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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96화 (196/446)

196화

빗줄기가 그쳤다.

빗줄기가 휩쓸고 간 지대는 더욱 지하로 주저앉아 용암이 흐르는 호수처럼 변해 있었다.

레이가 용암 호수를 향해 걸어가다 이내 발걸음을 멈췄다.

들끓는 용암이 내뿜는 열기가 갑주를 뚫고 들어와 피부를 데우기 시작했다.

레이가 마나를 흘려 주변의 열기를 중화시키며 중얼거렸다.

"상식을 아예 벗어나 있군..."

루나가 발현한 마법이 어지간한 수준이었다면.

레이는 '이 맛에 가챠 돌린다' 따위의 농담을 지껄이며 혼자서 킥킥거렸을지도 몰랐다.

허나 루나의 마법이 초래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농담도 잘 나오지 않았다.

'천재...라는 수식도 부적절하지.'

레이에게 있어 천재란 단어의 기준은 '초월의 경지에 닿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가'였다.

그러한 기준으로 보았을 때 요하나와 스페라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둘 모두 '정점'이라 칭해지는 경지에 반드시 닿을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이었다.

허나 천재 중의 천재인 요하나와 스페라라고 해도 정점을 넘보려면 넉넉히 20년은 잡아야 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천재라 해도 수많은 벽을 깨부수고 초월의 경지에 닿기 위해선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했다.

레이가 계속해서 스스로를 혹사하는 이유 중엔 자신의 삶이 다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목적 또한 포함하고 있었다.

악마를 숭배하는 세력의 수작을 미리 좌절시키면 자연히 그들의 궐기도 늦춰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결국 레이에게 있어 고아 수집이란...

당장 옆에서 써먹을 인재의 확보보다 자신이 죽고 난 다음에 벨라가 살아갈 세계를 해피엔딩으로 이끌어줄 영웅을 찾는 여정에 가까웠다.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루나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아예 격이 달랐다.

그녀만은 일반적인 상식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레이는 의문이었다.

과연 루나에 필적하는 재능을 지녔던 마법사가 인류 역사에 단 한 번이라도 존재했을까?

새삼스레 로필렌이 건넸던 경고가 머릿속에 상기됐다.

로필렌은 전성기의 하르시아조차 막아내지 못할 괴물을 당신이 키우고 있다고 경고했었다.

옳은 말이었다.

시간이 흘러 모든 잠재력을 개화한 루나는, 설령 신화 속 영웅이 돌아온다 해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존재가 될 터다.

하지만 레이는, 마법을 쏟아내고 지면에 착지하는 루나를 향해 티 없이 맑은 웃음을 머금어주었다.

언뜻 차가워 보이는 루나였지만 그 안에 따뜻한 내면을 지니고 있음을 레이는 모르지 않았다.

설령 레이가 없다 해도 루나의 마음을 지탱해줄 인연들이 세상엔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었다. 레이는 루나를 믿었다.

"고마워. 혼자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레이가 최대한 가벼운 목소리로 루나에게 고마움을 표현한 후 지하 도시에 생긴 용암 호수를 돌아봤다.

'...그림자처럼 생겨서 흐물거리던 놈, 본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생긴게 워낙 기괴해서 레이는 굳이 해독 권능까지 활용해 그림자를 들여다봤었다.

그림자의 정체는 일종의 분신체였다.

물론 실체가 전혀 없는 환영은 아니었고, 분신이 소멸하며 본체 또한 강한 타격을 입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완전히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게 좀 찝찝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집착할 때가 아니었다.

이제 울트를 찾아야 했다.

"룬, 호프의 기척이 느껴졌다는 게 저쪽 방향 맞지?"

"...네, 맞아요."

"그럼 가보자."

레이가 땅을 박찼다.

적의 주력 병력이 소멸했지만 마냥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지하 도시에 퍼져 있던 마물의 울음소리가 여전히 사방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악마 숭배자들로 이루어진 추가 병력 또한 언제 더 들이닥칠지 몰랐다.

레이가 울트의 기척이 감지됐다는 방향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다 피식 웃었다.

"한 놈 남아 있었네."

후방에서 지휘권을 행사하던, 늑대를 닮은 대가리를 지닌 마족이 한 놈 살아남아 있었다.

상당히 강력한 개체였지만 결코 레이의 상대는 아니었다.

마족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허나 강제력에 묶여 도주하지도 못하고 제자리서 움찔거리고 있었다.

레이는 달려나가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검강을 발현했다.

루나 또한 마법을 발현하려 했지만 레이에게 제지당했다.

"룬, 힘 좀 아끼고 있어."

만약 지하 도시를 급히 탈출하게 되면 반드시 루나의 도움이 필요했다.

루나가 마족 한두 놈 처리하기 위해 나서기보다 힘을 보존하고 있는 게 전술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레이의 의도를 이해한 루나가 인상을 조금 찌푸리면서도 마법을 거둬들였다.

