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198화 (198/446)

198화

레이는 홀로그램으로 확인한 정보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2 km 깊이의 암석층이라면 레이가 기억하는 전생의 병기로도 뚫어낼 수 없었다.

벙커버스터로는 씨알도 안 먹혔고 수소 폭탄을 터트려도 그 깊이면 유효 타격이 불가능했다.

애초에 지구에 존재했던 강대국의 국가 정상들이 핵 전쟁을 대비해서 건설하는 핵 방공호도 지하 2 km까지 파고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2천 년 전 드래곤이야 음습한 욕구를 풀기 위해 땅을 파헤쳐놨는지 모르겠지만 레이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지하 2 km의 도시... 아니, 요새를 지상에서 타격할 방법은 전무해.'

마법으로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대마법을 동시에 난사해도 무른 땅도 아닌 2 km 암석층은 반의반도 못 뚫었다.

지진을 일으킨다 알려진 마법도 고작해야 수십 미터의 지층을 흔드는 게 다였다.

오랜 시간을 들여 땅을 파는 작업을 하는 것도 금지된 숲에선 불가능했다.

지하 2 km 아래에 있는 요새를 공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통로를 찾아 돌입하는 정공법뿐이었다.

"..."

레이는 홀로그램을 통해 지하 요새와 연결된 통로 몇 개를 확인했다.

허나 2 km 지하로 향하는 통로인 만큼 그 길이가 결코 짧지 않았다.

저 통로들이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는지, 또한 유지되고 있다면 얼마나 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병력이 많아도 저길 기어들어가는 건 미친 짓이었다.

레이가 재차 드래곤을 향한 욕설을 입에 담으려던 순간.

홀로그램이 번쩍이더니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그게 탑의 중앙 시스템이 보여주는 일종의 '환영'이라는 걸 깨달은 레이가 검 자루를 잡은 손아귀에서 힘을 뺐다.

이리저리 풍경이 뒤틀린 끝에.

레이는 어느새 어두운 도시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하늘은 막혀 있었고 악마 숭배자들은 최종 완성 단계에 이른 끔찍한 키메라들을 시설로 운반하고 있었다.

도시 내부의 설비 수준을 보았을 때 물자는 충분한 듯 보였다.

다시 풍경이 일그러졌다.

탑의 중앙 시스템은 레이를 점점 더 도시의 깊숙한 곳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도시 안에 얼마나 많은 악의가 넘실거리고 있는지...

레이는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마침내 레이는 도시의 가장 심부에 닿았다.

빛의 기둥 속에서 여러 개의 사체가 서로 결합되어 하나가 되어가는 모습이 비쳤다.

대체 무엇의 사체를 뒤섞는 것일까.

사도? 마족? 혹은 다른 무언가?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뒤섞여 가는 저 사체의 덩어리가 내재하고 있는 끔찍한 위험성이었다.

비록 환영 너머였지만 레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완성되기 전에 제거해야 된다.'

저걸 방치해서는 안 됐다.

수많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때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저 사체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눈을 떴을 때.

대체 얼마나 거대한 규모의 참사가 발생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대체 어떻게 해야 저곳에 닿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레이가 되뇌는 찰나.

환영 너머에서 빛의 기둥을 지키고 있던 강대한 존재가 레이의 시선을 인지했다.

후욱!!

6쌍의 눈을 지닌 악신의 대변자가 얇은 장막을 사이에 두고 레이를 마주 봤다.

타락한 존재 중에서도 가장 드높은 위치에 오른 마족이 레이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환희를 머금었다.

그와 동시에 서로의 연결이 끊어졌다.

파직!!!!

"..."

허공을 응시하던 여섯 쌍의 눈동자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족은 이곳을 훔쳐보던 시선에서 읽어냈던 '증오의 감정'을 곱씹었다.

증오가 담겨 있던 그 시선은, 마족에게조차 일순 섬뜩함을 느끼게 할 만큼 강렬한 의지를 품고 있었다.

이내, 마족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이곳을 찾아오려 하는가?"

마족이 빛의 기둥을 돌아봤다.

"찾아온다면 기꺼이 환영해주겠다."

합일이 완료되기까지 이제 하루도 남지 않았다.

소드마스터가 군단을 이끌고 찾아온다 해도 하루 만에 여기까지 도달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합일을 마친 존재가 눈을 뜬다면, 이곳에선 소드마스터라 해도 목을 내놓아야 했다.

더는 변수 따위는 존재치 않았다.

"합일을 앞두고 너희가 나의 마지막 유흥이 되어주는구나. 어떤 선택을 내릴지 참으로 궁금해."

