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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92화 (192/446)

192화

실험실을 둘러보던 레이의 표정이 계속 나빠졌다.

이만한 규모의 건축물이 왜 버려졌는가, 그런 의문을 미뤄두고서라도.

레이와 기사단은, 이곳에 아무것도 없거나 혹은 악마 숭배자들의 핵심 시설이 존재할 것이라 가정하고 돌입했다.

적의 핵심 시설이 가동 중이라면 침투가 발각된다 해도 소수의 인원으로 작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적의 시설 자체가 방패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물자를 쉽게 확보하기 힘든 악마 숭배자들이라면 시설이 파괴되는 걸 극히 주의할 것이란 계산이 있었다.

헌데 이곳의 구조물들은 죄다 버려진 것처럼 보였다.

이 상황에서 적의 본대와 맞닥뜨린다면, 적의 아가리 속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러면 처음에 세웠던 작전이 다 꼬인다.

일이 생각대로 풀릴 것이라 예상하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더 상황이 나빴다.

'지금 가정할 수 있는 진짜 최악의 상황은...'

"크르륵!"

마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움직임을 뚝 멈춘 사이.

실험실 건물 안에 짐승의 형상을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창자가 질질 흘러내린 와일드호그가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가 숲에서 마주했던 마물과 유사한 꼴을 하고 있었다.

뛰어난 오감을 타고나는 마물을 상대로 시각 정보를 차단하는 은폐 아티펙트는 한계가 뚜렷했다.

도망갈 수는 없으니 잡아 죽여야 했다.

레이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저 마물이 통째로 폭발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 대충 그런 의미였다.

길란트가 자기 목을 꾹꾹 누르고 아래로 내리긋는 수신호를 보냈다.

기사들이 검을 날카롭게 세운 직후, 각양각생의 마물들이 실험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와일드호그, 샤프네일, 자이언트 마우스 등 중소형으로 분류되는 마물들이 대부분이었다.

"끼엑!!!"

선두에 섰던 자이언트 마우스가 길란트의 코앞까지 접근했다.

그 찰나 레이가 지면을 얼려버리자 자이언트 마우스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자이언트 마우스의 옆구리에서 창자가 뽑혀 나와 지면을 찍어내며 균형을 다시 잡았지만, 길란트의 검이 휘둘러지는 게 빨랐다.

촤악!!

잘려나간 자이언트 마우스의 머리가 땅을 구른다.

길란트가 긴장했지만 폭발이 일어나진 않았다.

한편 레오니는 허공에 잠깐 떠올라 몸을 빙글 돌리더니 와일드호그의 목덜미에 검을 쑤셔 넣었다.

목이 다친 와일드호그가 울음소리도 못 내고 바둥거리더니 피를 토해냈다.

레오니가 잠깐 방심한 순간 와일드호그의 등이 울퉁불퉁 변하더니 창자 조각이 튀어나와 레오니를 공격했다.

"...!"

레오니가 기겁하며 물러서자 루코프가 창자를 베어낸 후 이미 너덜너덜한 와일드호그의 목을 쳤다.

촤악!! 촤아악!!

전투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제외하면 굉장히 정적이었다.

모두가 침묵 속에서 검을 휘둘렀고, 마물의 목을 우선 노려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했다.

성기사, 템플러들은 마물을 상대함에 있어 가장 효율적인 힘인 신성력을 도리어 억제했다.

모두가 하나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이 마물들이 누군가의 명령 없이 우연히 인간의 냄새를 찾아 쫓아왔을 뿐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말이다.

이 마물들을 조용히 처리하면 우리의 침입을 숨길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 낮은 희망을 품고 모두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콰드득!!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정예 기사의 숫자만 스물을 넘었다.

더군다나 '기사들의 전투'에 관해 누구보다 이해도가 높은 레이가 적재적소에 마법을 발현해 전투의 난도를 크게 낮췄다.

센스가 좋은 루나 또한 레이 못지않게 활약했다.

이내, 큰 폭음 없이 마물 무리를 전부 제압할 수 있었다.

살점이 터져나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레이가 생각한 순간.

길란트가 레오니를 붙잡고 뒤로 당기며 지면을 굴렀다.

콰앙!!!!

열기를 머금은 무언가가 실험실 건물을 폭격했다.

