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01화 (201/446)

201화

알리모 왕국의 수도, 프루아.

프루아에 건설된 왕궁에서 알리모의 국왕 알폰소 4세가 은십자 기사단의 기사단장 길란트가 통신으로 전달한 보고를 읽고 있었다.

알폰소 4세는 골치가 아팠다.

악마 숭배자들의 공격이 걱정되어 두통이 오는 건 아니었다.

물론 알폰소 4세는 길란트가 보고한 내용 자체는 신뢰하고 있었다.

그 융통성 없는 기사가 무언가를 과장했으리라곤 상상이 가지 않았다.

허나 왕국은 금지된 숲의 악마 숭배자들과 은밀히 교류해온 기간이 너무 길었다.

교류가 오래 이어질수록 경계심은 무뎌졌고 욕심은 비대해졌다.

설마 그들이 주제 파악도 못 하고 금지된 숲 밖으로 얼굴을 내보이겠느냐는 안이함이 알폰소 4세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알폰소 4세에게 정말 껄끄러운 것은 제국이 개입하겠다는 부분이었다.

최근 제국은 수도 인근에서 마족이 출현한데다 황위 계승을 앞두고 있어 굉장히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지하 도시의 존재를 제국이 알게된 이상 매우 강경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제국이 과거부터 정복 전쟁에는 관심이 없었다지만 심각한 사안이 생기면 무력으로 게이트를 점거해서라도 병력을 파견해 문제를 해결할 힘과 의지가 있는 국가였다.

알폰소 4세는 길란트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애초에 금지된 숲에 그놈을 보내면 안 되었는데...'

길란트가 귀환하면 이번에야말로 한직으로 좌천시키리라.

속으로 되뇐 알폰소 4세가 제국을 어떻게 구워삶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왕궁을 둘러싼 결계가 미약하게 꿀렁이는 모습이 창문 너머에서 비쳤다.

갑자기 결계가 반응하자 살짝 놀란 알폰소 4세가 원인을 알기 위해 마법사를 호출했다.

*

알리모에도 마탑은 존재했다.

마물의 사체를 수급하기 쉬워 세력도 꽤 거대한 편이었다.

알리모 왕국은 마탑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왕궁 안에는 실력 있는 궁정 마법사도 다수 상주하고 있었다.

궁정 마법사들은 상상도 못했던 사태를 맞이하여 머리를 맞댔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역사 기록을 뒤져가며 나름대로의 분석을 더한 결과 그들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1시간 이내에 하늘을 여는 마법이 완성된다.

이 정신 나간 결론을 들은 알폰소 4세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내가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혹은 마법사들이 날 농락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전하!!!"

궁정 마법사 중 한 명이 알폰소 4세를 불렀다.

눈동자가 풀려있던 알폰소 4세가 그제야 간신히 초점을 되찾고 궁정 마법사에게 물었다.

"표, 표, 표적... 표적은 어디인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허나 궁정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습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가?!!"

알폰소 4세는 분노했지만 안 되는 안 되는 거였다.

각도를 조금만 뒤틀거나 시전자가 실수해도 충돌 지점이 몇 km쯤은 우습게 바뀌었다.

현 시점에서 마법이 떨어져 내릴 정확한 지점은 특정할 수 없었다.

허나, 만약 이게 알리모 왕국을 노린 적의 공격이라면.

최우선 표적이 무엇일지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게이트 혹은 왕국의 수도인 프루아.

그리고 그 둘은 가까운 거리에 붙어 있었다.

하늘이 열렸다면 둘 모두 동시에 파괴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만약 아니라면?

예컨대 알폰소 4세 같은 특정인을 표적 삼았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알폰소 4세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몸을 떨고 있는데 왕궁에 있던 고위 관리들이 들이닥쳤다.

"전하!!!"

왕의 집무실에 출입하기 위해선 거쳐야 하는 절차가 당연히 있었다.

허나 지금 절차 따위를 따졌다간 다 뒈질 판이었다.

실성하기 직전인 알폰소 4세에게 궁내부 장관인 라아드 백작이 소리쳤다.

"전하!! 제국에게 게이트를 열어달라 요청해야 합니다!! 열어주지 않는다 하면 다른 국가에 연락하시지요!!"

"...명안이로군!"

