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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89화 (189/446)

189화

날이 많이 추워졌다.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 안에서 오늘도 훈련을 마친 요하나가 근육을 풀어주고 있을 때쯤.

주변을 돌아다니던 알레시아가 훈련실로 찾아와 요하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항상 열심히 하는구나!"

"네, 음... 열심히 해야죠."

레이의 충고도 있었고, 당장 스페라와 엎치락뒤치락하는 중인지라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꽤 상한 스페라가 악착 같이 훈련해 매진하고 있어 잠깐 방심하면 추월 될 게 뻔했다.

요하나가 살짝 웃어 보이며 알레시아에게 물었다.

"근데 여긴 무슨 일이세요?"

"그냥 심심해서 찾아와봤도다!"

알레시아가 솔직하게 답했다.

레이도 없었고, 행동 반경도 많이 제한되어 있는 탓에 이렇다 할 오락거리가 없었다.

알레시아가 훈련실을 살펴보다 요하나가 벗어놓은 훈련용 가죽 바지를 가리켰다.

"요즘은 좀 빨아 입느냐?"

"..."

인상을 와락 구긴 요하나가 바지를 가져와 알레시아에게 내밀었다.

알레시아는 용기백배해서 바지를 향해 코를 킁킁거리더니 활짝 웃었다.

"별 냄새 안 나는구나!"

땀내야 살짝 나긴 했다. 근데 그건 훈련복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요하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답했다.

"스페라 님께 훈련복을 몇 벌 더 받아온 덕분에 돌려 입으며 자주 세탁하거든요."

"진작 그렇게 하지 그랬느냐..."

남 눈치 보느라 요하나는 훈련복 더 달라는 소리도 함부로 하지 못했지만, 알레시아는 그걸 쓸데 없는 걱정이라 여겼다.

당장 요하나가 받아온 아티펙트만 해도 필립스 백작령 1년 치 예산쯤은 되어 보였다. 에른스트의 눈에 요하나는 그만한 투자 가치가 있단 소리였다.

헌데 훈련복 같은 걸로 왜 눈치를 본단 말인가.

알레시아가 썩 부러운 눈으로 요하나를 바라보는데 데런이 훈련실을 찾아왔다.

"누님, 여기 있어요?"

요하나가 가죽 바지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답했다.

"무슨 일이야?"

"보여줄 게 있어서... 어, 알레시아 님도 여기 계셨네요?"

알레시아에게 꾸벅 인사를 한 데런이 히죽 웃었다.

"마침 잘 됐네요. 알레시아 님께도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데런은 굉장히 들뜬 것처럼 보였다.

요하나와 알레시아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 데런이 코어의 마나를 회전시키며 검을 뽑아냈다.

이내, 충분히 검기라고 칭할 수 있는 빛의 칼날이 데런의 검 위에 발현됐다.

"조심하세요."

미리 경고한 데런은 약 20 m 정도 떨어져 있는 훈련실의 나무 표적을 향해 검기를 방출했다.

콰가각!

검기에 적중 당한 나무 표적이 금세 너덜너덜하게 변했다.

알레시아가 박수를 짝짝 쳐주었다.

"오...! 대단하구나...!!"

"헤헤..."

엑스퍼트의 경지에 진입한 것을 확실히 증명한 데런이 기쁨을 참지 못하고 히죽였다.

입이 귀에 닿을 것처럼 올라간 데런을 바라보던 알레시아가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한 해가 지나간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데런의 나이가 이제 18살이구나.'

18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알레시아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레이가 9살 때 저 정도 했던 것 같은데, 딱 2배 더 걸렸구나!"

"..."

데런의 표정이 축 처졌다.

물론 데런의 성취 정도면 어딜 가서든 수재 내지 천재라고 치켜세워질 만했다.

그래듀에이트의 경지까지 늦든 빠르든 확실히 오를 수 있겠다고 평가받는 인재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았다.

허나 그 데런조차 레이와 비교하면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9살에 검기를 뽑아낸 미친놈은 역사책을 뒤져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방금까지 신이 났던 데런이 약간의 허탈함을 느끼고 있자 요하나가 알레시아를 향해 톡 쏘아붙였다.

