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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93화 (193/446)

193화

모습을 드러낸 흑마법사와 마족은 결코 최상위 클래스의 강자가 아니었다.

만약 이곳이 리오슈코였다면 은십자 기사단은 손쉽게 두 악마 숭배자를 척살했을 것이다.

허나 이곳은 금지된 숲의 심부였으며, 악마 숭배자에게 있어 악신의 권능이 서린 축복 받은 대지 위였다.

본래라면 이 타락한 땅에 발 자체를 들이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길란트는 기사단을 이끌고 지하 도시를 찾아왔다.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추가 전력이 합류하기 전에, 흑마법사와 마족을 최대한 빠르게 제거해야 했다.

뜨드득...!

길란트가 착용한 갑주가 진동하더니 일시에 갑주의 모든 동력이 추력으로 전환됐다.

길란트가 굉음과 함께 급가속하며 마족에게 쏘아졌다.

은십자 기사단원들 중 누구도 길란트의 속도를 쫓지 못했다.

레이만이 유일하게 길란트와 함께 마족과 충돌했다.

콰가각!!

길란트와 레이가 마족과의 전투에 돌입함과 동시에 남은 인원이 흑마법사를 제거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마법과 검기가 뒤섞이며 섬광이 터져 나와 지하도시를 밝혔다.

그드득!

마족은 길란트의 검격을 몇 번 흘려낸 후 레이를 먼저 노렸다.

아무리 센스가 좋은 배틀메이지라 해도 결국은 마법사다.

육탄전을 주력으로 삼는 마족에게 이리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한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였다.

마족은 그리 생각하며 조소를 머금고 주먹을 내리찍었다.

섬광처럼 휘둘러진 육중한 주먹이 레이의 스태프를 바스러뜨리며 전진했다.

빠드득!!

나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스태프가 절단 났으나 레이는 어느샌가 한 발 더 전진해 마족의 품을 파고들고 있었다.

레이의 손에는 스태프로부터 분리된 시푸른 칼날이 쥐어져 있었다.

푸욱!!!

칼날이 마족의 눈동자를 파고든다.

레이가 칼날로 마족의 눈동자를 헤집으며 냉기를 불어넣었다.

삽시간에 부피를 불린 붉은 얼음조각들이 마족의 눈구멍에서 우후죽순 솟아났다.

마족은 그 꼴이 되고도 죽지 않았다.

도리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레이에게 다시 한 번 공격을 가하려 했다.

허나 길란트가 훨씬 빨랐다.

카가각!!!

검강에 휩싸인 검날이 마족의 두꺼운 팔을 헤집은 끝에 결국 절단했다.

마족이 정신을 못 차리고 뒤로 물러서려는 찰나 레이가 부러진 스태프를 주워 마족의 뒷목에 걸고 끌어당겼다.

마족의 상체가 훅 숙여지는 순간 길란트가 참형을 하듯 검을 도끼처럼 내려찍었다.

네가 목이 잘려나가도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레이와 길란트가 같은 심정으로 마족에게 집중했다.

허나, 또다시 방해가 들어왔다.

이번엔 암흑정령이었다.

꾸드득-!!

길란트의 일격을 대신 막아낸 암흑정령이 검은 화염을 거세게 쏟아냈다.

길란트가 화염을 뚫고 재차 검을 휘둘렀으나 이미 암흑정령이 마족을 붙잡고 훌쩍 물러난 뒤였다.

흑마법사 또한 기사단원과 루나의 협공을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 있었다.

그들 뒤로, 신체 일부가 끔찍하게 변이된 엘프가 암흑 정령과 함께 나타나 키득키득 웃었다.

"두 놈 다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떠들어대지 않았었어? 근데 꼴이 말이 아니네."

엘프가 나서지 않았다면 둘 다 머리가 잘렸으리라.

마족화가 거의 다 진행된 엘프를 보며, 길란트가 숨만 몰아쉬었다.

이제는 길란트도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 농락당하고 있다는 걸.

악마 숭배자들은 한 놈씩 모습을 드러내며 대놓고 은십자 기사단을 농락하고 있었다.

길란트는, 지금 은십자 기사단이 적의 아가리 사이로 기어들어와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악마 숭배자는 결코 저 셋이 끝이 아닐 터다.

굳이 한 놈씩 튀어나와 간을 보는 건 오락 때문일 터였다.

과연 지하도시에 숨어든 침입자를 제거하기 위해 몇 명의 합공이 필요할지, 그따위의 내기를 걸고 저들끼리 희희낙락거리고 있었다.

"..."

길란트는 질퍽이는 땅이 다리를 빨아들이는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다.