그 정체가 마법이란 것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린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 뒹굴고 있던 마물의 내장 조각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레이와 길란트가 동시에 외쳤다.

"실드 전개해!!!"

콰아아아앙!!!!!

루나가 펼쳐준 베리어 속에서 레이가 욕설을 집어삼켰다.

적의 습격이야 이곳에 진입할 때부터 상정하고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지하도시의 건물을 날려버릴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다.

"정말 아쉬운 게 없나 본데..."

구질구질하게 살고 있을 줄 알았더니 마음 씀씀이가 아주 바다 같았다.

어쨌든, 당장은 건물을 폭격한 놈을 잡아 죽여야 했다.

레이와 길란트가 가장 먼저 돌덩이를 박살내며 뛰쳐나왔다.

어느새 사방을 점한 마물들 사이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흑마법사가 몇 건물 떨어진 지붕 위에 서 있었다.

잠시 눈을 마주한 레이와 길란트가 곧장 땅을 박찼다.

마물들이 몰려들었으나 남은 기사단이 삽시간에 검기를 뽑아내 급소에 박아넣었다.

"끼에에에엑!!!"

마물의 비명을 들으며 레이가 스태프에서 검날을 뽑아냈다.

흑마법사가 레이와 길란트를 경계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실책이었다.

루나가 쏘아낸 화염구가, 극도로 은밀한 은폐 장막에 감싸여 어느새 흑마법사의 머리 위에 도달해 있었다.

콰아앙!!!

불길에 휩싸인 흑마법사가 허욱적거리다 뒤늦게 레이와 길란트를 견제하기 위해 마법진을 발현했다.

거리를 좁힌 레이가 지면을 쿵 내려찍으며 코어와 서클을 동시에 회전시켰다.

그드드드득!!

공간을 왜곡시킬 만큼 괴이한 냉기의 기류가 터져나오며 흑마법사의 마법진에 균열을 일으켰다.

마법진이 뒤틀리면서 드러난 찰나의 빈틈을 길란트는 우습게 파고들었다.

콰득!!!

길란트의 검이 흑마법사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 반동 탓에 흑마법사의 로브가 벗겨지며 얼굴이 드러났다.

길란트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흑마법사일줄 알았던 상대는 움직이는 시체였다.

피부는 썩어있고 눈동자 또한 완전히 죽어 있었다.

악마숭배자 놈들이 대체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본체'가 따로 있었다.

시체 인형이 이리저리 부풀었다.

콰앙!!!

폭발을 정면에서 얻어맞은 길란트가 검 자루로 땅을 긁으며 미끄러졌다.

길란트는 흐트러졌던 균형을 곧장 다시 통제해 몸을 멈춰 세웠다. 별다른 부상은 없어 보였다.

길란트는 왕실이 자랑하는 기사단 중 하나를 통솔하는 기사단장이었고, 무력만큼은 그 이름에 걸맞게 출중했다.

그렇기에 레이는 길란트가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것보다 시체 폭탄을 얻어맞고도 욕설을 내뱉지 않았다는 것에 놀랐다.

레이가 스태프를 검처럼 붙잡으며 중얼거렸다.

"이 흑마법사 새끼 더미만 세워놓고 어디 숨었어?"

답은 루나가 대신 찾아주었다.

폭발한 시체 인형으로부터 마나의 흐름을 추적한 루나가 손을 옆으로 뻗었다.

마법진이 전개되더니 들끓는 열기가 한 점으로 압축됐다.

쫘아아아아악!!!

초고열의 열선이 건물들의 외벽 따위는 단숨에 녹여내고서 표적을 향해 도달했다.

나름 잘 숨어 있다고 자신했던 흑마법사가 주변이 삽시간에 열기에 잠식당하자 다급히 로브를 펼쳐 몸을 가렸다.

초고열의 열선이 로브와 맞닿는 순간 여러 갈래 찢어지며 사방에 화재를 일으켰다.

화르르륵!!

초고열의 열선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지면에 불이 붙었다.

루나가 이글거리는 공기 속에서 짧게 말했다.

"...잡아."

더는 숨길 것도 없어진 기사단원들과 템플러가 남아있던 마물을 조각낸 후 흑마법사를 향해 돌진했다.

흑마법사는 로브를 뚫고 들어온 열기 탓에 팔 하나가 시뻘겋게 달아올랐음을 자각하며 당혹이 서린 웃음을 토했다.

