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같이 안 왔으면 어쩔 뻔 했어! 오호홍, 앞으로도 마법사님들만 믿을게요!"
레오니가 레이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운 채 어깨를 들썩였다.
은십자 기사단원들도 환히 웃으며 레오니에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레이가 깝깝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주니 작은 환호가 터졌다.
금지된 숲에 진입하고 몇 번이나 전투가 이어졌음에도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본래 개고생을 할 줄 알았던 은십자 기사단원들은 우연히 만나서 합류한 레이와 루나의 실력이 예상을 한참 상회하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용병들이 정한 '한계선'에 접근했을 때쯤.
다시 한 번 마물 무리가 나타났다.
숫자가 꽤 됐다.
조심해서 상대하면 사상자 없이 처리할 수 있겠지만 시간이 좀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사단원들이 마나와 체력을 아낄 수 있는 진형을 고민하는 사이 루나가 레이를 돌아봤다.
레이의 눈동자엔 피곤한 기색이 어려있었다.
루나는 레이가 마물을 상대로 괜히 또 마법사 흉내를 내느라 고생하길 바라지 않았기에 그냥 마법진을 발현했다.
후욱!!
마법진을 타고 흐른 마나가 한 점으로 응축된다.
급격히 고밀도로 집약된 마나의 덩어리로부터 열기가 발산됐다.
갑작스러운 열기에 기사단원들이 당황하며 루나를 쳐다봤다.
루나가 개의치 않고 마법을 발현했다.
마법진 한가운데서, 초고열의 열선이 뻗어 나왔다.
쫘아아아아아아아아악!!!
4서클 혼합 마법, 레드 레이.
초고열의 열선이 횡으로 휘둘러지며 거대한 불길을 일으켰다.
숲 일부가 들끓듯이 타오름과 동시에 마물의 무리가 삽시간에 검게 변해 녹아내렸다.
초고열의 열선은 금방 사라졌지만, 열선이 지나간 궤적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
기사단원들은 얼이 빠진 채 검게 변한 풍경을 응시했다.
그나마 기사단원들은 눈이라도 뜨고 있었지, 용병들은 땅에 얼굴을 처박고 엎드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레이는 나무가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듣다가 루나를 돌아봤다.
레이의 눈빛엔 약간의 질책이 섞여 있었다.
잠시 고민한 루나가 답했다.
"...4서클 마법이에요."
위력은 일반적인 4서클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4서클로 분류되는 마법이었다.
그럼 된 거 아니냐.
당당하기 그지 없는 루나의 주장에 레이가 주변을 돌아보고는 자기 미간을 매만졌다.
"아, 뭐, 그래, 4서클 마법이지. 4서클 마법인 건 아는데... 그래도 이 정도 화력을 단번에 방출했으니까 마나도 좀 부족하고 체력적으로도 좀 힘들지 않니?"
"...후욱, 후욱."
루나가 뒤늦게 헥헥거렸다.
숨은 헥헥 내쉬는데 표정은 참 권태로워 보였다.
그때, 레오니가 모두에게 들리도록 크게 외쳤다.
"브라보!!"
눈물을 훔치는 시늉까지 한 레오니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레오니가 대놓고 주접을 떨자 다른 기사들도 검을 꽂아넣고 따라서 박수를 쳤다.
이만큼 대단한 마법사의 도움을 받는데 까짓 거 박수쯤은 얼마든지 쳐줄 수 있었다.
물론 레이는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레이가 레오니를 보며 가지가지한다고 중얼거리는 사이 길란트가 단원들에게 손짓했다.
"계속 전진한다."
그로부터 얼마 안 가, 선두에서 길을 안내하던 길잡이가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 들어가긴 힘듭니다."
용병들이 정한 '한계선'이 코앞이었다.
변질된 마나의 농도가 일반인은 오래 버티기 힘들 만큼 짙어졌다.
상황을 납득한 길란트가 길잡이와 다른 용병들을 돌려보냈다.
이제부터는 은십자 기사단의 몫이었다.
"후우..."
여기저기서 숨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쭙잖은 마물이나 상대하며 낮아졌던 긴장감이 다시 차올랐다.