길란트는 아직 지하도시에서 완수해야만 했던 임무를 끝마치지 못했다.

이곳에서 악마숭배자들이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숫자가 얼마인지, 그리고 대체 어째서 이만한 시설을 버리고 방치했는지.

여전히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 많았다.

허나 더 이상 욕심낼 수는 없었다.

이미 이곳은 사지(死地)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발을 빼야 희망을 꿈꿀 수 있었다.

길란트가 잔뜩 경직된 목소리로 레이를 불렀다.

"레온, 물러나야 한다."

길란트가 레이를 설득했다.

레이가 아직 '용병'을 찾지 못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안쪽으로의 진입은 불가능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다가 악마 숭배자들이 추가로 합류하면 살아나가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지금 당장 퇴각한다면 아직은 살아서 후퇴할 수 있는 기회와 희망이 있다고... 길란트는 그리 믿어야만 했다.

"루코프 경, 지휘권을 넘기겠다. 레온과 협력해 이곳을 탈출해라."

길란트가 그리 선언하며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길란트의 속뜻을 모를 수가 없었던 레오니가 목소리를 높였다.

"단장...!!"

따져물으려던 레오니의 어깨를 루코프가 붙잡았다.

지금은 어린아이처럼 앙탈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전투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기사단원 다섯이 약속이라도 한듯 길란트의 곁에 섰다.

어차피 시간을 끌 사람이 필요하다면 부상자가 나서는 게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레오니는 상황을 이해했지만 납득하지 못했다.

허나 단장의 명령은 전장 위에서 절대적이었다.

머뭇거렸다간 다 같이 죽는 꼴밖에 안 났다.

길란트를 비롯한 기사단원 다섯이 악마 숭배자들은 막아내는 동안 남은 기사단원들은 출구로 향해야 했다.

지휘권을 양도받은 루코프가 명령을 내리려던 순간.

전장 한가운데서 그림자가 뭉쳐 떠올라 사람의 형상을 이루더니 사람의 말소리를 냈다.

"포기가 너무 빠르군."

그림자는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은십자 기사단을 힐난했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

감정을 알기 힘든 목소리 속에, 오로지 비웃음만이 뚜렷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가 준비해둔 스테이지가 아주 많았다.

허나 칩입자들이 전진을 포기하고 도망쳐버리면 그림자는 무대를 준비하던 배우들을 전부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서 어둠이 스물스물 기어올랐다.

셀 수 없는 마물의 울음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지하도시를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이곳을 탈출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

길란트는 가슴 속에서 울렁거리는 절망을 억지로 씹어 삼키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레온... 단원들을 부탁한다."

길란트에게 있어 레이는 최후의 보루이자 희망이었다.

레이는 비록 외부자였지만, 그가 평범한 고위 마법사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길란트는 알고 있었다.

기사단을 방패 삼기 위해서라도 레이가 기사단을 도와줄 것이라고 길란트는 소원했다.

악마 숭배자들은 침입자들이 역할을 나누려는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오락에 굶주려 있던 그들은 곧 밟아죽일 개미가 최후의 발악을 할 수 있도록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다려주었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왕국의 일개 기사단장 따위가 이곳에서 시간을 끌어보겠다니.

그 가치 없는 결연함에 절로 실소가 나왔다.

저 따위 주장을 할거면 로얄가드 급 다섯은 데려왔어야 했다.

악마 숭배자들은 기대했다.

길란트, 그의 가치 없는 결연함이 칠흑 속에서 완전히 빛을 잃고 무너졌을 때.

과연 그리되었을 때 길란트가 어떤 참담한 울음소리로 울부짖을지 기대하고 있었다.

레이가 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불쾌한 존재들이야."

그리고.

"아쉽게 됐어."

레이가 은십자 기사단과 여기까지 동행한 이유는 길 찾기와 체력 안배 때문이었다.

또한 지하도시에 관한 증인을 다수 확보해 제국과 왕국에게 충분한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레이는 본래 울트를 구출한 뒤 지하도시를 탈출하기 위해 승강기로 복귀한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나서려고 했다.

악마 숭배자들이 침입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총공세를 쏟아낼 시점을 극복하기 위해 힘을 숨기려고 했다.

허나 돌아가는 꼴을 보니 글러먹은 듯했다.

이미 감각에 잡히는 악마 숭배자들의 숫자만 일곱이 넘어갔다.

금지된 숲 밖이라면 모를까, 이곳에서 저들을 상대로 은십자 기사단은 결코 오래 버텨낼 수 없었다.