"왜 데런 기를 죽이고 그러세요?"

"오, 오해이니라.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그리 말씀하시는 알레시아 님도 아직 2서클 밖에 안 되잖아요!"

팩트로 얻어맞는 알레시아가 어질어질한 정신을 붙잡고 항변했다.

"서, 서클의 숫자가 전부는 아니니라! 그리고 나도 곧 3서클의 경지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알레시아의 항변에 요하나가 눈가를 좁히며 입 꼬리를 올렸다.

"와! 3서클에 오르시면 알레시아 님도 루나처럼 강해지시는 거예요?"

"..."

잠시 침묵한 알레시아가 흐물흐물하게 변한 채 항복을 선언했다.

"내가 잘못했느니라아..."

가져다 비벼도 루나를 가져다 비비다니.

알레시아는 아직도 어린 날 암산 대결에서 루나에게 처참하게 개털렸던 굴욕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간신히 기운을 차린 알레시아가 말아쥔 주먹으로 요하나를 툭툭 치며 따졌다.

"말실수 한 번 했다고 날 그리 질책해야겠느냐?"

내가 니들한테 해준 게 얼마인데!

니들 먹고 자고 하는데 든 돈이 다 누구한테 나왔는데!

알레시아가 그리 나오면 요하나도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잘못했습니다."

영혼 없는 요하나의 사과에 눈을 가늘게 떴던 알레시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레이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구나."

레이가 없으니 크게 즐거운 게 없었다.

카렌 또한 많이 우울해하고 있었고 말이다.

요하나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다치지 말고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음, 그래도 그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루나가 함께하고 있으니까.

심심찮게 산 하나를 통째로 조져대던 루나를 떠올린 알레시아가 활짝 웃었다.

*

황제와 독대를 요청한 에른스트가 기다림 끝에 로얄가드의 안내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에른스트는 우선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려다 움직임을 멈추었다.

탁자 몇 개가 들어가면 꽉 찰 만한 작은 방 안에, 황태자인 포이보스가 에른스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

"어서 오시오. 프리슬란 후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에른스트는 예를 갖춘 후 준비된 자리에 앉아서 조심스레 물었다.

"폐하께선..."

"많이 안 좋으시네."

"..."

에른스트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언제나 냉정했던 소드마스터의 숨결에서 착잡함이 묻어나왔다.

포이보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다잡았다.

"황족의 숙명일세. 슬퍼할 일도, 괴로워할 일도 아니지."

포이보스의 눈빛은 얼마 전보다 확연히 깊어져 있었다.

포이보스가 붉은 눈동자로 에른스트를 마주 보며 본제로 들어갔다.

"무슨 일로 폐하를 뵙고자 했는가?"

"알리모 왕국에서 실종된 울트 자작의 수색 건과 연관된 일입니다."

"폐하께서 후작에게 일임한 사안으로 알고 있는데... 문제가 생겼나 보군."

에른스트가 품에서 종이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루나가 제작한 도면의 사본을 다시 베껴 그린 사본이었다.

지하도시, 그리고 흑마법사 무리를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는 우두머리가 금지된 숲 내부에 존재할 수 있다는 추측을 에른스트가 보고했다.

물증은 없었지만 정황만 보면 상당히 설득력 있었다.

보고를 모두 들은 포이보스가 중얼거렸다.

"사실이라면 큰일이군..."

"금지된 숲에 밀반입된 물자가 적지 않습니다. 제국 정보국이 파악한 것보다 그 수량이 세 배 이상 많을 겁니다."

"경시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이해했네."

도면의 사본을 살핀 포이보스가 혹시나 해서 물었다.

"이곳에 첩보대를 진입시킬 생각인가?"

"제가 추가로 파견한 대원들이 이미 진입했을 겁니다."

"...지하도시가 실존한다면 살아 돌아오기 힘들겠군."

"..."

에른스트는 망설였다.

황제가 정정하지 못한 시기에 병력을 움직이겠다고 주장했다가는 불순한 의도를 품은 것처럼 비칠 수 있었다.

에른스트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귀환하리라 믿지만, 유사시 그들을 지원하기 위한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후작을 질책하는 건 아니네만, 애초에 너무 무리한 작전을 명한 것이 아닌가? 제국의 영토도 아니지 않은가."

