작령도 박살 날 것이고 티티도 무사하기 힘들었다.

여러모로 울트도 레이에게 협력해야 하는 처지였다.

울트는 루나로부터 어떻게 입을 맞춰야 할지 설명을 마저 듣다가 발레리우스를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처음엔 그게 발레리우스인지도 몰랐다.

발레리우스는 '발레리우스 였던 것'이 되어 거의 다 바스러져 있었다.

한 번 쓰고 돌려주려던 것 아니었나, 울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세상 떫은 표정을 지었다.

가지고 있던 아티펙트 중 가장 전술적 가치가 높았던 발레리우스가 박살이 나버렸으니 표정 관리가 안 됐다.

그래도 울트는 따지고 들지 못했다.

방금 메테오를 전개해 반경 100 km를 날려버린 마법사한테 내 아티펙트 어쩔거냐고 따지고 들 만큼 울트는 병신 같은 판단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루나가 울트를 따라 발레리우스를 향해 눈을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수리해 볼게요."

"..."

루나는 수리를 해본다고 했지 수리해서 돌려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용병들 말장난에 익숙한 울트는 발레리우스를 되찾긴 글러 먹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따지고 들지 않았다.

가만 보면 레이나 루나나 양아치짓 하는 건 비슷한 것 같다고, 울트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어찌됐든 이제 빠르게 귀환해야 했다.

메테오가 이 근방을 모조리 파괴했다고는 하나 지하 요새로부터 반경 20 km 밖에 발을 디디고 있던 실력 있는 악마 숭배자들은 간신히나마 목숨을 부지했을 수도 있었다.

그들과 마주치기 전에 금지된 숲이 존재했던 영역을 벗어나야 했다.

레이가 잘 움직이지 못하는 루나를 업었다.

바람 정령이 자욱한 분진을 밀어내 짧게나마 시야를 열어주고 호흡을 편하게 해주었다.

레이는 방향을 잡고 울트와 함께 움직이다가 얼마 가지 못해 눈살을 콱 찌푸렸다.

저벅

무언가의 기척이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사람의 기척이라기엔 기이했다.

레이는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세웠다가,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네놈이라 해도... 메테오에 직격당한 것 같은데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지?"

여섯 쌍의 눈을 가졌었던 마족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섯 쌍의 눈 중 다섯 쌍이 사라졌고 두 개 남은 눈동자조차 색이 탁했다.

마족의 몸뚱아리 또한 대부분 녹아내려 있었는데, 그 녹아내린 지점에 오래된 사체들이 융합돼 있었다.

"..."

마족은 잘못된 판단을 내렸었다.

루나가 마나를 완벽히 제어하지 못하고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메테오의 존재를 노출했을 때가 마족에겐 분명한 기회였다.

돌이켜보면 훨씬 더 좋은 판단을 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족은 마지막까지 '합일'을 향한 광기와 집착을 버리지 못했고, 또한 메테오의 존재를 의심하다 지하 요새 안에서 메테오에 직격당했다.

최후의 순간.

마족은 결국 스스로를 뼈대 삼아 오래된 과거의 사체들과 합일을 이루었다.

허나 그것은 제대로 된 합일이 아니었다.

마족이 이룬 합일의 결과물은 그저 광기의 부산물이자 움직이는 사체의 덩어리였을 뿐이었다.

이미 이성은 사라졌고 증오에 가까운 감정만이 사체 덩어리에 남아 레이의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레이가 짧게 혀를 찼다.

저건 더 이상 로드 급의 무위조차 보일 수 없는 살덩이였으나, 악신의 권능만큼은 끔찍한 농도로 압축되어 있었다.

컨디션이 좋을 때도 아슬아슬한데, 현 상황에서 상대하기는 난도가 매우 빡빡했다.

레이가 루나를 내려놓으며 울트를 돌아보았다.

"가디 자작님? 전투 가능하십니까?"

"...방금 기절하려던 참이었는데."

진담이었다.

기절하면 바람 정령이든 레이든 그래도 버리진 않고 알아서 업고 가주지 않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울트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어쨌든 저 끔찍한 살덩이를 찢어 죽이긴 해야 했다.

울트는 레이가 던진 포션을 받아 속에 들이부으며 게네시스를 꺼내 들었다.

그때, 하늘이 크게 울렸다.

쿠우웅!!

하늘에서 푸른 빛이 요동치더니 지상으로 길게 뻗었다.

메테오로 인해 한 번 깨져나갔던 하늘은 균열이 회복되는 몇 시간 동안 강한 에너지 파동을 내뿜는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 파동은 멀리서 인식 가능한 강력한 신호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를 이용하면 하늘이 열렸던 상공과 가까운 지면에 게이트의 출구를 만들어낼 수도 있었는데, 물론 평범한 마법사들이 잔뜩 모인다고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하."

레이가 온몸의 감각을 날카롭게 세웠다가 이내 웃었다.

하늘에서 이어진 게이트 너머에서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갑주를 입은 기사가 가장 먼저 땅을 밟았다.

그를 시작으로 강대한 기세를 내뿜는 초인들이 진형을 갖춘 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청색 마탑주 이자벨 외 그의 휘하 고위 마법사 셋.

녹색 마탑주 그란델 외 그의 휘하 일반 마법사 열다섯.

황실 마탑에 소속된 고위 마법사 둘과 일반 마법사 스물.

현장 지휘권을 부여받은 다카우스 외 로얄 가드 셋.

황실 직속 기사단인 엘룬 기사단의 기사단장 샤흐니 외 휘하 기사단원 스물.

교단에서 정식으로 신분과 실력을 인정 받은 템플러 스물.

그리고 고위 귀족들로부터 긴급히 차출한 병력이 서른.

제국에서도 최정예로 분류되는 자들이 임시로 생성된 게이트를 넘어왔다.

그들 중 레이도 얼굴을 아는 자들이 있었다.

과거 스페라를 호위했던 셰이와 워프 게이트 전투 때 처음 만났던 딜리드 프리슬란이 그들 중에 있었다.

로얄 가드, 디카우스가 끔찍한 살덩이로 이루어진 마족을 확인하고 검을 뽑아들었다.

"황제 폐하의 명을 이행하라."

악마 숭배자들의 제거.

정보 수집을 위해 지하 도시로 진입했던 첩보대원 중 생존한 자의 신병 확보 및 보호.

둘 다 황제가 디카우스에게 내린 임무 중에 포함된 내용이었다.

다들 참 빨리도 오셨다고 중얼거린 레이가 마족으로부터 한발 물러서며 쿨하게 웃었다.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막타 정도는 양보해 드려야지."

흩날리는 분진 속에서 다시 마나가 요동쳤다.

소멸 (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