"고위 마법사라더니, 상상 이상이군."

여유를 부려보려는 흑마법사를 기사들은 용서하지 않았다.

후열에 있었던 기사단원들이 동시에 검기를 방출했다.

대기를 가르고 떨어져 내린 검기의 소나기가 흑마법사가 서 있던 장소를 단숨에 초토화시켰다.

굉음 속에서 흑마법사가 몸을 뒤로 피했다.

허나 기사들이 이미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다.

은십자 기사단원들은 적이 눈앞의 흑마법사 하나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빠르게 상대의 목숨을 끊고자 했다.

사방에서 날붙이가 다가오자 흑마법사가 땅을 푸욱 밟았다.

갑자기 지면이 가라앉으며 검은 물이 주르륵 차올랐다.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 검은 물 아래에서 비쩍 마른 손아귀 형상을 한 무언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템플러 두 명이 검은 손아귀가 완전히 펼쳐지기 전에 신성력을 사슬처럼 꼬아 쏘아냈다.

부정한 것을 정화하는 광휘가 어린 사슬이 검은 손아귀가 펼쳐지는 걸 잠시 지연시켰다.

은십자 기사단원들이 겁 없이 달려들어 검은 손아귀에 검을 힘으로 찍어넣고 돌렸다.

끄드득-!

내부가 짓이겨진 검은 손아귀가 경련하다 형체가 무너졌다.

흑마법사가 로브 속에서 입 꼬리를 올렸다.

고작 손아귀 하나에 그리 심력을 쏟아서야 어찌할까.

늪처럼 느껴지는 검은 연못 아래서 부정한 권능이 새겨진 마법이 연거푸 치솟았다.

허나, 그 수많은 마법이 연못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레이가 연못을 밟았다.

코어와 서클의 반발 아래 터져나온 냉기가 검은 연못을 삽시간에 얼어붙게 했다.

마법을 발현하기 위해 허공에 뻗었던 손을 그대로 둔 흑마법사가, 시푸르게 빛나는 레이의 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마법인..."

흑마법사는 레이가 일으킨 현상이 온전히 코어의 특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흑마법사의 당혹은 오래 갈 수 없었다.

뒤를 점한 길란트가 검강을 내리그었다.

으드드득-!

방어마법이 겹겹이 전개된 로브가 갈라져 나간다.

웃음이 사라진 흑마법사 허우적거리며 물러서려는 순간 이번엔 은십자 기사단원인 소레스가 뒤를 잡았다.

소레스는, 흑마법사가 마나를 집약시켜 공격 마법을 전개하려 한다는 걸 앎에도 무시하고 검을 찔러넣었다.

상황이 긍정적이지 못했다.

뼈를 내주고서라도 일단 상대의 목숨을 취해야 했다.

그런 각오와 함께 검이 올곧게 나아가려는 찰나, 강맹한 기세가 관자놀이 옆에서 느껴졌다.

동시에 루나의 배리어가 소레스의 우측에 전개됐다.

꾸드드드드득!

루나의 배리어가 힘을 버티지 못하고 깨져나간다.

온통 새빨간 눈을 지닌 뒤틀려 있는 인간형 생명체가 휘두른 주먹이 배리어를 박살내고 소레스의 갑주가 전개한 실드까지 일그러뜨리며 소레스를 옆으로 밀어냈다.

뻐억-!

안면을 얻어맞은 소레스가 옆으로 튕겨져 나가 건물에 틀어박혔다.

쿠웅! 소리와 함께 건물 일부가 무너지며 소레스가 지면에 떨어져 몸을 굴렸다.

루나의 배리어 덕분에 죽지는 않았으나 부상이 가볍지 않았다.

레이가 고개를 돌려 소레스를 공격한 마족을 보았다.

마족이 잇몸이었던 부위를 길게 찢으며 흑마법사를 향해 괴이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자신 있게 나서더니, 형편없구나."

흑마법사가, 유난히 거대한 두 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마족을 향해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레이가 그꼴을 보며 실소했다.

지금 이 전장을 지켜보는 시선이 더 존재한다는 게 느껴졌다.

헌데 한 놈 씩 튀어나와 간을 보며 저들끼리 낄낄대고 있었다.

"이 잡것들이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군."

언제든지 죽여 없앨 수 있다는, 그딴 자신감을 갖고 말이다...

결단 (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