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쿠웅-!
모두가 결의를 다지고 승강기에 탑승했다.
사람 일백은 거뜬히 태울 면적의 지면이 가라앉으며 지하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잘 만들어졌다 해도 2천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구조물이었다.
언제든 붕괴되어 추락할 수 있었고, 또한 그럴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허나 승강기에 올라탄 이들 중 추락이 무서운 자는 없었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나를 폭발시켜 허공을 밟을 수 있는 센스 쯤은 다들 가지고 있었다.
다만 지하에 기다리고 있을 미지의 위험이 걱정될 뿐이었다.
츠즉-!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루나가 배리어를 펼치는 동안.
길란트가 레이에게 물었다.
"네가 구출해야 한다는 용병, 추적할 방법이 있는 건가?"
지하도시에 악마숭배자가 존재치 않는다고 해도 내부를 전부 뒤지려면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마경과 유사한 환경에서, 도시 전부를 수색할 만큼 오랜 시간 머물 수는 없었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안에 용병놈이 있다면... 방법이 하나 있긴 해."
"그렇군."
잠시 망설인 길란트가 레이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네게 이런 말을 건넬 입장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겠다."
"...?"
"만약 일이 잘못되면, 단원들을 부탁한다."
"...벌써부터 비관할 필요는 없지 않아? 저 안에 의외로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고..."
쿠웅!
레이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승강기가 멈추었다.
그 반동으로 머리 위에 돌조각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돌벼락을 맞는 와중에도 모두가 정면을 응시했다.
쿠궁! 드드드득!!
벽 사이가 갈라지며 내부의 공간이 드러났다.
지하도시 같은 게 아닌, 협소하고 어두운 공간이었다.
암실이었던 공간 안으로 약간이나마 빛이 흘러들어 가자 그 안에서 12쌍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특이한 건, 12쌍의 눈동자가 전부 하나의 형체에 박혀있다는 점이었다.
루나가 협소한 공간을 감싸는 방음 결계를 전개한 후 라이트 마법을 발현했다.
사방이 밝아지며 끔찍한 실험체의 모습이 드러났다.
꾸웅-!
온갖 마물을 찰흙처럼 뭉쳐놓은 듯한 형상을 한 12쌍의 눈을 가진 실험체가 둔중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리는 일곱 개였다.
"끄으어우어...!!!"
이리저리 뻗어나온 실험체의 아가리가 벌어지며 위산 같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워낙 생김새가 끔찍했던지라 기사단원들 사이에서도 말 없는 동요가 잠시 번졌다.
그러자 길란트가 곧장 검을 겨누고 키메라에게 돌진했다.
츠즈즉!!
길란트의 검 위로 검강이 발현되며 섬광을 토해냈다.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장갑을 완벽에 가깝게 무력화시킬 수 있는 빛의 칼날이 키메라의 턱을 향해 휘둘러졌다.
꽈드드드드득!!!
키메라의 안면을 보호하던 울퉁불퉁한 생체 장갑이 통째로 뜯겨나갔다.
박살이 난 키메라의 턱에서 혈액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쏟아졌다.
치익-!!
혈액과 닿은 길란트의 갑옷이 연기를 뿜어냈다.
길란트가 갑옷에 묻은 액체를 털어내며 경고했다.
"부식성 물질이다."
길란트의 경고에 기사단원들이 갑주의 방어막 기능을 활성화시키려 했다.
허나 레이가 기사단원들을 막았다.
"아티펙트 동력원이 영구적인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에너지 낭비하지 마. 피 튀기는 건 알아서 막아줄 테니 저놈 빨리 처리해."
기사단원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키메라와 가까이 접근했다.
카가가각!!!
수십의 칼날이 삽시간에 키메라의 주요 관절을 베어냈다.
키메라의 살갗이 갈라질 때마다 레이와 루나가 마법을 발현해 상처 부위를 얼려 출혈을 막았다.
키메라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버둥대자 기사단원들이 무차별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여러 마물의 몸뚱이가 난잡하게 붙어있어 주요 장기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되는 대로 찔러볼 수밖에 없었다.
치이이익-!!!
이내 키메라가 자신의 부식성 피를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사상자 하나 발생하지 않은 참 쉬운 전투였다.
허나 누구도 환호 따위를 지르지 못했다.
키메라는 어떻게 보아도 악마숭배자가 악의를 가지고 만든 실험체였다.
그게 지하도시의 입구를 돌아다니고 있음이 나타내는 의미는 명확했다.