이곳을 훔쳐본 자들이 과연 자만과 공명심에 취해 지옥을 향해 스스로 걸어들어올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후일을 도모한다는 변명 아래 겁쟁이처럼 도망칠 것인가.

설령 도망가고자 한다 해도 빠르게 결정할 필요가 있었다.

넘쳐나는 물량의 마물과 그들을 제어하는 악마 숭배자들이 그들이 머물고 있는 지하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으니까.

당장 도망쳐도 포위망을 뚫어내기가 아주 쉽지는 않을 터다.

"열심히 도망쳐 보거라. 그 또한 부질없는 발버둥일 테니."

간신히 도망쳐 금지된 숲을 벗어났을 때쯤엔.

악신의 화신체라 불릴 만한 초월적인 권능을 지닌 존재가 눈을 뜰 것이다.

"이제 고대의 파멸이 강림한다."

마족의 선언과 함께 타락한 자들의 희열이 깃든 메아리가 깊고 깊은 지하를 요동쳤다.

어둠 속에 머물던 악의가 태양이 떠오르는 대지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

"레이!!!"

울트는 가명을 부르는 것도 잊고 레이의 본명을 불렀다.

그만큼이나 울트는 당황해 있었다.

레이 또한 울트의 실수를 지적할 만한 정신이 없었다.

탑의 중앙 시스템은 방금 모두에게 같은 환영을 보여주었다.

울트가 재차 소리쳤다.

"벗어나야 해, 지금 당장!"

"아, 네... 그래야죠."

지금은 발을 빼는 게 맞았다.

현재 레이 일행의 전력으로 2 km 아래의 지하 요새를 공략하는 건 불가능했다.

체력도 한계였고 애초에 세 명이서 공략 가능한 요새가 아니었다.

왕국과 제국이 대규모 병력이라도 파견하지 않는 이상 그곳을 공략하는 건 불가능했다.

'목숨 걸고 들어가야 된다 해도... 루나를 동행시킬 수는 없어.'

거기 들어가서 온갖 행운이 겹쳐 그 사체 덩어리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탈출은 불가능했다.

로드 급 마족을 비롯해 수많은 악마 숭배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트드득!!

지하 도시의 천장이 울렸다.

다수의 무리들이 지하 도시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알아챈 레이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 타이밍에 몰려올 놈들이라면 마물이나 악마 숭배자밖에 없었다.

"은십자 기사단은 잘 탈출했을지 모르겠군..."

말 끝을 흐린 레이가 무장을 점검했다.

천장을 무너뜨려 혼란을 일으키고 그 틈을 노려 포위망을 뚫고 금지된 숲을 벗어나야 했다.

그 뒤에 에른스트에게 연락해 지하 요새에 관한 위험성과 공략 필요성을 설파해야 했다.

설득에 실패한다면, 글쎄.

일단 이곳을 탈출하는 게 우선이었다.

"자, 그럼 빠르게..."

"레이, 기다려요."

루나가 레이의 팔목을 잡았다.

"...내가 길을 열어줄게요. 그러니까 3시간만 기다려줘요. 이곳을... 지켜줘요."

루나는 레이의 답변을 듣지도 않은 채 울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발레리우스, 내게 줘요. 필요해요."

"..."

울트에게는 당혹스럽게 느껴지는 요구였다.

아티펙트를 빌려주는 건 둘째 치고, 여기서 3시간을 죽치고 있다간 포위망만 더 두터워지는 결과를 가져올 터다.

루나가 3시간 동안 얼마나 대단한 마법을 준비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럴 바에야 당장 뚫고 나가는 게 더 현명해 보였다.

레이 또한 울트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흔들림 없이 고요히 빛나는 은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레이는 루나를 향해 웃음을 머금어줄 수밖에 없었다.

루나가 고집을 부릴 땐 언제나 합당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루나, 3시간 동안 이곳을 방위해주면 되는 거야?"

"...네."

"알겠어. 우리에게 맡겨."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울트를 돌아봤다.

울트는 둘의 의견을 도저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었으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지금 울트는 갑과 을 중 명백히 을의 처지였다.

울트가 하는 수 없이 발레리우스를 루나에게 양도하며 당부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바로 천장 무너뜨리고 도망가자고."

세상 찝찝한 표정을 한 울트의 등을 레이가 가볍게 쳐주며 웃었다.

"표정 풀어요. 루나가 멋진 마법을 보여줄 거니까."

"너희 실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됐다."

울트가 게네시스를 다시 손에 쥐며 레이와 같이 탑의 출입구로 향했다.

루나의 정령이 전부 소환되어 울트와 레이의 뒤를 따랐다.

루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프텔과 연결된 팔찌를 매만지다, 발을 디디고 있는 탑의 내부에 결계를 겹겹이 전개했다.