하늘이 열렸다고 해도 각도상 타격할 수 있는 범위엔 제한이 생긴다.

게이트를 통해 다른 국가로 피신하는 게 목숨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알폰소 4세는 곧장 제국에게 연락을 취해 게이트의 연결을 허가해달라고 애걸복걸했다.

포이보스는 쉽사리 알폰소 4세의 요청을 수락했다.

포이보스의 수락이 떨어진 즉시 왕궁에 있던 고위층들이 게이트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시간이 없었다.

괜히 미적거리다간 마법에 직격당할 수도 있었다.

만약 수도와 게이트까지의 거리가 조금이라도 멀었다면, 알폰소 4세는 기사에게 자신을 업고 달리라고 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시간적 여유가 조금이나마 있었기에 알폰소 4세는 직접 말을 몰아 게이트에 도착했다.

이런 식으로 피신하면 감내해야 할 손해가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알폰소를 비롯해 왕국의 고위 관리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허나 어쩔 수 없었다.

왕국의 수뇌부가 몰살 당하는 게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피신한 후 돌아와서 재정비를 하든가 해야 했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합리화였다.

어떤 대비나 명령도 없이 수뇌부가 사라져버리면 왕국의 남은 사람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몇몇 기사는 왕의 곁을 지키면서도 조용히 이빨을 갈았다.

츠즈즉!!

게이트가 가동 된다.

게이트는 성공적으로 가동해 제국에 있는 게이트와 통로를 연결했다.

알폰소 4세와 고위 관리들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살았구나...!!'

패닉에 빠져있다가 드디어 안도하게 된 알폰소 4세는 함성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알폰소를 따른 무리들 중 일부가 참담한 감정을 내비쳤지만, 알폰소 4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왕궁에서 피신한 알폰소 4세와 고위 관리들, 그리고 기사와 마법사들이 게이트를 넘었다.

"후..."

게이트를 넘어 제국에 도착한 알폰소 4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게이트를 수호하고 있던 제국의 병력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게이트를 지키는 병력이 존재하는 건 당연했지만 그들의 숫자와 기세가 알폰소 4세의 예상보다도 훨씬 거대했다.

'그 잠깐 사이에 제국은 이만한 병력을 게이트로 집결시켰단 말인가?'

아무리 상대가 제국이라도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알폰소 4세에게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제국의 넓은 아량을 베풀어주신 황제 폐하께 감사드리는 바오."

우선 황제를 칭송한 알폰소 4세는 뒤늦게 무게를 잡으며 게이트에서 대기하던 제국의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한참 인사를 나누던 중 노인 한 명이 알폰소 4세에게 접근했다.

제국의 귀족이 얼른 노인을 소개했다.

"에른스트 프리슬란 후작 각하이십니다."

"아...! 위명 높은 제국의 소드마스터를 이리 직접 만나게 되어 참으로 기쁘오."

에른스트가 알폰소 4세가 내민 손을 멀거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웃음이 나오십니까. 영토와 국민을 버리고 타국까지 파천하였으면서 넉살도 좋으십니다."

"...!"

알폰소 4세는 얼을 타다가 무안과 분노 때문에 뒤늦게 몸을 떨었다.

에른스트는 알폰소 4세를 그대로 지나친 후 게이트로 다가갔다.

제국 쪽에서 게이트를 열었던 마법사가 에른스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현재 게이트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게이트를 닫지 말고 통로를 유지하라."

"알겠습니다."

에른스트는 게이트 너머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웃는 모습이 꼴보기 싫어 알폰소 4세를 힐난했지만 그의 판단 자체가 틀렸다고 비난하긴 어려웠다.

하늘을 연 게 악마 숭배자들의 작품이라면 마법의 표적은 왕국의 게이트와 수도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제국도 알리모 왕국의 수도와 게이트의 붕괴를 가정하고 이후의 군사 작전을 수립하는 중이었다.

"남은 시간 동안 왕국의 게이트를 보호할 수단을 마련할 수 있나?"

게이트의 소실만 막아낸다면 군사 작전이 훨씬 수월해진다.

허나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그 마법에 직격당해 버틸 수 있는 요새는... 세계에서 황궁 하나 뿐일 겁니다."

사실 그조차도 확실치 않았다.