이 협소한 공간 끝에 보이는 출입구를 부수고 나가면...
악마 숭배자에게 잠식된 도시가 기사단을 환영해줄 터였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벽 너머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거나 다가오지 않는지 귀를 기울였다.
아직까진 벽 너머에서 수상한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레이가 키메라를 바라보다 루나를 불렀다.
"기왕 결계를 펼친 김에, 여기서 한 번 호프가 감지 되는지 확인해보자."
레이가 품에서 나뭇가지를 꺼냈다.
그냥 나뭇가지가 아니라, 요즘 네 발로 기어다니고 있는 엘프인 미네르에게서 압수한 세계수의 나뭇가지였다.
알리모로 출발하기 전.
레이는 울트를 추적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루나에게 조언을 구했다.
반경 1~2 km 안에서라도 울트를 감지할 수단이 있다면 훨씬 도움이 될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루나는 레이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세계수의 나뭇가지.
그 안에는 세계수로부터 비롯된 마나가 깃들어 있었다.
기실 세계수의 권능 일부가 실체화된 물질이라 마나라 칭하기도 애매했다.
어쨌든 비슷한 성질의 물질이 울트가 지닌 '게네시스'에도 깃들어 있을 게 분명했다.
비록 저주받아 그 가치를 잃었다고 했지만, 게네시스는 세계수가 내린 태초의 뿌리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루나가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건네받고 정신을 집중했다.
세계수의 나뭇가지에 존재하는 고유한 마나를 확인한 루나가 해당 마나의 파동을 증폭시켜 넓게 퍼뜨렸다.
촤악-!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의 파동이 크게 번져 갔다.
레이가 결과를 기다리던 중에 길란트와 눈이 맞았다.
레이가 가볍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지하도시 안에서 용병 놈의 존재를 감지 못해도 너희랑 같이 도시에 진입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세계수의 고유한 마나를 활용해 울트의 존재를 파악하겠다는 건 어디까지나 '이론상 가능'한 일이었다.
이론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울트가 게네시스를 강탈당했을 수도 있었다.
이러나 저러나 레이 또한 지하도시 안을 수색해야 했다.
그때 루나가 눈을 떴다.
방금 전에 퍼뜨렸던 마나의 파동이, 또 다른 '유사한 종류의 마나'와 공명해 더욱 큰 진폭으로 되돌아왔다.
루나가 레이를 돌아봤다.
"...찾았어요."
"잘했어."
레이가 입꼬리를 올리며 기쁨을 표했다.
루나는 정말로 레이가 기대한 이상의 활약을 펼쳐주고 있었다.
하지만 루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본래 이 방법대로라면 울트의 위치가 정확히 파악되어야만 했다.
허나 공간이 일그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대략적인 방향만 알 수 있을 뿐 울트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가 없었다.
루나가 상황을 설명해주자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적인 방향만 알 수 있다면 충분해."
이제 도시를 전부 뒤질 필요는 없었다.
레이가 길란트에게 신호하자 길란트가 자기 왼쪽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은십자 기사단원들과 성기사들이 갑주에 부여된 은폐 기능을 활성화시켰다.
츠즈즉-!
제국의 특수임무대가 사용하는 아티펙트보다는 확실히 기능이 떨어지는 장비들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면 은폐가 일그러지며 쉽사리 인영이 드러났다.
허나 그 정도만 해도 어두운 곳에선 기사단원들을 시각만 활용해 찾아내기 힘들었다.
남에겐 보이진 않으나 기사단원들은 서로를 식별할 수단을 가지고 있었으니 전략적으로 굉장한 우위를 점한 거나 다름없었다.
레이와 루나 또한 은폐장을 뒤집어썼다.
길란트가 연속해서 수신호를 하고는, 도시로 진입 가능한 출입구를 열었다.
드드득!!
오래된 시설이다 보니 문 하나 열리는데도 소음이 컸다.
모두가 조심스레 지하도시 안으로 진입했다.
"...!!"
그리고,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하 도시 한가운데의 거대한 탑을 비롯해, 상당한 크기의 건물들이 지하도시를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도시의 구조물들 사이사이에 기괴한 생체조직이 점막처럼 덮여있었다.
"..."
지하도시 내부는 조용했다.
마물들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게 더 불길하게 다가와, 몇몇 기사단원들이 조심스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일단 탐색은 해야했다.
정확히 이 도시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두 눈으로 보아야 했다.
길란트가 레이를 돌아봤다.