그 전부가 마나의 파장을 안쪽으로 가두고 은폐시키는 용도의 결계였다.

우웅-!

루나가 시스템 키를 손에 쥐고 홀로그램을 전개해 지하 도시의 동력원을 확인했다.

지하 도시는 본래 가까이 맞닿아 있는 영맥의 마나를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지금은 비상 동력원인 드래곤 하트로 동력을 공급하고 있었다.

마나의 흐름을 제어하는 장치의 존재를 전부 파악한 루나가 마법을 발현했다.

쿠우우웅-!!

땅에 균열이 일어남과 동시에 지하 도시의 핵심적인 동력 제어 장치가 파괴됐다.

영맥에 얌전히 고여있던 마나가 방금의 충격으로 균형을 잃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때 루나가 역류하는 마나의 방향을 드래곤 하트의 조각이 위치한 공간으로 뒤틀었다.

화악!!

드래곤 하트의 조각에 마나의 기류가 쏟아져 내렸다.

직후, 영맥의 마나에 반응한 드래곤 하트의 조각이 마찬가지로 쌓여 있던 마나를 분출하기 시작됐다.

콰가가각!!!!

마나는 휘몰아치는데 그걸 통제할 장치가 박살 나 있었다.

영맥과 드래곤 하트의 조각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마나가 결국 탑의 중앙 기둥을 무너뜨리며 솟구쳤다.

그 순간 루나의 서클이 완전히 개방됐다.

어린 시절부터 오랜 시간 숨기고 살아야만 했던 서클이 빛을 토해내며 마나를 끌어들였다.

솟구치던 마나의 기류가 회전하는 서클에 이끌려 꼬리를 물고 원을 그렸다.

끄드드드드득!!!

처음엔 흐릿한 안개처럼 흐르던 마나의 기류가 이내 방울지기 시작했다.

순수한 마나로 이루어진 짙푸른 액체가 루나의 주변을 감싸며 세차게 회전했다.

이미 인간이 제어 가능한 한도가 넘었음에도 폭주한 영맥과 드래곤 하트의 마나가 루나의 서클에 이끌려 계속해서 응집됐다.

까드드득!!!

루나의 서클조차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서로를 긁어내며 쇳소리를 냈다.

서클이 해소 못 한 반동이 루나의 육체를 흔들었다.

은색 눈동자를 감싸고 있던 실핏줄이 터져나가며 눈가에 혈액이 고였다가 흘러내렸다.

이대로 가다 마나를 통제하는 데 실패하면 자폭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루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채 마나를 더욱 끌어들였다.

철컥!!

울트의 아티펙트, 발레리우스가 개방된다.

공간 계열 마법을 안정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발레리우스를 향해 마나의 물결이 들이쳤다.

쏟아져 들어오는 마나의 물결을 버티지 못한 발레리우스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으나 루나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루나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한 명의 안위였다.

"...레이."

루나는 레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지닌 비정상적인 희생정신과 강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레이라면, 지금 당장은 물러서더라도 필요에 따라 언제나 지하 깊숙이 존재하는 적의 소굴로 기어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왕국의 멸망을 막고 제국과 제국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면.

레이는 그리할 인간이었다.

또한 레이는, 사태가 심각해질수록 그럴듯한 변명을 대며 루나를 떼어놓으려 할 게 뻔했다.

레이에게 아직 루나는 지켜야만 하는 존재였으니까.

주륵

눈가에서 흘러내린 피눈물이 휘몰아치는 마나의 물결과 뒤섞였다.

아무리 루나라 해도 고작 네 개의 서클로 이만한 마나를 다루는 건 과한 욕심이었다.

신체가 반동을 버티지 못하고 내부에서부터 망가지며 루나의 입가에서 피가 줄줄 새어나왔다.

그럼에도 루나는 개의치 않았다.

"...걱정 마요."

루나는, 레이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의 선택, 그의 바람, 그의 의지를 존중하고 사랑했다.

레이가 벨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루나는 레이라는 한 사람을 오롯이 사랑했다.

그렇기에 루나는 레이를 막아서려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루나는...

"내가 할 거야."

그를 해치려 하고, 그를 위협하고, 그에게 고통스러운 선택을 강요하는 모든 악한 것들을.

"내가, 죽일 거야."

아프텔이 매개가 되어 리실로테 레코드와 오벨리스크 시스템을 불러온다.

루나의 시야에 칠흑이 내려앉았다가, 이내 수많은 별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볓빛 사이로 금발을 늘어뜨린 한 소녀의 환영이 나타났다.

소녀의 환영은, 너무나도 천진난만하고 찬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루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 하늘을 열자.]

파멸의 힘이 개화한다.

기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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