"제 실책입니다. 다만... 관련된 보고가 들어왔을 땐 이미 지하도시로 진입했을 시점이었습니다."

"공명심 때문인가. 자주 있는 일이지. 헌데, 반드시 '구출'이 필요한가?"

첩보대원도 결국 소모품이었다.

하나하나 목숨을 챙기다 보면 끝이 없었다.

에른스트가 집단의 이런 생리를 모를 리가 없었다.

포이보스는 에른스트가 지하도시에 진입한 대원들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묻고 있었다.

에른스트가 답했다.

"...객지에서 잃기엔 아까운 인재가 지하도시 수색 작전에 참가했습니다."

"후작이 그리 표현할 정도면 보통 인재는 아니겠군."

더군다나 에른스트가 이렇게 바짝 고개를 숙이고 무리한 부탁까지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아끼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에른스트에게 빚을 지워놓는 건 포이보스도 달가운 일이었기에 일단 고민은 해보았다.

당장 은밀하게 추가 병력을 왕국 안으로 투입하려면 시일이 오래 걸렸다.

군사를 국경으로 전진 배치하고 알리모 왕국에게 게이트를 개방하라고 협박할 게 아니라면, 빠른 지원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람 하나 구하자고 횡포를 부리며 전쟁까지 불사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포이보스가 담담하게 웃었다.

"일단 후작의 의견을 먼저 들어볼 수 있겠는가?"

*

최종 정비가 끝났다.

은십자 기사단원 2명과 레오니가 고용한 마법사 용병은 질렌할 백작의 감시를 비롯한 몇 가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리오슈코에 남기로 했다.

그들을 제외한 은십자 기사단 전원과 성기사 두 명, 그리고 레이와 루나가 금지된 숲으로 향했다.

길잡이와, 길잡이가 귀환할 때 보호해줄 용병들 또한 길란트가 고용해 탓에 무리가 꽤 커졌다.

새로 고용된 길잡이는 올다가 레이에게 안내했던 길과 비슷한 경로로 안내해주었다.

인원이 많아서 마물을 자극한 탓인지, 아니면 길란트가 고용한 길잡이의 실력이 모자란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레이는 은십자 기사단과 금지된 숲을 나아가는 동안 마물과 굉장히 자주 조우하게 됐다.

용병들은 기겁을 했으나 기사들에게 있어 마물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레이와 루나가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마법을 활용해 마물들이 디딘 지면의 경사를 조금만 흔들어주어도 기사들은 훨씬 수월하게 마물을 상대할 수 있었다.

촤아악!!

길란트가 검기도 발현 않고 원숭이 형상을 한 마물인 샤프네일을 베어냈다.

5번째로 조우한 마물 무리가 전멸했다.

생채기를 입은 용병 몇 명을 제외하면 사상자는 없었다.

계속해서 금지된 숲을 나아가는데 하늘 위에서 괴상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레이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날개 달린 마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마물이긴 했지만 정체를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와이번이었다.

와이번은 비행 속도가 빨라 검기를 방출해 요격시키기엔 꽤 까다로운 마물이었다.

물론 그것도 기사들만 있을 때 이야기였다.

휘익!!

루나가 바람 정령을 소환했다.

중상급 바람 정령이 허공을 날아 와이번 주위의 공기 흐름을 어그러뜨렸다.

비행을 방해받은 와이번이 속도를 줄이자 루나가 곧장 마법을 발현했다.

공기가 얼어붙으며 와이번의 날개막에 성에가 꼈다.

"키에엑!!"

날개가 얼어붙은 와이번이 간신히 고도만 유지한 채 제자리서 빙글빙글 돌았다.

은십자 기사단원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시에 검기를 방출했다.

콰가가가각!!!!

검기에 적중당해 단숨에 걸레짝으로 변한 와이번이 땅으로 추락했다.

흥분한 레오니가 주먹을 말아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봤죠? 우리 마법사님들 끝내주는 마법 똑똑히 봤죠? 같이 안 왔으면 어쩔 뻔 했어!"

주접을 떠는 레오니를 레이가 깝깝한 감정을 담아 바라봤다.

돌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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