만약 게이트가 타격당한다면 더는 알리모에 빠른 시간 내에 추가 병력의 파견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해서도 안 되었다.

'하지만... 만약 적의 표적이 게이트가 아니라면...'

그때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에른스트가 미간을 좁혔다.

*

마물들이 지하 도시로 쏟아져 들어왔다.

마물들은 저들끼리 뒤섞여 몸이 뜯겨져 나가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레이와 울트는 계속해서 마물을 요격하다가, 숨을 돌리기 위해 지하 도시의 통로를 붕괴시켜 버렸다.

콰앙!!!

통로가 붕괴되며 잠시 적막이 찾아왔다.

허나 얼마 안 가 붕괴된 통로를 헤집거나 천장을 무너뜨리며 다시 마물과 악마 숭배자들이 공세를 시작했다.

그들 또한 필사적이었다.

레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울트를 돌아봤다.

"천장, 무너뜨립시다."

"...잠시만."

울트는 지하 도시에서 얻은 열쇠 형태의 아티펙트가 아직 자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지하도시가 대부분 박살이 나버려 기능이 정상 작동할지 의문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울트는 천장을 열으라는 신호를 시스템에 보냈다.

쿵!!!

기적적으로 시스템이 작동했다.

천장에 빗금이 가더니 그 사이로 빛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2000년 전엔 완전히 개방된 천장으로부터 드래곤이 활강해 도시에 착륙하곤 했을 터다.

허나 많은 세월이 지나며 천장 또한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삼분의 일쯤 열렸던 천장이 이내 자기 무게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어 무너져 내렸다.

콰앙!! 콰앙!!!

붕괴된 천장의 조각들이 지하도시에 차례대로 쏟아졌다.

지상에 있던 마물들은 추락해 죽었고 지하에 진입하던 마물들은 깔려 죽었다.

허나 마족과 흑마법사는 가벼운 피해만 입고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애초에 레이와 울트 또한 마족과 흑마법사가 이 정도 수에 당해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마물들의 수를 줄인 것만 해도 충분한 성과였다.

철컥!!

레이가 갑주를 완전히 뒤집어썼고 울트가 온몸을 검은 물결로 휘감았다.

조금, 앞으로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그렇게 스스로를 윽박지르며 자욱한 흙먼지 너머로 무기를 겨눈 순간.

쿠우웅!!!

굉음과 함께 돌풍이 일어나 흙먼지를 지하 도시 외곽으로 확 걷어냈다.

루나가 있던 지점에서 변화를 감지한 레이와 울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토록 위압을 발하며 찬란히 빛났던 빛의 기둥이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야 좀 숨쉬기가 편해졌다.

하지만 누구도 마음 편히 숨을 몰아쉬지 못했다.

레이도, 울트도, 악마 숭배자들도 극도의 긴장 속에서 감각을 날카롭게 세운 채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틱!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환청이 울렸다.

약속하기라도 한 것처럼 완전히 멈추어버린 전장 위에서.

모두가 고개를 들어 무너져 버린 천장 너머를 바라봤다.

그곳에 하늘이 있었다.

푸르렀던 하늘이... 깨져나가고 있었다.

거대한 손아귀가 할퀴고 지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푸른 조각이 산산이 깨져나가며 그 너머로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너머엔, 어린 날 풀밭에 누워 몇 시간이고 바라보았던 깨끗한 밤하늘을 닮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별빛이 그 너머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 풍경은 너무나 장엄하고 아름다워서... 모두가 말을 잃게 만들었다.

그 풍경은 저 멀리서도 보였다.

그 풍경이 보이는 곳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는 실성한듯 웃었다.

누군가는 주저앉아서 울었다.

누군가는 도망쳤고, 누군가는 숨었으며, 누군가는 그저 두 눈을 감았다.

어떤 아이들은 처음 보는 풍경을 보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두 손을 잡거나 땅에 이마를 맞대며 생애 다시 없을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부디."

별빛이 비치는 어두운 하늘의 한가운데서.

금발을 늘어뜨린 소녀의 환영이 지상을 내려보며 처연하게 웃었다.

"부디 너희들의 신에게 기도하렴."

거대한 불덩이가 푸른 하늘로 발을 디딘다.

"그 맹목적인 숭배가 얼마나 가치 없는 헌신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도록."

소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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