저벅

레이가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죽을 곳을 향해 레이가 나아가기 시작하자 길란트가 당혹스러워하며 외쳤다.

"레온, 네가 단원들과 같이 가야 한다...! 내가 탈출할 시간을 벌어주겠다!"

기괴한 웃음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탈출할 시간을 벌겠다니. 제 놈이 소드마스터라도 된단 말인가.

길란트는 사지가 잘린 채 바닥을 기며 단원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악마 숭배자들이 그리 만들 터였다.

인간의 간절함을 비웃는 타락한 존재들을 앞에 두고 레이가 길란트를 돌아봤다.

레이 또한 웃음을 터뜨렸다.

길란트가 지닌 '간절함'의 정체와 길란트가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얻고자 하는 '결과'가 무엇인지.

길란트와 동행하는 동안 레이 역시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기에 웃음이 멋대로 흘러나왔다.

"길란트, 네 죽음에 가치가 있나?"

"...!"

길란트가 눈을 크게 뜬 채 제자리서 굳었다.

레이가 다시 물었다.

"정녕, 네 죽음에 가치가 있나?"

레이는 길란트가 눈을 돌리고 있던 현실을 억지로 잡아끌고 와 묻고 있었다.

"사태를 이렇게까지 악화시킨 돼지 새끼들이 기사단 하나가 괴멸한들 뒤늦게라도 반성하고, 후회하고, 너희를 추모하며 그 비대한 몸뚱이를 움직일 것 같은가?"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익숙함을 사랑하고, 또한 공고하게 다져진 권력이 침해받는 걸 결코 원치 않는다.

"은십자 기사단이 이곳에서 찢겨 스러진다 해도 그들이 과연 눈이라도 하나 깜짝할 것 같은가?"

아직 그 돼지 새끼들에게 현명함이 남아있다면 길란트의 죽음이 알리모를 구원할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을 터다.

허나 훨씬 높은 확률로...

"그 돼지 새끼들은 눈을 닫고 귀를 닫고 탐욕을 채우기 위해 몰두할 거야. 그리하다 재앙이 찾아왔을 때, 가장 먼저 제 살길을 찾아 도망가겠지."

"그럼 어쩌란 말이냐!!!"

길란트가 분노했다.

참고 참았던 분노가 극한의 상황 속에서 레이를 향해 쏟아져 나왔다.

그건 어쩌면, 하소연에 가까웠다.

"대체 무얼 더 어떻게 해야 됐느냔 말이다!!!"

길란트 또한 다방면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허나 이권 다툼에 몰두하는 권력자들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들은 공고한 권력으로 저들만의 성을 쌓고 반대하는 자를 철저하게 축출했다.

"이게 내게 남은 유일한 수단이었다! 대체!! 대체 내가 무엇을 더 어떻게 해야 됐느냔 말이다!!!"

곪고 곪았던 번민과 후회의 감정이 물기 어린 목소리 위로 묻어나왔다.

오랜 방황의 끝에서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상처받은 기사가 레이를 붙잡고 답을 달라 애원하고 있었다.

악마 숭배자들이 좌절하는 길란트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며 레이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들의 기대 속에서.

레이는 새빨갛게 눈을 충혈시킨 길란트에게 되물었다.

"무엇을 더 해야 했느냐고?"

내가 만약 당신과 같은 처지였다면 과연 무엇을 더 해야 했을까.

감히 단정할 수 없었다.

감히 길란트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왔으리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레이는 지치고 지친 사내를 향해 웃음을 한 번 머금어주고는, 등을 돌렸다.

"길란트, 이곳에서 네 역할은 끝났어."

길란트는 무어라 항변하려 했다.

허나 폭발적으로 요동치기 시작한 레이의 기세가 길란트의 입을 막았다.

"그러니 남은 힘을 다해 동료를 이끌고 이곳을 탈출해서, 살아서 숲을 빠져나가. 그리고 그 방종한 돼지 새끼들한테 지금 내 말을 전해."

허공이 일그러진다.

은색 케이스가 아공간을 비집고 나오다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낱낱이 분해되기 시작했다.

"금지된 숲 내부의 사태가 극히 심각한 수준의 재해로 발전할 위험이 높다고 판단된바, 더 이상 '우리'는 너희의 방종을 좌시하지 않겠다."

바스러지는 케이스로부터 십여 개의 무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른스트가 모로스를 양도받은 대가로 건넨, 그가 외부로 반출 가능한 무구들 중 가장 가치 있고 강력한 신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 수많은 신기들 사이에서.

"이제부터."

레이가 두 자루의 검을 뽑아들었다.

"제국이 개입하겠다."

공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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