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로얄가드, 미하엘이 황궁의 복도를 급하게 걸었다.
거의 달리는 속도로 나아가던 미하엘은 끝에 가선 아예 질주하고 있었다.
현재 황제는 기력이 많이 쇠해 황태자인 포이보스가 국정을 대신 살피고 있었다.
그렇기에 미하엘도 최근 대부분의 업무 보고를 포이보스에게 하고 있었다.
허나 이번만은 사안의 중대함이 달랐다. 이번만은 황제에게 바로 보고가 올라가야 했다.
황제가 병상으로 활용하는 침소를 찾은 미하엘이 허가를 받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침소에선 포이보스가 병상에 누운 황제를 직접 돌보고 있었다.
미하엘은 곧장 한쪽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지금 여기까지 오기 위해 생략한 절차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
미하엘이 말을 하다 말고 덜컥 굳었다.
침소 안에 사람은 셋이었는데 호흡하는 소리는 두 사람 것밖에 없었다.
미하엘이 감히 허락도 없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봤다.
포이보스가 입을 열었다.
"방금... 편히 눈을 감으셨네."
"..."
미하엘은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다, 선황에게 예를 갖춰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이후 자리에서 일어선 미하엘이 포이보스를 향해 방향을 바꿔 다시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미하엘은 고개를 숙인 채 발언이 허락될 때까지 기다렸다.
포이보스가 미하엘에게 눈을 돌렸다.
아무리 중대한 사안이라도 당장은 물러섬직했다.
헌데도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굉장히 다급한 사안이라는 뜻이었다.
"무슨 일인가?"
"알리모에서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늘이 열렸다.
그것이 뜻하는 바를 이해한 포이보스가 자는 듯이 눈을 감고 있는 선황을 돌아봤다.
"...아버지께서 무엇을 근심하셨는지 알겠습니다."
선황의 장례를 미뤄야 할 만큼 중대한 사태가 황위를 계승하자마자 발생했다.
포이보스는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해내 보이겠습니다. 지켜봐주십시오, 아버지."
선황이 눈을 감고 나서야 아버지란 호칭을 입에 담을 수 있었던 포이보스가 침상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
황도 인근에 위치해있으며 워프게이트가 존재하는 도시 '에스터스'.
에른스트는 에스터스에 마련된 프리슬란 가문의 저택에서 홀로 제국의 신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검을 양도하고 떠났던 레이를 떠올린 에른스트가 심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레이에게 원래도 무모한 성향이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소수 인원으로 지하 도시에 찾아갔다가 연락이 끊길 줄은 예상 못 했다.
국외의 영토에서 발생한 일이니만큼 에른스트도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미련한 놈이..."
에른스트가 답답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도이아가 에른스트의 허가를 받고 집무실로 들어와 곧장 가지고 온 소식을 보고했다.
"선황께서 승천하셨습니다."
"..."
에른스트는 침묵한 채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안타까운 감정이 일었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동요할 사안은 아니었다.
허나 아도이아의 다음 보고는 에른스트조차 충격에 빠지게 하기 충분했다.
"황제 폐하께서 선황의 승천과 황위의 계승을 선포하길 잠시 미루라 명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더냐?"
"정보국이 보고한 내용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알리모에서 하늘이 열렸습니다."
에른스트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정확한 위치는?"
"금지된 숲 상공이라 파악되었다고 합니다."
에른스트가 탁자에 놓았던 손을 움켜쥐었다.
나무판 일부가 거칠게 으스러져 나왔다.
"레이,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에른스트가 저 먼 곳에 레이가 있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지만, 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아도이아가 첨언했다.
"황제 폐하께서 후작 님의 의견을 구하고자 하십니다. 마법사들이 통신을 준비해놓았습니다."
시간을 끌어도 되는 사안이 아니었다.
에른스트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서 마법사들이 대기하는 곳으로 향했다.
*
지하 2 km 아래의 지하 요새엔 흥분이 감돌고 있었다
지하 요새에 상주하던 악마 숭배자들은 오랜 기다림을 끝내고 침묵에서 깨어날 준비를 갖춰갔다.
지하 요새 가장 깊은 곳.
그곳에서 6쌍의 눈을 지닌 마족 또한 점멸하는 눈동자로 희열을 드러냈다.
합일이 이루어지는 즉시 움직일 것이다.
왕국은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하고 무너질 것이고, 멸망한 왕국의 영토는 파괴되고 오염되어 위대한 분의 권능이 넘쳐 흐르게 될 것이다.
이 계획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선 왕국의 핵심 고위층을 빠르게 타격해야 했다.
수뇌부를 몰살시킨 후 게이트를 확보하거나 파괴해 타국의 지원을 차단하면 그 누구도 왕국의 멸망을 막을 수 없었다.
이번 일이 끝나 알리모가 거대한 마경처럼 변질되면 제국이 막아내야 하는 전선이 훨씬 확대되게 된다.
또 다른 마경과 영토를 맞대게 된 제국은 극심한 소모를 감수해야만 했고 이는 결국 제국의 파멸로 이어질 것이다.
그 위대한 첫걸음이 지금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흠..."
마족의 귓가에 '은십자 기사단' 일부를 놓쳤다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전멸시켜 입을 막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크게 아쉬울 건 없었다.
마족은 알리모의 고위층이 얼마나 안이하고 방만한지 알고 있었다.
기사단이 귀환해 금지된 숲의 위험성을 설파한다고 한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하루 이틀만에 무언가를 방비할 리 없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그들은 살찐 돼지처럼 욕심을 부리다 도축될 것이다.
드드득!!
사방이 막혀있던 광장의 구석.
벽처럼 보였던 문이 옆으로 밀려나며 통로가 드러났다.
어두운 통로 속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이 걸어나왔다.