늑대를 닮은 대가리를 지닌 마족이 도주하기는 글렀다는 걸 깨닫고 공포를 떨치기 위해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가 마족을 절단내기 위해 더욱 빠르게 가속하려는 순간.

공기가 짓눌리는 것만 같은 압박감이 저 멀리서 급격히 다가왔다.

레이의 두 눈이 마족의 어깨너머를 향했다.

빛살이 다가온다.

빛살이 지나가는 궤적을 따라 땅이 움푹 파이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빛살의 속도가 음속을 상회하고 있었기에 아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족이 레이의 시선을 쫓다가 뒤를 돌아보고 경악했다.

"?!"

마족이 뒤늦게 빛살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회피를 시도하려 했다.

그 찰나 동력이 회복된 황금색 창이 쏘아져 마족의 퇴로를 막아섰다.

앞뒤로 투사체가 다가오자 당황한 마족이 어설프게 몸을 뒤틀다 빛살에 적중 당해 머리가 터져나갔다.

쩌엉!!

뒤늦게 소닉붐이 레이의 귓가를 울렸다.

빛살은 마물의 머리를 부수고도 힘을 잃지 않고 나아가 지하 도시의 벽면에 틀어박혔다.

지하 도시의 벽면 일부가 붕괴되는 소리를 들으며 레이가 빛살이 최초에 번쩍였던 곳을 바라봤다.

검은 물결을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의 형체가 그곳에서 나타나 다가오고 있었다.

츠즉!

이내 검은 물결이 벗겨지며 고생깨나 한 중년 남성의 얼굴이 드러났다.

색이 바래가는 검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지닌 중년 남성을 보며, 레이가 썩 떫은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네가 울트 가디인가?"

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제국의 황제 폐하께 적법하게 자작위의 계승을 허가받은 울트 가디요. 그대는 제국에서 왔소?"

울트의 목소리는 모래를 한 움큼 삼킨 것처럼 거칠었다.

겉으로 드러난 팔목 또한 겨울철 나뭇가지처럼 바싹 말라 금방이라도 부러져 나갈 것 같았다.

참 처량한 꼴을 하고 있는 울트를 향해.

레이가 정말 오래 참았던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야이 씹새끼야."

*

레이는 루나 앞인지라 웬만하면 욕설을 자제하려 했다.

허나 막상 울트를 대면하니 속에서 들끓는 감정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시발 꼭 내가 너 하나 구하자고 이 개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기어들어오게 만들어야 했냐? 응?!"

"..."

"좀 시발 실력이 안되면 몸이라도 잘 사리던가? 대가리부터 들이밀었다가 대가리가 끼어가지고 팔다리 바둥거리고 있으면 그 뒤처리는 누가 하는데? 내가 해? 내가 해야 돼? 내가 니 엄마냐?"

"..."

레이한테 시원하게 욕을 처먹던 울트가 혹시나 해서 물었다.

"설마... 당신이 필립스 백작께서 말씀하신 '레이'인가?"

싸가지가 없긴 한데 불세출의 재능을 타고난 천재가 있다.

레이에 관한 설명을 필립스 백작의 편지를 통해 몇 번이나 들었던 울트였다.

물론 상식적으로 눈앞에서 쌍욕을 내뱉는 상대가 레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울트가 아는 '레이'는 이제 열아홉 살 소년이었고, 눈앞의 기사는 수많은 악마 숭배자를 양단한 초인이었다.

울트는 이제 막 공간의 틈새에서 빠져나온 탓에 정신이 없어 잠깐 헛소리를 했을 뿐이었다.

허나 놀랍게도 그게 정답이었다.

"아이고 시발 또 이럴 때는 눈치가 존나 좋으시네요. 어, 그래요, 내가 바로 그 레이입니다. 씹새끼님께서 그리 애지중지하던 티티를 들고 튀던 로커스트를 족쳐준 바로 그 레이입니다. 근데 은혜를 이렇게 뒷구멍으로 갚으시면 제가 참 곤란하죠."

"..."

울트는 혼란스러웠지만 적진 한복판에서 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네가... 대체 어떻게 날 찾아서 여기까지..."

"시발, 그러게 말입니다."

문장 하나마다 시발을 빼놓지 않던 레이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을 이었다.

"필립스 백작님께서 자작님이 실종됐다고 제게 연락을 했습니다. 저는 프리슬란 후작님께 부탁해 제국 첩보대의 도움을 받아 자작님을 찾기 위해 여기까지 왔고요."

역시나 쉽게 믿기 힘들었지만 지금 그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물의 울음 소리가 사방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

레이가 가볍게 박수를 쳐 분위기를 환기한 후 본제를 꺼냈다.

"가디 자작님, 저는 가디 자작님의 생사를 확인하고 살아있다면 구출하기 위해 알리모까지 왔습니다. 근데 숲만 좀 뒤지고 끝날 줄 알았던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더군요."