길란트가 선두에 서서 용병들 사이에선 '금역'이라 칭해지는 구역에 진입했다.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 수록 숲의 모습 또한 더욱 기괴하게 변했다.
나무 뿌리는 말라 비틀어졌는데 나뭇가지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이리저리 부풀어서 악취를 뿜어내고 있었다.
원형도 알 수 없이 변형된 초목들을 보며, 레이는 어째서 알리모 왕국이 과거에 숲을 탐색할 때 지하 도시조차 발견하지 못했는지 이해했다.
환경이 이러하니 아무리 많은 전력을 투입한다 해도 이 넓은 지역을 '전부 확실하게' 뒤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화악!
성기사 두 명이 신성력을 발휘했다.
주변의 오염이 일부 정화되며 호흡이 편해졌다.
허나 성직자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이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사흘? 길어도 나흘 정도겠군..."
그 이상 시간을 끌면 비전투 손실이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길란트 또한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목소리를 낮춘 채 명령했다.
"빠르게 전진한다."
모두가 최대한 빠르게 숲을 탐색하며 나아갔다.
목적지로 예상되는 장소를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간지라 마물들과도 자주 부딪쳤다.
마물들 역시 금지 안에서 더욱 거칠고 흉포해졌으며 신체능력도 향상됐다.
물론 기사들의 상대는 못 되었다.
"꽤애액!!!"
기사의 검에 다리가 잘려나가 비틀거리는 와일드호그의 머리를 레이가 신경질적으로 내려쳤다.
뻐억- 소리와 함께 스태프에 적중당한 와일드호그의 골통이 깨져나갔다.
붉은 빛줄기가 줄기줄기 뻗어나오던 와일드호그의 눈동자도 골통이 깨지며 사그라졌다.
레이가 스태프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남몰래 인상을 찌푸렸다.
마물 따위야 문제가 없었지만 흑마법사나 마족이 나타난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랐다.
대륙 한가운데서라면 쉽사리 척살 가능한 흑마법사라도 이곳에선 드잡이질을 해야 했다.
'여차하면 울트고 뭐고 루나한테 마법 갈기라고 하고 같이 튀어야겠는데.'
이런 상황을 예상 못 한 건 아니었지만 역시나 직접 겪으니 다가오는 게 달랐다.
은십자 기사단원들 또한 전투를 수행하며 점점 더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게 핏물을 뒤집어쓰며 전진하길 몇 시간.
마침내 목표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곳이다."
길란트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앞을 바라봤다.
거의 다 무너진, 신전처럼 생긴 건물 하나가 시야에 보였다.
레이가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전진하면서 레오니에게 건네받은 도면을 살폈다.
정말로 고대의 드래곤과 인간이 지하 도시를 건설했다면.
드래곤은 몰라도 인간에겐 도시와 지상을 왕복할 수 있는 '승강기'와 유사한 구조물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도면에서도 승강기 역할을 하는 구조물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었다.
'저 신전 같은 곳이 도면에 그려진 건축물이 맞다면... 저곳에 지하도시로 진입할 수 있는 입구가 있겠지.'
모두가 긴장을 최대한 끌어올린 채 무너진 신전 건물에 접근했다.
기사들이 날카로운 감각으로 신전 건물 내부를 훑었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진 않았다.
주변을 경계하며 한 명씩 신전에 진입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신전은 텅 비어 있었다.
적대적인 존재는커녕 마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레이가 신전 안을 둘러보았다.
언뜻 보아선 특별할 게 없는 돌로 된 신전일 뿐이었다.
레이는 권능을 사용하기 전에 길란트에게 먼저 물었다.
"목적지가 이곳인 것 같은데, 지금부터 삽질할 생각은 아니겠지?"
"기다려라."
길란트가 신전의 중앙에 위치한 기둥으로 다가갔다.
기둥을 몇 번 두드려 본 길란트가 기둥을 향해 주먹을 강하게 휘둘렀다.
퍼억!!
기둥을 보호하던 오래된 돌이 바스러지며 그 안에 기계장치가 드러났다.
길란트는 기계 장치의 작동 원리는 전혀 몰랐으나, 도면을 연구한 학자들로부터 어떻게 해야 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는지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길란트가 기계 장치 속에서 빛을 잃은 마석을 빼내더니 새로운 마석을 집어넣었다.