레이는 도시 중심에서 살짝 서쪽으로 빗겨간 방향을 가리켰다.
그 방향에서 공명으로 인해 증폭된 신호가 되돌아 왔었다.
길란트가 고개를 끄덕이곤 레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선두에 서서 나아갔다.
바닥이 질척였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탓에 다들 긴장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
계속해서 전진한 끝에, 이 지하도시 안에서도 손에 꼽히는 규모의 건축물에 다다랐다.
길란트가 수신호를 통해 건물을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도시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건물 몇 개는 뒤져봐야 했다.
레이 또한 동의한 후 간단한 탐색 마법을 전개했다.
안쪽에서 살아있는 생체의 반응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레이가 신호하자 길란트를 선두로 기사단원들이 우선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레이가 뒤를 따라 건물에 진입한 후 짧게 탄식했다.
'끔찍하군...'
2000년 전에는 분명 다른 용도의 시설이었겠지만, 지금은 끔찍한 실험을 위한 시설로 개조되어 있었다.
개조에 필요한 물자를 대체 어떻게 얻었을까.
답은 어렵지 않았다.
"..."
모두가 상황의 심각성을 너무나 명확하게 인식했다.
실험실 여기저기에 개조에 실패한 실험체들이 죽어서 널브러져 있었다.
원형을 알기 힘들 지경까지 변형되어 내장을 늘어뜨린 채 썩어가는 와이번의 사체를 바라보며, 레이는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 실험실은 버려져 있었다.
잔혹한 실험이 이어졌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있었으나 모두 과거의 것이었다.
'함정은... 아니야. 이곳이 함정이라 해도 멀쩡한 실험실을 몇 년은 방치한 것처럼 꾸밀 필요는 없어.'
그건 굉장히 이상한 일이었다.
현재 레이가 들어와 있는 곳은 지하도시의 건축물 중에서도 두 손에 꼽히는 규모를 지닌 건물이었다.
'이만큼 거대한 건물을 방치할 만큼... 악마숭배자들에게 공간적인 여유가 있다고?'
지하에 세워진 도시 치고 굉장히 넓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지하 시설임을 감안한 평가였다.
애초에... 이 지하도시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성대한 환영을 받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가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종류의 불안을 느끼며 실험실 내부를 수색했다.
기사단원들은 증거가 될 만한 물건들을 꼼꼼히 챙겼다.
그런 그들을, 그림자 하나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귀엽구나."
그림자가 킬킬 웃었다.
겁도 없이 남의 아가리에 들어와 바짝 긴장한 채 몰려다니는 꼴을 보니 동정심이 일 지경이었다.
"단번에 끝내기는... 좀 아쉽군."
저들 중 '그 용병'을 찾으러 온 자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저들을 미끼로 삼아 흔들면 그 용병놈을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일단 가볍게, 밀어붙여 볼까."
도시에 숨어있던 악의가 모여들며 일렁이기 시작했다.
*
조각조각 깨진 풍경 위에서.
울트는 바닥 없는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공간의 틈새에서 홀로 천천히 찢겨 나갈 터였다.
그래서는 안 됐다.
울트는 구해야만 하는 사람이 있었다.
오직 그녀를 구하기 위해 오랜 여정을 이어갔다.
그 여정은 어쩌면, 도피라 불러야 알맞을지도 몰랐다.
울트는 무너져 가는 그녀의 곁을 끝까지 지키며 미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떠났다.
허나 이곳에서 울트는, 마경과 세계수와 그리고 저주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토록 헤매던 기적의 파편이 이곳에 있었다.
여전히 그녀를 구하기 위해선 수많은 기적이 필요했으나, 그렇기에 울트는 그녀에게 돌아가야만 했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우웅-!
게네시스가 무언가와 공명했다.
울트는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 이곳에 진입했음을 직감했다.
이건 함정인가, 아니면 유일한 탈출의 기회인가.
설령 함정이라 해도 이걸 기회로 만들어야 했다.
'악마 숭배자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곳을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곳은 그들의 본거지였으니까.
아무리 대단한 강자라 해도 포위를 뚫다가 말라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선... 이곳을 통째로 붕괴시켜야만 했다. 울트는 그리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방심한 악마숭배자들이 침입자를 가지고 놀며 여유를 부릴 때, 일격을 먹여야만 했다.
하지만.
쓰다 버린 것처럼 방치되어 있던 도시를 확인했던 울트는, 스스로에게 되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금지된 숲에...
'지하 도시가 이곳 한 곳뿐인가?'
결단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