고개를 돌려 지하도시를 둘러본 레이가 울트를 마주 봤다.

"이제 탈출해볼까 하는데, 제가 알아야 하는 정보가 있다면 축약해서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

울트는 레이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날 구하러 여기까지 오셨다고요? 허허 감사합니다- 라고 웃고 말기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허나 어쨌든 눈앞의 남자는 지하 도시에 돌입해 수많은 마족과 마물을 베어낸 초인이었다.

당장은 협력해야 했다.

"...나는 아티펙트를 이용해 이 지하도시에 진입했다."

"발레리우스가 남긴 최후의 역작 말하는 겁니까?"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고모한테 들었죠. 세리아 님요."

울트는 그제야 레이가 진짜 '레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가 울트의 곁에 떠 있는 검은 기둥 형태의 아티펙트를 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게 그거예요? '블링크'가 가능하다면서요?"

블링크.

단거리 순간이동을 일컬었다.

이 세계엔 블링크란 마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짧은 거리라도 공간을 잡아 뜯어 몸을 쉭쉭 이동시킨다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허나 발레리우스는 말년에 문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어 최후의 역작을 완성시키는데 성공했다.

아티펙트의 이름은, 스스로의 이름을 딴 '발레리우스'.

울트는 입구를 찾지 못했음에도 이 아티펙트를 활용해 지하 도시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레이가 발레리우스까지 알고 있자 울트도 허심탄회하게 입을 열었다.

"지하 도시에 진입한 이후, 이 지하 도시를 건설하는데 참여한 드래곤이 남긴 숨겨진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하 도시에 큰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해 드래곤이 남긴 메시지.

울트가 드래곤의 메시지를 발견한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울트가 소유한 아트펙트인 발레리우스의 동력원은 순도 높은 드래곤하트였다.

울트가 지하 도시에 진입하자, 드래곤의 숨겨진 메시지가 동족의 심장과 공명해 울트를 인도했었다.

울트는 드래곤이 남긴 안배를 통해 여러 정보와 물자를 얻을 수 있었다.

울트는 그중에 당장 필요한 것만 간추려 설명했다.

"이 도시의 메인 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울트가 품에서 푸르게 빛나는 열쇠 형태의 아티펙트를 꺼내 들었다.

"도시 중앙에 위치한 탑으로 가서 이걸 사용하면 과거에 지하 도시를 통제하던 시스템을 우리가 직접 제어할 수 있을 거야."

레이가 도시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탑을 돌아보았다.

"시스템을 직접 제어할 수 있게 되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뭐죠?"

"이 도시, 천장이 열린다."

"...?"

레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했다.

근데 가만 생각하니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아니었다.

드래곤이 건설한 도시 아니던가.

굳이 승강기를 타고 왔다갔다 하려면 드래곤도 굉장히 귀찮았을 터다.

만약 지하 도시의 뚜껑이 열렸다면 훨훨 날아서 왔다갔다하면 됐다.

"어... 그러니까 천장을 열고 탈출하자?"

"아니, 2천 년이 다 된 시설이야. 천장이 제대로 열릴 리가 없지. 그 기능을 억지로 작동시키면 천장이 통째로 무너져 내릴 거야. 폭삭 주저앉을 거다."

"아, 그건 참 마음에 드네요."

악마 숭배자가 활용하는 지하 시설을 통째로 붕괴시킬 수 있단 의미였다.

아직 지하 도시를 돌아다니는 마물이나 악마 숭배자들 또한 무사하지는 못할 터다.

거기에 더해 지하 도시를 완전히 붕괴시킨 후 도망치면 승강기를 통해 정직하게 빠져나갈 때보다 적들의 추적도 어느 정도 방비할 수 있었다.

레이야 루나가 있으니 돌덩이에 파묻힌다 해도 고생할 걱정은 없었다.

다만.

울트가 지하 도시를 붕괴시킬 목적만 가지고 지금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었다.

"컨트롤 룸으로 들어가면 고대의 국가가 금지된 숲 아래에 건설한 지하 도시와 관련된 정보도 확인 가능할 거야."

레이는 울트의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지하 도시가 과연 여기 한 곳뿐인가.

정황상 그럴 리가 없었다.

지하 도시가 여러 곳 존재한다면 그 위치는 반드시 파악해두어야 했다.

그래야만 추후 왕국을 쪼든 제국을 쪼든 해서 악마 숭배자들의 진짜 본거지를 토벌하는 게 가능했다.

이 지하 도시의 컨트롤 룸이라면 인근에 존재하는 다른 지하 도시의 정보 또한 존재할 게 분명했다.

"뭐, 좋아요. 도시 중앙의 탑으로 갑시다. 움직일 수 있죠?"

울트가 잠시 몸을 점검했다.

온몸이 말라 죽어가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뚱이가 맛이 간 거야 울트에게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파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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