"..."
곧장 변화가 일어나진 않았다.
허나 얼마 못 가.
쿠웅---!!
지면이 한 번 울리며 그나마 제 모습을 갖추고 있던 신전 건물 대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워낙 오래된 탓에 건물은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핵심적인 기능까지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트드득!!!
건물의 바닥 일부가 원형으로 약간 가라앉았다.
다들 직감적으로 그곳이 지하도시로 내려가는 입구이자 승강기임을 알아차렸다.
몇몇 기사단원이 탄식을 토했다.
다들 바보가 아니었기에, 지하도시에 한 번 진입했다가 적에게 쫓기게 되면 탈출하기 굉장히 힘들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퇴로 확보가 불가능하거나 굉장히 힘든 전장.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레이가 길란트에게 말했다.
"다행히 삽질은 안 해도 되겠네."
"...그래, 다행이군."
"일단 진입하면... 그리고 퇴각할 상황에 처한다면 꽤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할 텐데, 진입할 건가?"
"...메시지 전달을 부탁한다."
길란트가 소형 통신 아티펙트를 레이에게 건넸다.
짧은 거리에서 단방향 메시지 전달만 가능한 아티펙트였다.
이 아티펙트를 통해 전달된 메시지는 리오슈코에 남아있는 은십자 기사단원들이 받아 상부에 보고할 터였다.
레이가 아티펙트를 루나에게 넘기고는 팔짱을 꼈다.
기사단원들이 초조한 감정을 억누르며 길란트는 보았다.
길란트가 입을 열었다.
"도면의 지하도시가 실존함을 확인. 입구 및 승강기 확보. ...지하도시로 진입하겠다."
레오니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다른 기사단원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루나가 아티펙트를 활성화시켜 메시지를 전송한 후 길란트에게 아티펙트를 돌려주었다.
입술을 꽉 깨문 길란트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단원들 모두가 길란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길란트는 가슴이 꽉 조여오는 걸 느꼈다.
몇 번이고 결심하고 결심했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 갈등이 일었다.
내가 이들을 사지로 모는 것이 정녕 옳은 길인가.
나의 고집이 무의미한 희생을 낳지는 않을까.
정말로, 이 선택이 과연 최선일까.
답을 구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고민 끝에 길란트는 목소리의 떨림을 숨겨가며, 단원들에게 뒤늦은 선택지를 주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리오슈코로 복귀하길 희망하는 인원이 있다면..."
카각!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길란트가 의아한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레이가 휘두른 스태프가 길란트가 들어 올린 검집에 막혀 정지해 있었다.
당혹스러워하는 길란트를 향해 레이가 스태프를 다시 겨누었다.
"이봐, 은십자 기사단의 기사단장 나으리. 헛소리 말고 정신 좀 똑바로 차려."
"그게 지금 무슨..."
"네놈은 기사단의 우두머리야."
레이의 그 한 마디가 길란트의 가슴을 헤집었다.
레이는 고뇌가 서린 길란트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질책을 이어갔다.
"고민할 게 있으면 출발하기 전에 끝내야 했고, 결단을 내렸으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라도 단원들을 독려해야지. 네놈이 그따위로 갈팡질팡했다간 이길 전투도 패배할 거야."
"..."
"그리고 기사단원 중에 내뺄 놈이 있었으면 진즉에 내뺐겠지. 단장이란 놈이 그걸 굳이 물어봐야 아나?"
레이의 단정에 몇몇 단원들이 나는 돌아갈 생각이었다고 볼멘소리를 했으나, 이내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가슴을 탕탕 쳤다.
레이의 말마따나, 여기까지 와서 두렵다고 내뺄 놈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결의가 어린 눈으로 길란트를 바라봤다.
길란트는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이를 악물었다.
가슴을 헤집는 온갖 감정을 억눌러 삼킨 길란트가 거칠게 검을 뽑아내 하늘을 겨누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알리모 왕국의 은십자 기사단으로서... 우리의 사명을 다할 것이다."
쿵!!!
기사단원들이 동시에 발을 강하게 구르며 왼쪽 가슴에 주먹을 가져갔다.
길란트가 기둥에 있던 기계 장치의 레버를 아래로 당기며 명령했다.
"돌입한다."
결단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