6쌍의 눈동자가 여인을 훑더니 가늘게 기울어졌다.
일피림.
그녀는 항상 그림자를 닮은 분신으로 활동했다.
그녀의 본체를 마족 또한 오랜만에 마주했다.
일피림은 분신을 잃으며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듯 안색이 매우 창백했다.
정말 구경하기 힘든 꼴이었기에 마족이 거친 목소리로 웃었다.
"병력을 모두 잃었더군. 함정에 빠졌나?"
"..."
일피림은 잠시 고민했다.
함정? 아니, 그건 함정에 빠졌다 따위의 변명이 통용될 전투가 아니었다.
단지 압도적인 힘과 재능에 찍혀 눌려 패배한 거다.
일피림이 본체로 직접 갔다 해도 그 전투에서 살아 돌아왔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그 마법사, 여기서 죽여야 됩니다."
"7서클... 아니면 8서클 수준의 마법사인가?"
"서클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상대는 고위 마법을 발현되기 직전까지 은폐했다.
그건 서클의 숫자와는 전혀 별개의... 상식 밖 재능의 산물이었다.
더군다나 일피림이 분신으로 마주했던 마법사의 외관은 아주 어렸다.
당연히 위장이라 생각했지만, 만약 아니라면.
얼마 못 가 로드 급 혹은 그 이상으로 범접하기 힘든 존재가 될 터다.
일리림의 강력한 주장에 마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포위망을 두텁게 하고 합일이 완료되는 즉시 그 마법사부터 추격해서 제거하리라.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고 마족이 밝히자 일피림은 잠시 마음을 놓았다.
그 찰나.
쿠웅-!
마나의 파동이 지하 요새를 훑고 지나갔다.
지하 요새의 악마 숭배자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었다.
파동의 형태를 보았을 때 파동이 발생한 진원지까지의 거리는 상당하다고 유추되었다.
헌데도 이만한 에너지가 파동의 형태로 전달되었다는 것에 흑마법사들이 당혹감을 느꼈다.
역산했을 때 진원지에서 발생한 마나의 파동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6쌍의 눈을 가진 마족 또한 당혹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파동이 전해진 방향은 일피림이 병력을 잃었던 지하 도시와 가까웠다.
츠즉!
마족이 외부에 나가 있는 자신의 종자와 시야를 공유했다.
눈동자 하나가 완전히 검게 물들며 바깥의 풍경을 마족에게 비추었다.
마족은 요동치는 대기와, 한 점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구름을 보았다.
마족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었다.
퍽!
얼마 못 가 시야를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다해 눈동자 하나가 터져나갔다.
마족은 남은 눈들을 감지도 못한 채 조금 전 보았던 풍경을 곱씹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기분 나쁜 기시감이 몰아쳤다.
"마녀...?"
수백 년 전.
악마숭배자들에게조차 '마녀'로 칭해지던 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이론만 간신히 정립되어 있던,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던 마법을 현실로 불러왔다.
여인은 그 마법을 종종 대요새 섬멸 마법이라 칭하고는 했다.
그건 명백한 기만이자 농락이었다.
그 마법은 도시 한 개를 넘어 국가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재앙이었다.
여인조차 전성기에 온갖 지원을 받은 끝에 단 두 번밖에 그 마법을 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단 두 번의 마법은, 당시의 악마숭배자들에게 가장 뼈아픈 타격을 입혔다.
그 끔찍한 날의 풍경이, 마족의 시야 너머로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불가능하다."
마족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 마법은 고작 몇 시간 만에 발현 가능한 마법이 결코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마법을 시전하려 했다면 진즉 들켰어야 했다.
그만한 대마법의 기척을 은폐하는 일 따위가 가능할 리 없었다.
과거에도, 여인이 그 마법을 시전하려 했을 때 여인을 저지하려던 악마숭배자들과 여인을 수호하려던 병력이 하루가 넘도록 혈전을 벌여야 했다.
그건 그런 마법이었다.
허나 방금 마족이 확인한 시야에선.
그 마법이 최종 단계에 진입하기 직전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불가능해..."
마족은 다시금 현실을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몇 시간 전 환영 너머에서 보았던, 증오에 잠겨 있던 그 섬뜩한 은색 눈동자가 뒤늦게 마족의 뇌리를 헤집었다.
마족은 그때 눈동자의 주인을 비웃었었다.
이곳을 찾아오면 성대하게 환영해주겠다고 상대를 기만했다.
이제 마족은 웃지 못했다.
마족이 거친 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빛의 기둥 속에서 고대의 파멸이 합일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지하 요새 시설 전체가 합일을 돕기 위해 개조되어 있었기에 지금 사체를 옮기는 건 불가능했다.
"죽여...!"
마족이 열한 개의 눈동자를 부릅뜨며 허공을 향해 괴성을 질렀다.
"죽여!!!! 죽여서 막아!!!!!"
마족의 분노와 의지, 그리고 새어나오는 두려움이 수하들에게 전해졌다.
레이와 울트가 있는 지하 도시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마물들이 괴성을 질렀다.
흉측한 마물들과 그들을 중간에서 이끄는 악마 숭배자들이 죽어있는 마물들의 사체를 짓밟으며 지하 도시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납게 울부짖었지만 그들 또한 두려움에 취해있었다.
기세가 일변한 적들을 바라보며 레이와 울트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루나가 마법을 발현하는 걸 방해받게 둘 수는 없었다.
트드득!!
레이와 울트가 지닌 모든 무장이 동시에 전개됐다.
루나가 약속했던 '3시간'이 끝나기까지 이제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는 않았다.
레이와 울트가 서로를 바라보더니 주먹을 한 번 맞부딪치곤 병기를 손에 쥐었다.
이게 이곳에서 수행해야할 둘의 마지막 임무였다.
기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